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없어도 짧은 고갯짓, 흔들리는 눈빛 하나에 모든 것을 담았던 때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울림이 그대로 전해지는 사랑. 조선조 여류시인 매창(梅窓)이 “송백(松柏)처럼 늘 푸르자 맹세하던 날, 님을 사랑하는 마음(恩情)은 바닷속처럼 깊기만 했다”라고 했을 때 바로 그런 사랑이다. 푸른 소나무 옆에서 눈길을 떨구고 있는 매창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이걸 사랑의 동아시아적 방식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의식과 육체가 서구적으로 도벽된 이 척박한 시대엔 까마득히 잊혀버린, 케케묵은 고릿적 사랑의 방식이다.
장이머우는 매창의 송백 대신 산사나무를 상징으로 삼아 섬세한 연출로 우리에게 그런 사랑법이 한때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가 그려낸 것은 시대의 아픔과 교직되며 피어난 순수하고 절절한 사랑이지만, 그 사랑법의 상실과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 ‘상실의 시대’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진짜 주제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겐 그래서 영화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게 적지 않았다.
서양의 ‘메이 플라워’
영화에서 산사나무는 두 연인의 순수한 사랑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다. 산사나무 아래서 둘의 사랑이 시작되고 끝난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산사나무 꽃이 필 무렵 남자는 그 나무 아래에 묻힌다. 사전을 들춰보니 산사나무의 꽃말이 ‘유일한 사랑’이다. 왜 하필 산사나무였을까 했더니 연관이 있다.
동양의 산사나무는 주로 약재로 쓰는 나무다. 열매가 소화가 잘되게 하고 적체된 음식물을 내리는 건위제로 쓰인다. 신곡, 맥아와 함께 ‘삼선(三仙)’이라 불리는 소식약(消食藥)의 대표적인 약재다. ‘약방의 감초’보단 못하지만 감초만큼이나 많이 쓰인다. 한의사라는 직업적 관점에서는 약재로나 쓰지 사랑타령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나무다.
장미과에 속하는 산사나무는 우리나라에선 ‘아가위나무’ 또는 ‘찔광이’라고 한다. 화창한 5월에 무성한 초록잎 사이로 흰 꽃무더기를 피워내는 산사나무는 사실 우리가 친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청춘을 아름다운 순백의 사랑으로 유혹할 만한 나무다. 요즘은 공원의 조경수나 가로수로도 심기 때문에 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그 꽃을 쉽게 볼 수 있다. 햇빛을 좋아해 양지바른 야산의 능선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잘 자란다. 영화에서도 양지바른 산 언덕배기에서 가지를 드리우고 연인들에게 그늘진 쉼터를 내줬다.
8월경이면 구슬만한 열매들이 붉게 익는다. 꽃사과의 열매와 흡사하지만 열매 표면에 자디잔 흰 반점들이 점점이 박혀있고 꼭지 쪽에 꽃받침 자국이 남아있는 게 다르다. 사과나무와 한 족보여서 익은 열매는 새콤하고 달큼한 사과맛이 난다. 이 열매를 따다 씨앗을 제거하고 말린 것을 약재로 쓴다. 이를 산사육, 또는 산사자라고 하는데, 흔히들 그냥 산사라고 부른다. 당구자(棠毬子)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