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난다. 당사자들 상처에 비할 순 없지만 판사도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울적함의 조각이 커피 속 각설탕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서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법정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편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정재민 전 판사, 작가
나에게 커피는 글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가장 자주 하는 일이 글을 읽거나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커피를 홀짝거린다. 글이 써질 때보다 써지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으므로 양이 많은 커피를 시킨다. 가령 ‘벤티’ 사이즈. 그걸 다 마시고도 자리를 떠날 때 보면 노트북에 몇 문장 못 건진다. 미끼만 잔뜩 쓰고 허전한 어망을 들고 가는 낚시꾼 처지가 되고 마는 일이 부지기수다.
글이 안 써지면 창밖으로 햇볕이 차고 기울어지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면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이나 감정이 참새처럼 불쑥 날아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요즘 세상에 참새를 보는 일만큼 드물다.
잘 내린 커피 같은 글
내가 만약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였다면 커피를 어떻게 마셨을지 생각해본 적도 있다. 벤티 대신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는다.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고 여유롭게 창밖 거리를 바라본다. 물 반, 고기 반 저수지에 낚싯대를 집어넣은 것처럼 금세 글감 입질이 온다. 그동안 누구도 생각지 못한 싱싱하고 참신한 소재가 온몸을 퍼드덕, 퍼드덕거리며 끌어올려진다. 나는 씨익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노트북을 켜고 타이핑하기 시작한다. 손가락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지만 머릿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속도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해 후들거린다. 그러나 손가락의 통증이나 피로감을 느낄 수 없다. 글 내용에 나 자신도 흠뻑 몰입돼 있기 때문에. 채 반 시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원고지 30매 분량의 원고가 완성된다. 유유히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신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다. 마치 조조가 준 술이 채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 온 관운장이 마저 마시던 술처럼.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고 노트북의 텅 빈 화면 위에는 커서가 홀로 깜빡이기 시작한 지 오래다. 깜빡 깜빡 깜빡.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켜놓은 비상 깜빡이 같다. 빵빵빵!!! 등 뒤에서 글 마감이라는 경적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것 같다. 걸작을 쓰려는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 수준 이상의 글을 쓰려고 욕심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글쓰기가 어려운지. 가수 박진영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강조한 “공기 반, 소리 반”을 “문장 반, 마음 반”으로 실천하고 싶을 뿐.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슬램덩크의 슛 가르침대로 “문장은 거들 뿐”을 실천하고 싶을 뿐.
물론 쓸 수만 있다면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가을날 거리를 지나치는 한 자락 바람 같은 글. 뒤늦게 바람이 자신을 훑고 지나갔음을 알고 슬쩍 뒤를 힐끔거리게 되는 글. 잘 내린 커피 한 잔 같은 글. 라테처럼 부드럽고, 에스프레소처럼 응축되고, 카푸치노처럼 스타일리시한 글. (아메리카노처럼 맹물이 잔뜩 들어간 글 말고) 이처럼 좋은 글이 무엇인지에 대해 쓰는 것은 쉽다.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되기는 어려워도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는 쉬운 것처럼.
커피의 세계와 소주의 세계
스무 살이 넘으니 내 친구들도 커피를 마셨다. 낮에는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시는 것보다 커피를 마실 때 더 성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카페인 같은 물질이 내 몸에 들어가서 인위적으로 정신을 각성시키는 것이 찝찝했다. 왠지 내 영혼의 안방을 남에게 내주는 것 같았다(그러면서도 술 마시는 것에는 왜 거부감이 없었을까. 영혼이 가출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면서).
판사가 돼서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덧붙일 조그마한 이유 한 가지는, 커피를 마셔서 각성이 되면 마음속 사회 통념에 대한 균형 감각의 저울 바늘이 평소보다 더 냉정하고 엄격한 쪽으로 움직일 것 같아서였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지나치게 정확하고, 똑똑하고, 엄정하고, 완벽하고, 아귀가 딱딱 맞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과 불안감이 있다(물론 그럴 능력도 없다). 수학 문제는 딱딱 떨어져야 정답 같은데, 세상이나 인간 문제는 그러면 이미 정답이 아니라는 선입견이 박혀 있는 것 같다. 현실에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치밀하고 냉정하고 계획적이고 완벽한 경우가 많지 않다. 술에 취해 죄를 저지른 사람을 맨 정신도 아니고 커피를 마셔 평소보다 각성된 상태에서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사리에도, 예의에도 안 맞는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신 사람이 보는 세계와 소주를 마신 사람이 보는 세계는 다르다. ‘커피의 세계’는 이성과 질서가 지배하고, ‘소주의 세계’는 감성과 즉흥이 지배한다. 법정에서 만나는 범죄는, 특히 폭력 범죄는 대부분 범죄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발생한다.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고래고래 욕설을 하고, 커피에 취해 사람을 때리거나 칼로 찌르고, 커피를 마시고 경찰서를 찾아가 벌거벗고 행패를 부린 피고인을 본 적 없다.
‘배우신 분’들은 니체를 인용해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의 구별을 말한다. 아폴론은 이성적이고 아름답고 지혜가 충만한 반면, 디오니소스는 열정적이고 즉흥적이고 방황하는 술의 신이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모두 제우스의 자식이지만 아폴론의 어머니는 신(神)인 반면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는 인간이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늘 방황하고, 좀 더 인간적이다.
나는 판사로서 법복을 입고 있을 때는 (제아무리 커피를 안 마신다 해도) 커피의 세계, 아폴론의 세계, 지나치게 의로운 세계 속에 있다. 내가 쓰는 판결문은 세상의 질서와 일의 원칙과 사람의 도리를 말하고 (나도 못하면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피고인을 저격한다. 반면 작가로서 글을 쓸 때에는(커피를 마시기는 해도) 소주의 세계, 디오니소스의 세계, 의로움의 강박이 없는 세계 속에 머문다. 여기서 쓰는 글은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비틀거리는, 흠결 많고 미성숙한 나 자신을 그린다.
판사는 커피의 세계에 있다 보니 곧잘 소주의 세계를 망각한다. 지나치게 각성된 논리는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베고 만다. 인간의 논리는 언어에 기반을 두고, 언어는 단조롭고 단편적이므로, 논리적이라고 해서 꼭 진실과 정의를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은 커피의 세계와 소주의 세계를 오간다. 한 인간을 판단할 때는 두 세계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헬라인들도 델포이 신전에서 연중 절반은 아폴론을, 나머지 절반은 디오니소스를 모셨다.
헤이그의 톰
7세기경 에티오피아의 카파(Kaffa) 지방에 칼디라는 염소 치는 소년이 살았다. 어느 날 염소들이 유난히 흥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밤에 잠을 자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염소들이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 잎사귀를 따 먹고 있었다. 칼디가 직접 먹어보니 과연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났다. 이웃 이슬람 사원에서 수련하며 만성 피로를 느끼던 승려들도 이를 즐기게 됐다. 이것이 커피의 기원이다.내가 매일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네덜란드에 있는 유엔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일할 때다. 마치 앞 이야기의 승려들처럼 고된 업무에 만성적 피곤을 느끼던 외국인 동료들은 하루에도 너덧 번씩 사발 같은 컵에 커피를 마셨다. 거기 끼려다 보니 나도 커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국제재판소 앞에 스타벅스가 생겼다. 거기 처음 간 날 금발의 백인 남성 점원이 내 이름을 물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이름을 말했다. “재민 정” 그랬더니 철자까지 물어본다. “J. A. E. M. I…” 이렇게 알파벳 하나씩 말하려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 발음이 신통찮아서 그런지 점원이 몇 번을 더 물어봐 시간이 더 걸렸다. 힘들었지만 혹시 그가 개업 기념으로 추첨해서 선물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성의 있게 철자를 알려줬다. 그런데 점원은 내 이름을 종이컵에 적고 있었다. 커피가 나오면 그 이름을 불러서 주려는 것이다. 다음 날 다시 그 커피숍에 갔는데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추첨해서 선물 주는 게 아니란 걸 알고 나니 슬슬 짜증이 났다.
이런 말을 했더니 동료들이 굳이 본명 댈 필요 없이 ‘톰’과 ‘제인’ 같이 아무 이름이나 대면 된다고 했다. 아하! 다음 날 커피전문점에 갔을 때 내 이름을 묻는 점원에게 말했다. “I’m Tom” 그러자 점원은 단번에 ‘Tom’을 컵에 적었다. 철자를 묻지도 않았다. 커피가 나오자 그가 ‘톰’을 불렀고 내가 다가가 잔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완벽히 ‘톰’이었다. 시인 김춘수 선생의 시 ‘꽃’에 나오는 대목을 빌리자면,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나는 그에게로 가서/ Tom이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니 이제는 내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점원이 “굿모닝, 톰”이라고 할 정도가 됐다. 나는 그렇게 한 달 정도 ‘톰’으로서의 인생을 살았다. 톰 크루즈 형님과 이름이 같았다. 이제 ‘명’실 공히 글로벌 시대 국제사회의 일원, 진정한 유엔 근무자가 된 것 같았다. 텔레비전에서 미국이 쏘아 올린 ‘제미니’ 우주선을 보고 어감이 좋다고 내 이름을 지었다는 아버지가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다시 동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톰’과 ‘제인’은 쉬운 이름의 예시로 든 것이고(우리로 치면 ‘철수’나 ‘영희’ 같이) 요즘 시대에는 구식 이름이라면서 깔깔거리고 웃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럼 요즘 젊고 잘생기고 돈도 좀 있는 친구들이 많이 쓰는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누군가가 ‘마틴’이라 했다. 다음 날 커피숍에 갔을 때 “굿모닝 톰”이라 인사하는 점원에게 정색하고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톰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도 당신이 톰이 아닌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내가 말했다. “I’m Martin.” 그가 정색하고 말했다. “Excuse me?(뭣이라?)”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전직 판사이자 현 행정부 공무원. ‘사는 듯 사는 삶’에 관심 많은 작가. 쓴 책으로는 에세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보헤미안랩소디’(제10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