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황승경의 극과 인간

연극 ‘낙타상자(駱駝祥子)’ 무시당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감동 서사

“누가 상자를 낙타로 만들었는가”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9-10-08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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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어서도 다 내주는 ‘낙타’와 도시빈민 ‘상자’

    • 희망을 잃자 상자는 ‘괴물’이 돼버리고…

    • 中 ‘1호 인민예술가’였지만 변사체로 발견된 원작자 라오서

    • ‘20세기 中 문학’ 장편소설 1위 작품 재창작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인력거꾼은 사라진 직업의 대표적인 예다. 물론 요즘도 관광지에서는 가끔 보이지만 이동 수단으로서 인력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술 속에서 인력거꾼은 그대로 살아 있는 낯익은 직업이다. 시대 환경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예술의 특성상 인력거는 근대(近代)를 그리는 수많은 예술 장르에서 등장한다. 

    인력거는 19세기 중엽 일본에 파견된 미국 선교사가 고안한 이래 급속하게 퍼졌다. 특히 한·중·일 3국에서 인력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대표적 수송 수단이었다. 가마보다 빠르고 흔들리지 않으며 바퀴가 있어 한 사람이 거뜬하게 움직일 수 있다. 인력거꾼은 밑천 없이도 일할 수 있어 신종 직업으로 급부상했고, 많은 도시노동자가 그 일을 했다.

    인력거꾼의 삶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그런데 1898년 서울 청량리와 서대문 사이를 운행하는 전차가 생겼다. 속도도 빠르고 운임도 저렴한 전차가 운행 구간을 점차 넓혀가자, 인력거꾼의 작업 환경은 급속히 열악해진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 날’(1924)을 보면 인력거꾼 김첨지는 근 열흘 동안 손님을 못 태워 돈 구경을 못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듯 우리나라 인력거꾼은 ‘레드오션’에서 경쟁하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된다. ‘운수좋은 날’ 뿐 아니라 주요섭의 ‘인력거꾼’(1925), 루쉰(魯迅)의 ‘일건소사’(1919), 위다푸(郁達夫)의 ‘박전’(1924), 라오서(老舍)의 ‘낙타상자’(1936) 등 여러 국내외 소설은 인력거꾼이라는 직업을 통해 당시의 처참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중국 작가 라오서(老舍·1899~1966)의 ‘낙타상자’는 인력거꾼을 사회 밑바닥을 대표하는 직업이지만 마음을 다잡으면 굶지 않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직업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해 경제적 성취를 얻어도 군벌들의 싸움과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력거꾼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친숙한 이 소설은 2000년 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이 선정한 ‘20세기 중국 문학 베스트 100’에서 문학 전체 3위, 장편소설 부문 1위에 올랐다. 본명이 수칭춘(舒慶春)인 라오서는 베이징에서 몰락한 만주족 군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화단운동(청나라 말기인 1900년 중국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중국을 침공한 8국 연합군(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부친이 전사하자, 그는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베이징사범학교를 졸업해 교사가 된 그는 이어 발발한 5·4운동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5·4운동은 베이징 학생들의 반제국·반봉건주의 시위가 단초가 돼 몇 달 동안 전국으로 확산된 혁명적 운동이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의 중국 내 조차지(칭다오를 비롯한 산둥반도)의 권리를 일본에 일임한다. 권력 유지에 급급했던 중국 군부도 일본과의 밀실 협약을 통해 이를 수락하자 중국 민심은 분노로 폭발했다. 우리의 3·1운동과 러시아혁명에 고무된 중국 학생 3000여 명은 삼엄한 단속에도 굴하지 않고 5월 4일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집결해 시위를 벌였다. 당일 학생 시위는 강경 진압됐지만, 이는 전체 학생의 동맹휴학과 상인들의 동맹휴업,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으로 이어졌다.



    ‘앙가주망’ 라오서

    라오서. [위키피디아]

    라오서. [위키피디아]

    평범한 지식인이던 라오서는 ‘5·4운동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중국인이 더는 열강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최근 조국 법무부 장관의 발언으로 유명해진 ‘앙가주망(engagement·지식인의 사회참여)’을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베이징 토박이인 그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의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후 런던대에 다니며 1925년부터 5년간 영국에 체류하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 속 배경은 항상 베이징이었다. 그는 베이징의 구어·속어를 광범위하게 차용했고, 1000년 동안 수도였던 베이징의 독특한 도시 경관과 문화적 생활양식을 잘 묘사해 ‘베이징의 아들’로도 불렸다. 베이징의 인력거꾼, 순경, 돌팔이 의사, 창녀, 도둑, 교수, 학생, 장사꾼, 도배장이 등 중국 전통 문학에서 경시하던 하층민의 삶을 진솔하게 그렸다. 1936년에는 산둥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첫 장편소설이 바로 ‘낙타상자’인데, 출간되자마자 크게 주목받았다. 

    1년 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금 창작열에 불타올랐다. ‘중화전국문예계 항적협회’를 결성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8년간 주도적으로 이끌며 항일구국운동에 몰두했다. 1945년엔 미국에 ‘릭쇼 보이(Rickshaw Boy)’로 번역된 ‘낙타상자’가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했고, 미국 국무원 초청으로 미국에 가 4년간 체류하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귀국해 ‘제1호 인민예술가’가가 됐다. 

    인간 존엄을 우선으로 하는 라오서의 문학 세계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이념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라오서는 정부 지침에 순응하며 문학계 대표 인사로 정부 행사에 앞장섰다. 1952년 그는 ‘마오쩌둥 주석은 나의 문학에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를 발표하며 자아비판조차 서슴지 않았고, 자신의 주요 작품도 ‘해당행위’라는 이유로 가위질했다. 초판본이 24장 16만 자인 ‘낙타상자’도 3분의 1 가량 삭제하고 145곳을 수정해야 했다. 

    그러나 1966년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의 광풍은 67세의 라오서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부르주아 작가’ ‘반동 문인’ ‘봉건귀족의 후예’라는 원색적인 비판 속에 그는 중학생들로 이루어진 홍위병에게 납치됐고, 온갖 치욕스러운 욕설과 모욕적인 구타를 당한 끝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귀가했지만 곧 실종되고 만다. 그리고 모교인 베이징사범대 인근 태평호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당시 급하게 화장해 유골조차 남지 않아 그의 사인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1978년에 복권되면서 안장식이 치러졌지만 그가 쓰던 안경과 두 개의 붓을 유골 대신 묻었다. 동시에 그의 소설도 금서에서 해제됐고, 비로소 중국인들은 낙타상자 초판본을 읽을 수 있었다. 

    2015년 한국을 강타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지만 낙타는 소처럼 버릴 게 하나 없는, 죽어서도 인간에게 희생하는 동물이다. 사람에게는 운송수단이자 고기와 젖, 털, 가죽을 내주고, 심지어 대변은 말려 땔감으로, 소변은 희석해 샴푸로 사용한다. 낙타가 별명인 주인공 ‘상자’의 운명은 제목에서부터 어느 정도 예상된다.

    왜 ‘낙타’인가

    원래 라오서는 인력거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쓸 의도는 없었다. 1936년 봄 산둥대에 재직하던 동료와 담소를 나누던 중 우연히 동료가 들려준 베이징 인력거꾼 낙타의 이야기가 창작의 샘을 솟아나게 했다. 몇 달 고심한 끝에 라오서는 낙타가 별명인 인력거꾼의 심리를 통해 부와 권력을 가진 자의 억압과 착취를 감내하던 도시빈민의 삶을 묘사했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낙타상자’를 집필했다. 

    시골 출신으로 고아인 주인공 ‘상자’는 20대 초반 인력거꾼이다. 건장하고 선량하고 근면하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3년 동안 근검절약해 자신의 인력거를 마련하지만 반년 만에 무법천지 군벌 전쟁의 포로로 잡혀 애지중지하던 인력거마저 빼앗기는 신세가 된다. 군대에서 도망쳐 나오며 낙타 3마리를 끌고 나오지만 전쟁통에 제값으로 팔지 못해 인력거도 못 사고 낙타라는 별명만 얻게 된다. 다행히 어진 성품의 지식인 조 선생의 자가용 인력거꾼으로 채용돼 다시 우직하게 돈을 모은다. 대학교수인 조 선생에게 시국사범 체포령이 떨어지자 조 선생 가족은 급히 도망가고 홀로 남겨진 상자는 수사팀에 전 재산이 든 저금통을 빼앗긴다. 이렇게 그의 꿈은 또다시 산산조각 난다. 

    할 수 없이 상자는 예전에 일하던 류 사장의 인력거 회사에 들어간다. 그런 어느 날 만취해 실수로 류 사장의 무남독녀 딸 호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호호는 이를 구실 삼아 결혼을 요구한다. 20대 초반의 그는 37세의 호호와 어쩔 수 없이 결혼한다. 비상금으로 인력거를 장만한 이들은 베이징 빈민촌의 단칸방에 신접살림을 꾸미고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한다. 그러나 호호가 출산 중 고령에 난산으로 고생하자 턱없이 비싼 의료비 마련을 위해 상자는 다시 인력거를 팔지만 아내와 아이는 함께 사망하고 만다.

    “죽고 나면 한 줌이야. 그게 다야”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청운의 꿈을 품고 베이징에 와서 생사를 넘나들며 갖은 고생을 했지만 모든 게 물거품이 되자 상자는 술, 담배, 도박에 빠진다. 다시 만난 조 선생의 도움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얻게 된 상자는 오래전부터 맘에 두고 있던 복자와 새 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상자는 군인의 첩으로 팔려갔다 버림받고 돌아온 그녀를 찾아 나선다. 술주정뱅이 인력거꾼 이강은 딸 복자를 사창가로 또다시 팔아버렸고, 이를 견디지 못한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상자는 무너지고 만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그는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상여꾼이 된 그는 먹고 마시고 오입질하고 도박하며 게으르고 교활한 괴물이 돼 나락으로 떨어진다. 연극 ‘낙타상자’에서는 죽은 호호와 복자가 모두 타락한 상자에게 나타나 “죽고 나면 한 줌이야. 그게 다야”라고 말한다. 

    라오서의 소설은 이미 중국 내에서 영화와 경극으로 각색돼 관객과 만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낭독 공연을 통해 연극 공연 가능성을 실험했고, 지난 6월 서울연극제에서 초연하며 관객의 호응을 받았다. 여세를 몰아 극공작소 마방진은 상자의 마지막 상여 장면을 좀 더 선명하게 다듬어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17~20일 대학로예술극장)에 공식 초청받아 연극 ‘낙타상자’를 재공연한다. ‘휴머니스트’ 라오서의 중국 문학에 연출자 고선웅은 맛깔스러운 한국 연극의 정서를 불어넣었다. 라오서와 고선웅은 ‘낙타상자’를 통해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는 이 땅의 모든 이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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