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北·中·러 밀월 안보 위기… 동북아 ‘왕따’ 된 한국

  • 윤성학 고려대 러시아CIS연구소 교수 dima7@naver.com

    입력2019-09-2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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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방경제포럼서 韓외교 뒷전으로 밀려

    • 북극해 가스전 프로젝트 日이 가로채

    • 中·러, 北과 결속 미국 패권에 도전

    9월 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5차 동방경제포럼. ‘한러 비즈니스 다이얼로그’에 참가한 알렉산더 크루티코프 러시아 극동개발부 차관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경제 협력이 왜 미미한지에 대한 질문은 참으로 답하기 어렵지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한국은 수년간 같은 주제에 대한 선언만 계속한다. 사업이 진행되지는 않고 침묵만 흐른다.”

    성과 없는 新북방정책

    2월 13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유리 트루트녜프 러시아 부총리가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9-브리지 행동계획’에 서명하고 있다. [뉴시스]

    2월 13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유리 트루트녜프 러시아 부총리가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9-브리지 행동계획’에 서명하고 있다. [뉴시스]

    호의적 발언을 기대한 한국 측 참석자들은 이 말을 듣고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한국 최고위 참석자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같은 행사(한러 비즈니스 다이얼로그 )의 축사에 나선 홍 부총리는 “정치·외교적 갈등으로 인해 약화한 유라시아 국가 간 경제적 가치사슬(value-chain)을 보강하고, (북한 등) 지정학적 요인으로 끊어진 남·북·러·중 간 가치사슬을 연결하며, ‘9-브리지(9개 협력 사업)’ 협력을 통해 새로운 가치사슬을 창출하자”고 제안했다. 

    공허한 데다 알맹이도 없는 홍 부총리의 이 연설은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9-브리지’ 제안 이후 진척된 게 없는 신북방정책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홍 부총리는 동방경제포럼 내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포럼의 부속 행사인 한러 비즈니스 다이얼로그에 참석 뒤 유리 트루트녜프 러시아 부총리와 30분가량 면담한 게 전부다. 당연히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도 만나지 못했다. 북한 대표로 참석한 리용남 내각부총리와도 공식 면담 일정을 잡지 못해 회의장에서 잠시 인사만 나눴을 뿐이다. 

    동방경제포럼에서 이렇듯 한국이 ‘왕따’를 당한 반면 북·중·러, 러·일, 러·인도 간에는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며 새로운 사업들이 잇따라 검토·제안됐다. 동북아에서 한국 외교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어젠다로 제시한 신북방정책이 실종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현실은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 

    일본은 러시아가 야심만만하게 추진 중인 북극해 LNG(액화천연가스)-2 프로젝트의 지분 10%를 사들이기로 했다. 9월 4~6일 열린 동방경제포럼의 하이라이트였던 본회의에서 아베 총리는 북극해를 항해하는 쇄빙선을 통해 LNG를 캄차트카까지 수송한 다음 일반 LNG선으로 환적한 후 아시아·태평양 지역뿐만 아니라 인도양까지 공급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아베 총리가 이 같은 발언을 할 때 모디 인도 총리는 활짝 웃었다.

    한국이 주저하는 사이 일본이 가로채

    2017년 러시아는 야말LNG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북극해의 LNG를 파이프라인이 아니라 선박으로 수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서방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중국이 30%가량의 지분을 갖게 됐다. 러시아는 야말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북극해 천연가스전 개발에 돌입했다. 

    러시아는 LNG 운반선을 제작하는 한국에도 북극해 가스전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한국이 러시아 리스크를 이유로 주저하자 일본이 기회를 가로챈 것이다. 일본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가로 자국 조선기업의 LNG선 판매를 확신하고 있다. 

    한국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최대 교역 상대다. 한국과 극동의 교역 규모는 2016년 55억 달러에서 지난해 97억 달러로 증가했고, 올해 들어 상반기까지 57억 달러에 달한다. 그렇지만 이 중 대부분이 러시아로부터 석유 및 LNG를 수입하는 데 쓰인다. 극동 지역에 대한 한국의 투자는 9개 프로젝트에 5500만 달러에 머물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투자와 비교하면 한국은 걸음마 수준이다. 

    러시아 극동 투자 부진의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기업들의 의욕 부족이다. 기업인들은 선수금환급보증서(선수금을 줄 때 은행·보험 등 금융회사로부터 받는 보증서) 발급과 통관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극동 투자에 주저하고 있다. 실제로 극동의 투자 환경은 좋은 편은 아니다.

    미국에 대항하고자 밀착한 중국과 러시아

    9월 4~6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5차 동방경제포럼. [신화=뉴시스]

    9월 4~6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5차 동방경제포럼. [신화=뉴시스]

    중국과 일본의 경우를 보면 기업 투자의 배후에는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리더십이 있다. 한국 정부는 신북방정책과 관련해 기업의 투자를 격려할 수 있는 대형 프로젝트를 발굴하지 못했다. 특히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이 교체(송영길→권구훈)되면서 위상이 축소되고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된 것도 투자 부진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의 러시아 투자가 부진한 반면 중국은 갈수록 공격적이다. 중국이 참여하는 사업 분야도 다양해지고 있다. 중국은 야말LNG, ‘시베리아 힘’ 가스관, 극동 유전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농업 분야에도 뛰어들었다. 이번 동방경제포럼에서 중국국영곡물회사(COFCO)는 극동에서의 콩 재배 및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러시아산 대두 수입에 관한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고 특별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동방경제포럼에서 후춘화(胡春華) 중국 국무원 부총리에게 “러시아와 중국이 국제 문제에서 서로 협조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한 후 경제 분야 성과를 일일이 언급했다. 중국, 러시아 양국은 경제협력뿐 아니라 국방고위급 회담 등을 통해 군사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동북아는 군사·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중국이 러시아 및 북한과 결속을 강화해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신냉전 구도’다. 올해 7월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한일 갈등이 고조된 틈을 노려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진입했으며, 러시아 군용기는 독도 영공을 두 차례나 침범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미국에 대한 공세적 대응이 한국 영공을 침범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미국에 대항하려는 중국과 러시아의 밀착 행보가 일회성이 아니라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러시아는 중국의 경제 지원이 절실하고 미국과 무역전쟁 중인 중국은 러시아의 군사력과 국제적 위상이 필요하다. 중국, 러시아 간 군사협력 수준을 높이는 협정이 곧 체결될 가능성도 높다. 러시아는 안보 측면에서 미국의 압도적 물리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다.

    중국과 러시아에 접근하는 북한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외교적 고립 탈출을 위해 올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었으며 6월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평양으로 초청해 정상회담을 했다. 이후 북·중·러 밀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와 협력을 추진하는 것은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018년 기준 북한과 중국의 교역액은 40억 달러에 달하지만 러시아와는 4000만 달러에 불과하다. 북한이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하면 대중 의존도를 낮출 수 있으며 경제협력뿐 아니라 인도주의적 지원도 받을 수 있다. 

    다만 전략적 차원에서 북·중·러 삼각연대는 불가능하다. 냉전 시대에는 이념적 측면에서 삼각연대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러시아와 중국은 전략적 협력관계지만 두 나라 외교에서 핵심 파트너는 미국이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고 남북 및 북·미회담에 반대하지 않으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를 지지한다. 

    러시아가 집중하는 최대 현안은 경제 문제와 미국과 갈등을 빚는 중거리미사일 문제다. 경제제재에 놓여 있어 숨통이 막힌 북한처럼 러시아도 서방의 경제제재 때문에 손발이 묶여 있다. 중국처럼 알게 모르게 북한을 도와줄 형편이 아니다. 

    대북제재가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이 버틸 수 있는 힘은 중국으로부터 나온다. 순망치한의 지정학적 이해에 따라 중국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나 중국 또한 미국과 경제전쟁 한가운데 놓여 있다. 국제사회가 정해놓은 제재를 벗어난 지원은 불가능하다.

    북·중·러 밀월이 안보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

    군사적 차원에서 북·중·러 삼각협력은 가능하지 않지만 전술적 차원의 북·중·러 밀월은 상당 기간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중·러 관계는 구조적이라기보다는 상황 의존적이다. 북·미 간 합의를 통해 북한 핵 문제가 풀릴 때까지 북·중·러 밀월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중·러 밀월이 지속되면 한국은 동북아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보복,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연장 종료 등으로 일본과 관계가 껄끄럽고 동맹은 미국 하나만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은 일종의 안보 위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북·중·러 밀월이 이어지면 한국은 경제적 기회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북극해 LNG 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데 실패하면서 대규모 LNG선 발주도 놓칠 수 있다. 북극항로 개척과 러시아 자원 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것도 힘들어질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동북아 철도 연결 사업은 착수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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