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우리 관객들에게 ‘방랑의 결투’는 그야말로 새로운 체험이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나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판타지, 무협의 세계가 이 영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중국인이 내세운 의협(義俠)이 한국인의 정서를 자극했다. 그 후에 나온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장철 감독, 1967), ‘심야의 결투’(장철 감독, 1968), ‘용문의 결투’(호금전 감독, 1966)도 성공을 거뒀다.
당시 쏟아져 나온 홍콩무협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여성 검객의 등장이었다. ‘방랑의 결투’의 주인공은 정패패라는 이름을 가진 똘똘하게 생긴 여검객이었다. 그때까지 나왔던 액션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주먹을 휘두르거나 총질하고 칼질하는 남성이었다.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저 남자 주인공의 상대역이거나 남자들에게 싸움의 원인을 제공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칼과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정패패는 남자들과 똑같이 싸우는 여성이었다. 게다가 얼굴도 예쁘고 남성 못지않은 의협까지 지닌 협객이었다. 무용을 전공한 정패패는 제비처럼 날렵한 몸짓으로 단검 두 자루를 가지고 악당 남자들을 베고 찔렀다. 그녀는 영화 내내 중심에 서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액션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부터 인기를 끌며 제작되던 야쿠자 영화의 인기가 시들해질 무렵, 여자 도박사가 주인공인 ‘붉은 모란’ 시리즈가 나오면서 죽어가던 야쿠자 영화를 되살렸다. 야비한 도박 중독자들이 돈을 잃은 뒤 시비를 걸자 여자 도박사는 기모노의 옷깃을 잡아 어깨와 가슴 위까지 드러나게 옷을 벗는다. 등과 어깨에 새겨진 붉은 모란. 그녀는 단검을 들어 다다미에 꽉! 꽂고는 남자들을 노려본다.
그녀의 이름은 후지 준코, 중성적인 미모를 지닌 매력적인 여배우였다. 기모노를 입고 짧은 보폭으로 움직이다가 넓은 소매 속에 감춰둔 단도로 남자 야쿠자들의 숨통을 끊어놓는가 하면, 모두가 등을 돌린 몰락한 야쿠자를 지키기 위해 신흥 세력과 대결한다. 1960년대 후반 홍콩의 정패패와 일본의 후지 준코는 미소년 같은 얼굴에 남성들이 보여줄 수 없는 우아하고 날렵한 몸동작으로 남성 관객을 사로잡았다.
후지 준코 이후 일본의 여성 협객은 더욱 진화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가지 메이코였다. 가지 메이코는 미소년 같은 중성적인 미모로 승부수를 띄운 정패패나 후지 준코와는 외모부터 달랐다. 긴 생머리와 우수에 찬 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가지 메이코와 ‘킬빌’
메이코의 연기는 세계적인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타란티노가 만든 영화 ‘킬빌’의 마지막 대결 장면, 우마 서먼과 일본인 킬러(루시 리우)의 눈 속 대결은 메이코가 연기했던 ‘수라설희’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수라설희’ 시리즈에서 메이코는 단검을 양손에 들고 후지 준코보다 더 잔혹하게 남성들과 싸웠고, ‘긴자 은나비’ 시리즈에서는 단도를 던져버리고 장검을 들었다. 눈처럼 하얀 기모노를 입고 그녀가 적진으로 들어가면 검은 양복을 입은 20~30명의 남성 야쿠자가 장검을 휘두르며 덤벼든다. 그녀의 칼에 베인 남성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하얀 기모노는 금세 새빨간 피로 물든다.
정패패나 후지 준코가 싸울 때만 해도 그녀들의 곁에는 언제나 멋진 검객이나 야쿠자가 있었고, 마지막 순간 이 남자들이 그녀들을 지켜줬다. 그러나 가지 메이코는 달랐다. 그녀의 주변에도 남자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메이코를 존경하는 부하일 뿐이었다. 오히려 남자들이 메이코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마지막 대결도 언제나 메이코의 몫이었다. 이전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진화였다.
홍콩에서는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지닌 남자배우 왕우와 이소룡이 등장하면서 여성을 앞세운 액션 영화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액션 영화는 ‘예스마담’ 양자경이 등장할 때까지 10년 넘게 긴 휴식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땠을까. 관객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던 1960년대, 충무로도 무협 영화로 들썩였다. 홍콩 무협 영화가 성공을 거두자 부랴부랴 무협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웨스턴 스타일의 주먹 싸움만 하던 한국 영화계에도 검객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