“왜 꼭 잠 안 자고 그런 걸 해야 돼?”
“이런 게 다 자기와의 싸움이야.”
아버지가 엄숙하게 대답하자 아들이 물었다.
“왜 가만히 있는 자기하고 싸워야 되는데?”
‘자기 알기’ 열풍
프로이트의 책을 읽다보면 ‘모든 문제가 성(性)으로 귀결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마도 성적 억압이 심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20세기 심리학 키워드가 성이었다면 요즘은 ‘자기를 안다’는 문제인 듯하다. 얼마 전 심리 학술대회에 갔다가 인파 때문에 깜짝 놀랐다. 그처럼 많은 사람이 ‘자기’라는 문제를 연구하려고 열성적으로 모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같은 대학에서 남편은 철학을, 부인은 심리학을 가르친 부부가 있었다. 1990년대 이후 남편의 학생 수는 급감했지만 부인의 수강생 수는 자꾸 늘어났다. 부인이 가르치는 마음 알기니, 자기 알기니 하는 것은 철학자 남편이 보기에는 학문이라기엔 일천했다. 남편이 샘이 나서 빈정거렸다.
“숫자만 많으면 뭐해? 학생들 열의가 문제지.”
부인이 대답했다.
“무슨 소리. 내가 강의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180개의 눈동자가 모두들 반짝반짝 빛나는데.”
남편이 화를 냈다.
“거짓말 마. 그 반에는 애꾸도 없단 말이야?”
‘치유하는 자기 이야기 쓰기’ 강좌

우연한 시작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소설 창작법을 가르치고 있는 데다 정신분석 분야도 잘 알고 있으니 그 두 가지를 결합한 강좌를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 곰곰 생각해보니 글쓰기에는 자기분석적인 요소가 있어 정신분석과 유사했다.
나는 소설 쓰기를 좋아한다. 젊었을 때는 “왜 소설을 쓰냐”는 질문을 받으면 ‘자기 구원’이니 ‘세계 참여’니 하는 거창한 말을 내세웠다. 사실은 쓰는 게 재미있고 즐거워서였다. 전업 작가로 나선 이후 난 거의 일 년 단위로 작업실을 옮겨 다닌다. 책 한 권을 쓰고 나면 그 장소의 지기(地氣)가 쇠했다는 핑계를 대며 말이다. 예전 작업실이 있던 곳을 지나칠 때면 “여기선 어떤 소설을 썼다”는 기억이 떠올라 공연히 행복해진다. 그처럼 ‘행복한 작업’에 요즘 사람들이 절실해하는 자기 알기까지 더해진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글 쓰는 기술을 익히는 것은 어렵다. 아무리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가 재밌더라도 처음에 그 방법을 익힐 때는 힘이 든다. 두려움을 누르면서 물에 코를 박아야 하고 무릎이 까지고 피나는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그 기술이 몸에 익는다.
그러나 강좌의 어려움은 그 때문은 아니다. 이런 강좌를 수강하려는 사람들은 대체로 글로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그래서인지 프로작가처럼은 아니더라도 글쓰기에 꽤 익숙한 편이다.
문제는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데 있다.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 통찰할 필요가 있다. 미래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동을 찾는 일은, 이미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결국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되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