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학기제 느슨함 틈타 외국으로 ‘스쿨링’
석 달 체류에 2000만 원 훌쩍
빈부격차, 자유학기제의 두 얼굴
부실한 커리큘럼에 꾸역꾸역 학교 다니는 아이들
학업부진 우려 현실로… 자유학기제 실효성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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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가 말하는 ‘스쿨링(schooling)’은 말 그대로 ‘학교교육’을 뜻한다. 현지에 있는 공립 혹은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현지 아이들과 똑같이 수업을 받는 것. 12월 초에 나가는 이유는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우 겨울방학이 2주 정도로 짧아 나머지 10주 동안 학교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자유학기는 단기 유학하기 좋은 시기”라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 자유학기 동안에는 교과 수업(주 20~22시간)은 줄어들고 나머지 시간은 특기나 진로와 관련된 체험학습(주 11~13시간)으로 채우기 때문에, 다소 오랫동안 학교를 비워도 부담이 덜하다는 생각이 강하다. 최씨가 알아본 스쿨링 가격은 학비 500만 원에 숙박비 600만 원으로 총 1100만 원이 든다. 비행기 티켓에 석 달 생활비까지 합치면 2000만 원은 족히 들 것으로 예상된다.
방학 껴서 석 달 외국행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금수저 스펙’으로 세간이 떠들썩한 가운데, 아이들에게 학업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으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자유학기제’마저 빈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2014년 전국 800여 개 학교에서 시작된 자유학기제는 2015년 2500여 개 교로 늘어, 2016년부터 전국 모든 중학교에 전면 시행됐다. 또 지난해부터는 학교 재량에 따라 자유학년제도 시행되고 있다. 자유학년제는 자유학기제를 한 학기에 그치지 않고 1년간 시행하는 제도다. 자유학기제는 취지만 놓고 보면 나무랄 데가 없다. 학생들이 중간·기말고사 등의 부담에서 벗어나 ‘꿈과 끼’를 찾으며 자신의 진로를 탐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또한 자유학기제는 2025년도부터 본격 시행되는 ‘고교학점제’의 기초 작업이라 볼 수 있다. 고교학점제는 대학에서처럼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진로에 따라 다양한 과목을 선택·이수하고 누적 학점이 기준에 도달하면 졸업을 인정받는다. ‘적성을 찾아 공부한다는 점’에서 자유학기제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지난해 교육부는 2025학년도부터 ‘고교학점제’를 전면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자유학기제의 취지와 달리 현실에서는 예상 밖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최씨처럼 자유학기제의 ‘느슨함’을 틈타 아이에게 외국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안겨주려는 부모가 늘고 있는 것. “자유학기는 외국 나가기 딱 좋은 시기”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물론 한 학기 내내 학교를 빠지는 건 불가능하다. 진급과 졸업에 필요한 출석일수가 전체 수업일의 3분의 2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기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1년에 수업일수가 190일이라면 질병결석, 무단결석, 그외 어떤 사유든 64일 이상 결석하면 유예처리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아이가 겨울방학 시작하기 전인 12월 초에 나가 새 학기 시작되고 며칠 뒤인 3월 초에 귀국한다. 그러면 최장 12주 정도 현지에 머물게 된다. 방학을 뺀 나머지 기간은 ‘체험학습보고서’로 출석을 대신한다.
자유학기제, 놀기 바쁜 아이들
서울 강남 자곡동에 사는 곽모 씨는 지난 겨울방학 때 중1, 초4 두 딸과 함께 말레이시아에서 ‘두 달 살기’를 하고 돌아왔다. 유학원을 통해 7주 과정 스쿨링에 참여했는데, 아이들은 말레이시아 국제학교 정규과정과 싱가포르 사립학교 ESL 수업을 함께 들었다고 한다. 곽씨는 “요즘 스쿨링으로 말레이시아가 뜨고 있다고 해서 다녀왔다. 중학교 1학년인 큰딸이 사춘기라 힘들었는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즐겁게 놀다 온 덕분에 기분 전환이 충분히 된 것 같다”고 말했다.곽씨의 두 달 살기는 큰딸이 먼저 제안해서 시작됐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며 스쿨링을 졸랐다고 한다. 곽씨는 “2학년 올라가서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자유학기제로 마음 편할 때 나가고 싶다고 하더라”며 “주변에 봐도 이때 외국에 나가는 아이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에서 유학원을 운영하는 박모 원장은 “중학교 1학년은 현지 나이에 맞춰 7학년을 다닌다. 요즘 우리나라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좋기 때문에 외국에서 수업을 받는 데 큰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단기 유학 경험이 고입이나 대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외국어 능력이 향상되고 글로벌 무대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스펙’이다. 서울 강동구 상일동에 사는 학부형 임모 씨는 “어린아이들이 외국으로 영어 캠프 간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들었지만, 막상 내 주변 사람들이 아이를 데리고 잠깐도 아닌 몇 달씩 살고 오는 걸 보니 기분이 착잡하다. 그사이 내 아이는 꾸역꾸역 학교 다니며 공부에는 도움도 안 되는 동아리 활동만 하고 있으니, 어떻게 있는 집 아이들과 경쟁이 되겠느냐”며 한탄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유학기제가 제대로 운영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많은 아이가 노는 거에만 정신이 팔려 자유학기제 본 취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수포자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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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상암동에 사는 학부모 김모 씨는 “어느 책에서 보니까, 덴마크나 영국 등은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직업체험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하더라. 아이들이 한 달 정도 회사나 공장에 직접 다니면서 직업체험을 한다던데, 이런 식의 살아 있는 수업이 왜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학교 밖 체험은 고사하고, 교내 활동조차 부실한 학교도 많다. 정원이 다 찼다는 이유로 관심도 없는 수업을 억지로 듣는 아이들도 있다. 서울 마포구 소재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모 군은 “진로 관련 체험과 동아리 활동은 인터넷으로 전교생이 동시에 지원하는데, 조금만 늦어도 자리가 다 차서 결국 내 관심사와 거리가 먼 활동을 하고 있다”며 “동아리도 종이접기반에 억지로 들어갔는데 동아리 활동 때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해마다 자유학기제 우수 사례를 소개하며 학생과 교사, 학부모 모두가 자유학기제에 만족스러워한다고 홍보하지만, 자유학기제에 대한 불신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학업 성취도가 떨어질 거란 불안감이 크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자유학기제 때문에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더 늘어난다”는 푸념도 들려온다.
자유학기제를 시행하는 학기에는 170시간 이상을 자유학기 활동으로 채워야 한다. 따라서 일반 교과 수업 시간은 그만큼 단축돼 핵심 사항만을 배울 수밖에 없다. 중간·기말고사도 보지 않으니 일부 아이들은 자연스레 ‘자유학기는 공부하지 않는 학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강남의 한 수학학원 원장은 “고등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배웠을 내용을 전혀 모른다고 얘기하는 아이들이 있다. 수학은 연계성이 강한 과목인데, 어느 부분 하나라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더는 진도가 나가기 힘들다. 이러니 ‘수포자’가 점점 늘어 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육부에 뒤통수 맞은 기분”
8월 7일 ‘2019 자유학기제 수업콘서트’에서 참가자들이 ‘자유학기제 수업 및 평가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결국 서울시교육청은 내년부터 서울 시내 모든 초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1학년 학생은 학력 미달 여부를 가려내기 위한 ‘기초학력 진단검진’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9월 5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2020 서울학생 기초학력 보장 방안’을 발표하며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성적으로 줄 세우는 풍토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기초학력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지 못하는 불편한 구조가 됐다”고 시인했다.
기초학력 진단 검진은 2009년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이 공동 개발한 시험으로, 초3 학생은 읽기와 쓰기, 셈하기 등 3개 영역, 중1 학생은 국어·영어·수학 등 세 과목을 치른다. 결과는 ‘기초 학력 도달’과 ‘미도달’로 나오고 학습 부진 학생들이 어떤 영역에 취약한지 알려준다.
결국 서울시교육감의 자기성찰과 같은 발표에 학부모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사는 학부형 이모 씨는 “그동안 학부모들과 언론에서 ‘자유학기제 때문에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숱하게 외쳐도 계속 외면하더니, 이번 교육부 발표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든다. 자유학기제의 취지는 과연 언제쯤 제대로 살아나는 건지, 우리나라 공교육을 계속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