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단독] 朴, 탄핵 선고 직후 “일만 하다 날 돌아볼 시간 없었다”

‘마지막 비서관’ 천영식 ‘대통령 박근혜 최후 140일’ | 5부 ‘회한’ (마지막회)

  • 천영식 전 대통령비서실 홍보기획비서관·계명대 초빙교수 youngsikchun@gmail.com

    입력2019-09-19 13: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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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미와 옥천에 임시 거처 알아보기도

    • 탄핵 선고 TV로 지켜본 후 하루 종일 짐만 싸

    •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미안합니다”

    • 탄핵 후 청와대에 이틀 더 머문 진짜 이유

    • 최초의 독신 여성 대통령의 관저 생활

    • 오전 5시 기상해 라디오로 외국어 공부

    • 몸에 밴 절약 정신이 빚은 해프닝들

    • “왜 대낮에 가로등불이 들어와 있나요”

    • “나도 다른 예쁜 옷 입고 싶을 때가…”

    • “호떡이 먹고 싶다” 세균이 많아 결국 못 먹어

    2017년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헌재가 헌정 사상 처음 대통령을 탄핵하는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헌재는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수많은 문제 제기를 무시하고 선고를 강행했다. 

    사람을 침대에 눕혀 키가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자르고,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춰 다리를 늘여 죽였다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이정미 재판관 퇴임일에 맞추어 선고 일정을 짜 맞췄다. 그 과정에서 고영태의 녹취록 등 새로운 증거들은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그날 대통령은 관저에서 홀로 헌재 선고 장면을 TV로 지켜보고 있었다. 탄핵 인용이 선고된 뒤 대통령은 조대환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에게 확인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 대통령은 관저에서 같이 지내던 행정관을 불렀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역사상 처음 이뤄진 헌재의 대통령 파면. 대통령도 헌재도 그다음 수순은 아무것도 예고하지 않았다. 



    펑펑 울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당장 청와대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참모들과 이별 의식을 해야 하는 건지. 그 어떤 것도 준비된 것은 없었다. 

    그저 전인미답의 길을 홀로 가야 했다. 대통령은 눈물을 최대한 참았다.

    탄핵 선고 후 하루 종일 짐을 싸고…

    ‘커터 칼 피습사건’ 치료 후 2006년 5월 29일 병원에서 퇴원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곧바로 대전으로 내려가 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커터 칼 피습사건’ 치료 후 2006년 5월 29일 병원에서 퇴원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곧바로 대전으로 내려가 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대통령은 극단적으로 불행한 현실을 여러 번 경험했다.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프랑스 유학을 중단하고 눈물을 참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눈물을 참았으나 귀국 비행기 안에서는 내내 울었다고 과거 그의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남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했지만, 속은 한없이 힘들었다. 아버지가 흉탄에 쓰러졌을 때도 이 소식을 전하던 아버지의 참모에게 눈물 대신 “전방은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속이 온전했을 리 없다. 나는 언젠가 대통령에게 “당시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대통령은 “실제 그런 생각이 났다”고 대답했다. 나라 걱정이 먼저 나더라는 것이다. 감내하기 어려운 위기를 여러 번 겪은 대통령은 이제 탄핵이라는 불행까지 겪게 됐다. 기구한 운명이다. 

    대통령은 극단적 순간에 대단히 강인한 사람이다. 과거 커터 칼 테러(2006년 5월 20일 오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참가하던 도중 괴한에게 커터 칼로 얼굴을 피습당한 사건)를 당했을 때에도 손으로 상처를 감싸며 태연하게 대처했다. 정치적 생명을 잃은 이날도 대통령은 모든 고통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묵묵히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박스에 일일이 물건을 분류해서 담았다. 헌재 선고 당일은 거의 하루 종일 그렇게 짐만 쌌다. 

    “일만 하다가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이삿짐을 싸던 중 책이나 자료를 다시 훓어보면서 대통령은 독백처럼 지나간 세월을 떠올렸다.

    삼성동 사저의 보일러 공사

    대통령은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들을 오후 2시에 관저로 불렀다. 

    “여러분께 미안합니다. 청와대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통령은 오히려 참모들을 위로했다. 일부 참모는 눈물을 흘렸고, 분위기는 착잡했다. 

    대통령은 그날 서울 삼성동 사저로 나가지 못했다. 삼성동 사저는 보일러 수리가 끝나지 않아 얼음처럼 차가운 상태였다. 아직도 겨울이 끝나지 않은 차가운 날씨에 70을 바라보는 대통령이 기거할 상태가 아니었다. 참모들은 차마 탄핵 인용을 예상해 보일러 공사를 미리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보일러 공사가 늦어졌다. 

    그래도 혹시 탄핵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미리 공사를 시작했는데도 탄핵 선고 당일에는 맞출 수 없었다. 대통령 수행팀 몇 명이 탄핵 선고일 3일 전 대통령에게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혹시 몰라서 삼성동에 보일러 공사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대통령은 두말없이 보일러 공사를 시작하라고 했다. 보일러 공사를 한다는 보고를 통해 적어도 대통령이 탄핵될 수 있다는 최후의 마음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간에는 대통령이 탄핵 선고 당일까지 ‘탄핵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가까운 참모들도 잘 알지 못한다. 

    대통령은 당시엔 청와대 참모 외에도 수많은 개인 인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변호사들도 그 인맥 중 하나일 것이고, 정치인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여러 성향의 변호인들이 대통령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참모들의 만남이나 건의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참모들은 대통령이 탄핵당할 경우와 탄핵당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각각의 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변호인들조차 예상이 엇갈렸다. 

    대통령이 마지막에 태극기집회에 애정이 많이 간 것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통령은 참모들과 상의하지 않고 태극기집회 참석자들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물론 대통령은 탄핵이 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탄핵이 기각 혹은 각하될 것이라는 정보가 대통령에게 많이 전달됐던 것 또한 사실이다. 더구나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곧 탄핵될 테니 준비하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대체로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어느 편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대통령은 초인적 절제력을 갖고 있다. 위기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중심을 잡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대통령의 판단 및 감정을 두고 오해할 수 있다고 본다.

    권력을 잃은 전직 대통령

    2017년 3월 12일 청와대를 떠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에 도착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마중을 나온 친박 의원 등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2017년 3월 12일 청와대를 떠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에 도착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마중을 나온 친박 의원 등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그렇게 사저 공사를 진행했지만 탄핵 선고일인 3월 10일까지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삼성동 자택은 과거에도 비가 샐 정도로 낡은 상태였다. 그동안 집을 비워뒀으니 더더욱 형편없었다. 

    탄핵 선고 후 일부 언론은 대통령에게 ‘왜 빨리 청와대를 비우지 않느냐’고 몰아붙였다. 청와대 관저에 당장 누가 입주하는 것도 아닌데, 언론은 권력을 잃은 전직 대통령에게 일말의 동정도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 사회는 메마를 대로 메말랐다. 

    어차피 주말이 끼어 있는 데다, 보통 가정에서도 이사를 하려면 이삿짐 싸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이사 준비로 며칠 정도 머무는 것은 크게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헌재 탄핵일이 금요일이어서 주말 동안 준비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탄핵 선고 다음 날인 3월 11일 대통령을 만나 월요일(3월 13일)쯤 청와대를 떠나면 될 것 같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너무 서둘러서 떠나려 하실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물론 지키지 못한 말이었다. 대통령은 오히려 담담했다. 

    “정리되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대통령은 참모에게도 더는 짐을 주지 않으려 했고, 구차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초인적인 인내와 절제로 청와대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넘기고 있었다.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자 엉뚱하게 그날 저녁 청와대를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쫙 깔렸다. 방금까지 그런 얘기가 없었는데 이상하다고 느꼈다. 확인 결과 그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월요일까지 버티기 힘들 수 있다는 전망이 많았다. 

    실제 그날부터 왜 빨리 청와대를 나가지 않느냐는 여론의 압박이 거세졌다. 나에게도 당장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떠나게 하라는 정치권과 지인들의 전화가 이어졌다. 여론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청와대와 담장 밖의 온도차는 그렇게 컸다. 때마침 최경환 의원이 그때쯤 나에게 전화해 “언제쯤 나오시게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삼성동 사저로 가실 경우 의원들이 최소한의 도리를 위해 삼성동을 방문해야 하는데, 언제쯤이 될지 몰라 비상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월요일쯤 떠나실 것을 권유했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아 일요일 청와대를 떠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고 전한 기억이 있다. 

    실제 대통령은 월요일까지 버티지 못하고 일요일 저녁 청와대를 떠났다. 상황은 그만큼 좋지 않았다. 

    대통령이 탄핵됐으면 바로 떠나는 게 옳다고 본다. 하지만 참모 입장에서 보일러 수리도 되지 않은 냉방으로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국민의 51%가 지지해 뽑은 전직 대통령에 대해 우리 국민도 최소한의 관용은 필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최소한 떠나는 사람의 뒤통수를 치지 않는 게 그래도 우리의 전통이라고 믿어왔다. 

    사실 삼성동으로 떠날지에 대한 고민은 일찍부터 있었다. 헌재의 탄핵 선고일과 상관없이 2017년 새해가 밝으면서 대통령의 퇴임 후 거처 준비를 놓고 물밑 움직임이 전개됐다. 원래 고민은 정상적 퇴임을 전제로 시작됐다. 정상적으로 퇴임하더라도 퇴임 1년 전인 2017년 2월에는 거주지가 정해져야 한다. 경호동 공사 등 경호상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새해부터 수행팀과 경호실을 중심으로 사저 물색에 나섰다.

    “퇴임 후 삼성동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경호실은 삼성동 복귀를 염두에 두고 인테리어 공사를 일단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탄핵이 아닌 정상적 퇴임을 염두에 둔 인테리어 공사라고 하더라도, 외부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공사는 최대한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초 대통령이 결심을 세웠다. 

    “퇴임 후에 삼성동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삼성동 사저의 내부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삼성동 사저는 너무 낡았다. 비가 오면 빗물이 줄줄 새는 집이다. 그것만으로 이사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해서 들어가려고 했으나, 공사비가 너무 많이 들었다. 대통령이 대출을 받아서 공사해야 할 판이었다. 또 워낙 대규모 공사여서 공사가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탄핵된다면, 그때까지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대통령은 며칠 생각해보다가 삼성동에 가지 않을 테니 새로운 거처를 알아보라고 했다. 그게 2월 초다. 대통령이 삼성동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 속뜻에 대해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 오래 살았던 삼성동 사저에 대한 애착이 클 것 같았는데, 너무나 선뜻 다른 곳으로 이주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그렇게 삼성동과 결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행팀 일부가 부지런히 새로운 주택을 찾아다녔다. 빈집이어야 하고, 경호하기에도 좋아야 하기에 서울 시내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서울 근교에서는 경기도 하남과 양주 등이 후보지였으나, 최종적으로 2월 말쯤 내곡동 주택으로 결정됐다. 대통령은 내곡동 주택을 사진으로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 내곡동 주택은 수행팀이 부동산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구한 집이다. 

    내곡동 주택 구입에 최종 사인을 하기 전에 삼성동 사저를 파는 게 먼저였다.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이 구입했지만, 당초 동생 박지만 회장이 구입의사를 비쳤다. 대통령이 3월 12일 삼성동 사저로 들어간 뒤 박지만을 만났을 때다. 그렇지만 결국 사저는 동생에게 가지 않았고, 부동산을 통해 홍 회장에게 넘겨졌다. 내곡동 집으로 이사는 4월이 넘어서 이뤄졌다. 정작 주인인 대통령은 영어의 몸이 되어 새집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관저 실무자들의 마음고생

    앞서 1월의 상황은 더욱 암담했다. 참모들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헌재에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는 상황을 전제로 향후 대책을 수립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불경죄’였기 때문이다. 

    언론은 탄핵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신 실무자들은 ‘이러다가 진짜 대통령이 탄핵되면 어디로 가시나’ 하고 현실적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저 대통령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삼성동 사저는 수리가 돼 있지 않았고, 새집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2월 초 이사를 결정하기 전, 퇴임 후 주거지에 대한 첫 고민은 1월 중순쯤 구체화됐다. 이때 고민은 삼성동 사저가 수리돼 있지 않으니 임시로 거처할 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경북 구미와 충북 옥천이 임시 거처로 거론됐다. 실제 수행팀은 구미와 옥천에 답사를 다녀왔다. 대통령에게 말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구미는 아버지 고향이고, 옥천은 어머니의 고향이다. 대통령이 탄핵 이후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곳으로 구미와 옥천을 후보지로 떠올린 것이다. 이것은 당시 참모 몇 명이 대통령에게 말하지 않은 채 비공식적으로 알아본 일이다. 

    대통령에게 추후에 진행 과정을 말씀드렸더니,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구미와 옥천행은 없던 일이 됐다. 급한 마음에 수행팀들이 대통령 생각과 상관없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그다음 선택지는 삼성동밖에 없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경호실은 삼성동 사저에 대한 공사에 다시 속도를 냈다. 인테리어 업체와 계약하고 공사를 서둘렀다. 

    하지만 헌재가 선고일을 3월 초로 급하게 추진하면서 모든 게 꼬였다. 이사를 간다고 결정했지만, 당장 그러기 어려웠다. 탄핵이 결정되는 최악의 경우 삼성동에 일단 갔다가 다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잠시 기거하더라도 사저 공사를 또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행팀은 선고일 3일 전에 할 수 없이 대통령에게 다시 보고를 하고 탄핵에 대비해 삼성동 사저 공사를 서둘렀다. 하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청와대가 탄핵을 예상하고 공사를 서두른다고 언론에 이상하게 보도될 것을 우려해 공사를 미루었다. 기자들은 이미 삼성동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게 결국 탄핵 후 청와대 관저에서 바로 나오지 못하고, 이틀을 더 머물다 나오게 된 이유가 됐다.

    고독했던 관저 생활 24시

    최초의 독신 여성 대통령의 관저 생활은 별로 공개된 게 없다. 최순실 사건으로 수사 과정에서 관저 생활이 우연히 일부 공개됐을 뿐이다. 대통령의 관저 생활은 말 그대로 고독하다. 

    관저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통령은 오전 5시에서 5시30분 사이에 눈을 뜬다. 대통령은 기상 후 바로 식사를 하는 편이다. 그리고 라디오를 틀어놓고 아침 시간을 보냈다. 주로 라디오를 통해 프랑스어와 중국어, 영어 등 외국어 공부를 했다. 

    6시쯤 조간신문이 올라오면, 비서들이 침실 입구 유리문 앞에 놓아두었다. 침실 바로 옆 식당에서 식사를 끝내고 들어가면서 신문을 갖고 가신다. 신문을 다 보면 문밖에 내놓는다. 신문도 필요한 스크랩을 직접 하는 스타일이다. 주로 안보실에서 올라오는 서류 등 주요 서류가 있으면 그 시간대에 읽었다. 

    통상 8시쯤 미용을 하는데, 미용이 있는 날은 행사가 있는 경우다. 미용이 없으면 관저에서 계속 서류를 본다. 9시쯤부터 집무실 개념의 서재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몰입할 때는 서재에서 2~3시간 계속 머물러 있었다. 침실에 딸린 책상에서 서류를 보기도 했다. 주말에는 서예를 하고 책을 읽는다. 

    저녁식사는 6시에 하는데 식사 후에는 주로 혼자 지냈다. 잠은 늦게 청한다. 일러도 오후 11시 이후에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언젠가 관저 창문에 참새가 알을 6개 낳았다. 대통령은 신기해서 부화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찾아가보았다. 경호관들에게는 “새들이 놀라니 자주 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새는 2년 동안 창문에 둥지를 틀고 두어 번 부화했다. 

    대통령은 관저 주변 야생화를 좋아했다. 모든 야생화의 이름을 알았다. 관저에서는 강아지를 키웠는데, 경호실에서 별생각 없이 외제 애견용품을 구매하다가 한번은 대통령이 국산 애견용품이 없느냐고 말해 재구매한 적이 있다. 

    대통령은 강아지를 안고 관저 뜰을 왔다 갔다 하면서 거닐기도 했다. 마치 애기를 안 듯이 안았다. 관저 비서들은 대통령이 강아지를 가슴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애잔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강아지 7마리의 이름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애정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들어오는 선물이 있으면 직접 그릇에 담아 경호원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과자나 초콜릿 등은 항상 작은 접시에 직접 담아 경호원들에게 주었다. 경호원에게 몇 시에 나간다고 하면 그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 1, 2분이라도 늦을 거 같으면 뛰어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 대통령의 사례를 보면 경호원이 한두 시간씩 대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지만, 대통령은 경호원들에게 대기하지 말고 시간 맞춰 나오라고 말했다.

    사명감에 입은 한복

    2013년 11월 6일 로저 기퍼드 영국 런던시장(왼쪽) 주최 길드홀 만찬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은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2013년 11월 6일 로저 기퍼드 영국 런던시장(왼쪽) 주최 길드홀 만찬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은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이 뇌물죄로 구속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대통령은 오히려 돈에 대해 개념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다. 돈 관리도 밑에 있는 비서들에게 맡겼다. 대통령의 뇌물죄는 평소 절약 생활과 묘한 대비를 불러일으켰다. 

    조대환 민정수석은 그의 저서(남(進), 듬(處), 길(道))에서 대통령의 구두 3켤레 이야기를 꺼냈다. 재직 기간에 구두 3켤레로 지냈다는 다소 과장된 내용이지만, 실상에는 부합하는 이야기다. 대통령은 신발도 항상 중저가 국산 브랜드를 이용했다. 신발의 가격은 10만 원 안팎이다. 굽이 높은 신도 아니고 편안함을 위주로 신발을 선택했다. 대통령은 고가의 좋은 신발을 한번 신어본 적이 없다. 

    의상도 유명 디자이너나 고가 브랜드의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외국 순방 때 한복을 즐겨 입지만 한복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복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한번은 참모들에게 “나도 다른 예쁜 옷을 입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한복이 필요하다면 그걸 입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차이나칼라의 평상복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본인 스타일의 옷을 만든 것이다. 그것도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었다. 다른 고가의 옷을 사 입기 시작하면,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 사치스러운 삶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대통령의 이런 절약 정신은 원래 유명하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습관이다. 한번은 고속도로를 지나가다가 가로등에 불이 켜진 게 눈에 들어왔다. 대통령은 “왜 저기 대낮에 불이 들어와 있나요. 꺼야 되는 것 아닌가요. 한번 확인해보세요”라고 지시했다. 확인해보니 고속도로 관리 센서가 고장 난 것이었다. 곧바로 조치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메모지도 노란색 재활용 메모지만 사용한다. 당선인 신분 때 주문한 종이다. 양면을 사용하고 이면지를 활용하며 ‘동아연필’을 쓴다. 

    한번은 호떡이 드시고 싶다고 해서 사다드렸다. 모든 음식은 경호실 검식관이 미리 검사하고 맛도 본다. 그런데 호떡에 세균이 너무 많아 대통령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그렇게 먹고 싶어 했는데 결국 못 드신 것이다. 

    해외 순방 때도 대통령의 절약 정신은 발휘됐다. 대통령은 의전 관례상 주로 호텔의 스위트룸을 이용한다. 대통령이 가장 중시하는 건 전등불을 끄는 일이다. 넓은 객실의 모든 전등을 일일이 끈다. 어느 나라였던가. 인터폰으로 전화해 “스탠드 하나가 안 꺼진다. 좀 꺼달라”고 비서에게 말했다. 침실이 아닌 거실 등이어서 굳이 안 꺼도 되는 곳이다. 대통령은 비서들에게 “방에서 나갈 때 다 끄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해외 순방 때 전등 끄는 일이 주변 비서들의 숙제였다. 

    한번은 불을 끄고 나간다는 게 전체 소등을 하고 나왔다. 화장실 가려는데 불이 안 켜진다고 인터폰이 울렸다. 전등을 끄고 다니다 보니 어디선가 발을 찧기도 했다. 대통령은 순방을 가서도 오전 5시에 칼같이 일어난다.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를 그때 제공하는데, 주로 우유, 견과류, 과일 등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청와대 직원들의 트라우마

    탄핵 시기 청와대에는 비서실과 안보실을 합쳐 7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했다. 정무직이라고 할 수 있는 비서실장, 안보실장, 수석비서관 등 20명 안팎을 제외하면 나머지 비서관급 이하 직원들은 대부분 직업 공무원이거나 당에서 파견된 당료, 국회 보좌관 출신, 발탁된 민간인 등으로 채워졌다. 비서관급 이하 직원들은 통상 수석의 지시 아래 일반 회사의 위계질서와 마찬가지 조직의 일원으로서 맡은 바 업무를 수행했다. 이들 중에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등 문재인 정부에서 연속적으로 등용된 인물들도 일부 있다. 또 일부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변한 직업을 잡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다. 

    청와대 직원이라고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대통령을 열렬히 좋아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직업으로서 일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직원도 있다. 

    다만 하필 그 시기,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초로 대통령 탄핵이 결정된 그 시기에 청와대에서 근무한 직원들은 대부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들이 특별히 잘못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자신들의 삶을 자랑할 수도 없는 처지에 빠졌다. 어깨가 짓눌린 듯한 삶의 고통은 일반인이 뭐라 말하기 힘든 특별한 경험이다. 

    그들 대부분은 알지 못하는 최순실에 대해 어떤 변명을 해야 하고, 해명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또 아무것도 모른 채 정부의 운명을 지켜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덜 다치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실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데서 자괴감을 느끼는 직원들도 많았다. 

    적어도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하기 직전까지 모든 직원이 한마음으로 대통령 안위를 걱정하고, 사건이 원만하게 마무리될 수 있기를 바랐다고 본다. 

    국회에서 탄핵소추로 직무 정지가 된 이후부터 직원들은 가시덤불 속을 헤매는 느낌을 가졌다. 청와대의 상당수 직원은 헌재 탄핵 결정이 인용될 것이란 불길한 예측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향후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걱정하는 젊은 직원이 많았다. 취직의 문은 이미 닫혔다. 

    특히 탄핵 시기 및 문재인 정부 이후 박근혜 정부 관련 사건으로 기소된 인원이 120명을 넘어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실제로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조사받은 인원은 500명 선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많은 직원이 숨죽인 채 위축돼 한 시기를 살았다. 

    그럼에도 당시 청와대 근무를 한 직원 누구도 대통령을 원망했다는 기사를 본 적은 없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또 세월의 무게를 견뎌가며 묵묵히 살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조그만 공간이라도 허락된다면, 그들을 한번 위로하고 싶었다. 당신들은 대통령을 합리적으로 보좌하려고 노력했던, 그렇지만 다소 불운했던 이 시대의 고단한 청춘들이었다고. 바닥까지 경험한 우리들 삶의 궤적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 싹을 틔우는 데 남들보다는 묵직한 밀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얘기해주고 싶다.

    2016년 10월의 정세

    2016년 10월 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2016년 10월 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지금도 2016년의 탄핵 추진이 왜 그리 빠른 속도로 진행됐는지 물어보는 분이 많다. 기본적으로 국회의 판단이며, 국회는 광화문광장의 분위기를 두려워했다.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대통령 본인의 잘못은 밝혀지지 않은 채 오로지 최순실 잘못만으로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경우엔 함께 사는 가족인데도 적용되지 않은 ‘경제공동체’ 논리가 피붙이도 아닌 최순실에 대해서는 적용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그에 앞서 2016년 10월의 국민 정서는 박근혜 정부에 좋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임기 4년차를 마무리해가던 그 시점에 각종 개혁정책을 몰아치고 있었다. 마지막 젖 먹던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고, 일부 국민은 개혁에 저항하는 흐름을 형성했다. 개혁에 대한 피로감이 조성돼갔다. 

    우선 2015년 공공개혁으로 공무원연금개혁이 이뤄지면서 공무원들의 저항이 있었다. 세종시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노동개혁에 대한 반대 투쟁 역시 고조되고 있었다. 공공·금융노조가 2016년 9월 말부터 성과연봉제 저지를 위한 릴레이 파업에 돌입하면서 저항하고 있었다. 철도노조와 지하철노조 등도 파업을 예고하면서 분위기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박근혜 정부는 그럼에도 2016년 개혁 기조를 강화해갔다. 10월은 정부와 반대 세력 간의 대립이 첨예화하는 시점이었다. 민주노총은 10월 1일 노동자대회와 연계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대 등의 이슈와 결합해 범국민대회로 끌어갔고, 9월 25일 사망한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도 촉매제 역할을 했다. 세월호 관련 단체들은 9월 30일 특별조사위원회 종료 시한에 맞춰 반정부 투쟁을 확산했고,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은 역사교과서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고 있었다. 역사교과서는 11월에 시안이 발표될 예정이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강력한 정책이 2016년에 쏟아졌다. 사드 배치가 7월에 결정됐지만 사드 배치에 따른 지역 주민의 반발과 반대 시위로 9월 30일 사드 배치 제3부지 발표가 있었고, 그 여진이 10월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국회에서도 민주당은 사드 배치를 갖고 박근혜 정부를 계속 흔들고 있었다. 북한이 9월 9일 정권 수립 기념일에 맞춰 5차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추가 제재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었고, 이에 따른 북한의 추가 도발 우려가 계속되는 등 안보적으로도 불안정했다. 

    위안부 재단과 관련한 후속 조치도 이어졌다. 일본은 8월 31일 10억 엔의 치유금을 전달했고, 9월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개별적으로 분배했다. 일부 시민단체는 수령 거부 등을 통해 반대 투쟁을 벌여갔다. 


    2016년 11월 19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2016년 11월 19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2016년 10월은 각종 사회적 모순이 극대화되던 시점이었고, 시위가 일상화돼 있었다. 각종 시위에 최순실 사건을 갖다 대고 촛불만 붙여대면 촛불시위로 둔갑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결국 탄핵에 불리한 정세를 조성했다. 

    언론들도 불편함을 호소했다. 대표적인 게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청탁금지법이다. 2016년 9월 28일 시행과 함께 언론계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기자들이 김영란법 대상이 된 것은 언론사를 근본적으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다 기업들이 운영하던 기자 해외 연수 프로그램도 흔들리고 있었다. 논란을 우려한 기업들이 프로그램 폐지 움직임을 보였다. 

    언론 광고 영업에도 타격이 예고됐다. 협찬 방식으로 금품을 수수하는 행위가 김영란법 위반일 수 있었다. 언론은 잇달아 정부에 민원을 제기해 청탁금지법의 완화를 주문하고 있었다. 한국신문협회는 2016년 10월 25일 ‘청탁금지법 관련 한국신문협회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정부에 전달했다. 신문협회는 “신문사의 영업 활동까지 규제하는 것은 법을 과도하게 확대 유추 해석한 결과”라며 신문사의 후원 협찬 제한 및 공공기관, 기업과의 공동기획기사 제한, 언론인 연수 금지 등에 대한 규제를 폐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언론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의혹기사를 양산하고 있던 시점인 것을 감안하면, 박근혜 정부는 언론과 이중의 전선에 맞닥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청탁금지법은 국회에서 민주당 주도로 발의됐지만, 박근혜 정부도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게 언론을 이중삼중으로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강남 좌파=위선과 부패’라는 반전

    김도읍 자유한국당 의원이 9월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뉴시스]

    김도읍 자유한국당 의원이 9월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뉴시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글을 연재하는 5개월 동안 정국이 크게 변했다. 처음 시작한 지난 5월만 해도 정국은 여전히 문재인 정부 마음대로 하던 시기였다. 적폐청산이 끝나지도 않았고 세월호 관련이나 경찰청 정보국의 정치 개입 의혹 등이 새롭게 수사되거나 재판에 넘겨지는 등 공안 정국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연재를 왜 이리 빨리 하느냐고 나에게 충고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문재인 정부가 시퍼렇게 칼날을 세우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 이야기를 하면 나도 다치고 주변 사람들도 다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그런데 5개월이 지난 지금은 분위기의 급반전이 일어났다. ‘조국 사태’를 통해 문재인 정부는 도덕성과 정당성에 커다란 구멍을 드러냈다. 촛불로 세워졌다는 문재인 정부의 도덕성이 확인된 것이다. 조국 사태를 둘러싼 온갖 패러디는 문재인 정부의 이미지뿐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평판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가령 딸의 입시 문제가 터지니 ‘정유라보다 심하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등 조국 사태와 최순실 사태가 비교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단군 이래 최대 비리’라는 최순실 사태보다, 오히려 ‘단군 이래 최대 위선행각’이라는 조국 사태가 가져다주는 충격이 훨씬 크게 회자됐다. ‘보수 기득권=부패’라는 진부한 도식보다는 ‘강남 좌파=위선과 부패’라는 반전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이어질수록 탄핵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국 사태를 대하는 문재인 정부의 일방적인 진영 논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도 적용됐을 것이며, 많은 사람이 그 같은 일방적 여론몰이에 영향을 입었을 것이란 합리적 의심은 충분히 가능하다. 적어도 탄핵이 일방적인 공격에 의해 너무 성급하게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생겨난 것은 맞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봐달라는 호소

    8월 28일 서울대에서 열린 ‘조국 반대’ 촛불집회. [조영철 기자]

    8월 28일 서울대에서 열린 ‘조국 반대’ 촛불집회. [조영철 기자]

    네 번째 신동아 연재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사고 당일과 관련한 미공개 발언이 알려졌을 때부터 이 같은 조짐은 있었다. 8월 중순 공개된 “이게 나라냐”고 말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록은 수만 명의 댓글과 반응으로 이어졌다. 박근혜 시대의 역사가 여전히 지금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였다. 또 대중이 역사적 진실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제는 나에게 이 연재를 왜 이리 빨리 했느냐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왜 이리 늦게 당시의 진실을 밝혔느냐는 원망 아닌 원망을 많이 듣고 있다. 

    조국 사태는 이 같은 분위기에 기름을 붓고 있다. 대중은 이제 문재인 정부라고 해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에도 공과(功過)가 있듯이 문재인 정부에도 공과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불행히 이제 공보다 과가 두드러져 보이는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정부의 이미지가 바로 상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봐달라는 나의 호소는 충분한 값어치를 갖게 됐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볼 정도의 평정심을 회복해가는 중이라고 본다. 

    이 글의 독자는 다양한 반응을 나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참모들과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박 대통령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이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구중궁궐에서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폐쇄적 지도자가 아니라 고뇌하고 고민하며 결단하는 정상적인 지도자임을 밝히고 싶었다. 더구나 탄핵을 당할 정도로 무능하거나 부패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부 표현은 독자의 기대에 맞지 않았을 수 있다고 본다. 나는 박근혜 정부의 참여자로서 최대한 반성하는 마음을 담아서 글을 써왔다. 국민의 마음을 골고루 살피는 데 부족했고, 국민을 실망시킨 점에 대해서는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무죄를 외치며 3년간 거리에서 투쟁한 분들의 기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었던 측면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아울러 이 글이 진실과 교훈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쓰였음을 다시 한번 밝히고 싶다.

    과거를 통해 교훈을 끌어내지 못하면 역사 공부는 완전히 잘못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적어도 과거에서 그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교훈은커녕 역사 자체를 비웃는 오만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5월 첫 연재를 시작할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궁금해하면서 긴 글을 읽어준 독자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천영식
    ● 1965년 경북 청송 출생
    ● 대구 영신고, 서울대 서양사학과
    ●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前 문화일보 정치부 부장 대우, 워싱턴특파원
    ● 前 홍보기획비서관(박근혜 정부)
    ● 現 KBS이사, 계명대 초빙교수
    ● 저서 ‘고독의 리더십’(2013)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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