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난임전문의 조정현의 ‘생식이야기’

먹는 피임약의 다양한 얼굴

무월경·폐경기 등 치료제로 각광

  • 난임전문의 조정현

    입력2019-10-1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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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경구(經口) 피임약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거나 친구 사이에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대학생인 딸(A씨)의 자취방에 친구들이 놀러왔다가 화장실에 피임약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학생이 왜 피임약을 먹는 걸까? 친구들은 궁금했을 것이다. 

    이해한다. 흔히 사람들은 경구 피임약에 대해 임신을 피하기 위해 먹는 약이라고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임신을 원하지 않는 여성이 생리 초부터 매일 한 알씩 복용하는 경구용 호르몬제다. 하지만 피임약은 피임만을 위한 약이 아니다. 피임약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피임 외에 다양한 약효가 있다. A씨의 경우 초경 때부터 매달 생리 때만 되면 배가 너무 아파서 조퇴를 하거나 심할 땐 학교도 가지 못했다. 골반 내 자궁, 난소, 난관에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생리통이 너무 심해 고등학생 때부터 매달 피임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피임약 덕분에 생리통증에서 해방됐고 월경량도 줄어들었다. 

    피임약을 이해하려면 먼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배란과 생리 간의 ‘생식 사이클’ 기전부터 짚어봐야 한다. 여성에게 생리(월경) 시작은 임신을 위한 체제정비 시점이다.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매달 임신 준비를 위해 여성의 몸은 자체 ‘리셋’을 한다. 이 모든 생식 사이클을 주관하는 사령부는 다름 아닌 뇌하수체 시상하부. 이곳에서 생리 시작과 동시에 난자를 키우기 위해 FSH(난포자극호르몬)를 내려보내고, 난소는 FSH를 수용해서 난자를 키운다. 난자가 어느 정도 자라면 시상하부에서 LH(황체화호르몬)를 분비시킴으로써 드디어 배란이 된다. 

    자궁 또한 임신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는다. 자궁은 수정란(이하 배아)을 착상시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데, 첫 번째가 내막(기능층) 부풀리기다. 배아가 자궁내벽에 착상할 때 파고들기 적당하도록 자궁내벽이 폭신하면서 두툼해야(8~9mm가 최적)하기 때문이다. 자궁내막(기능층)은 매달 난자가 자라면서 분비하는 에스트로겐(E2)을 수용해서 두꺼워지고, 배란이 되면 분비하는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을 받아들여서 비로소 완벽한 착상 준비 환경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임신에 실패하면 미련 없이 출혈(생리)로 다시 체제 정비에 들어간다. 즉 배아가 내려오지 않거나(수정 실패), 배아가 내려와도 착상에 실패하는 비(非)임신 상태가 되면 두꺼워진 자궁내막은 피(血)와 함께 몸 밖으로 배출된다.

    피임약 주작용은 ‘배란’ 방해

    결론적으로 임신을 위해 자궁은 생리 시작에서 배란이 될 때까지의 난포기(Follicular phase)에는 에스트로겐(E2) 호르몬이 지배하고, 배란 이후 생리까지 황체기(Luteal phase)에는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이 지배한다. 피임약을 복용하면 배란과 생리로 이어지는 생식 사이클 순서대로 호르몬(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이 공급돼 자궁은 배란 없이도 배란 환경을 조성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피임약은 반드시 매일 한 알씩 표시된 순서에 따라 복용해야 한다. 



    먹는 피임약을 복용하면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몸으로 들어와 난소는 일시적 휴가 체제가 된다. 먹는 피임약의 주작용은 배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또 자궁경부 점액을 마르게 해서 정자가 자궁 내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고, 나팔관의 운동성을 떨어뜨려 정자와 난자의 만남(수정)을 방해하거나, 수정이 됐다고 해도 배아의 이동(자궁 내로 내려가는)을 방해한다. 한마디로 임신 전 과정에 방해 공작을 펼치는 것이다. 또 자궁 내 환경조차 착상이 잘 안 되는 불량한 환경으로 만들어버린다. 반면 자궁은 약제에 담긴 에스트로겐(E2)에 의해 내막을 제한적으로 자라게 해, 불량한 착상 환경을 만들고 월경(생리혈)량을 적게 만든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다양한 이유로 환자에게 피임약을 처방한다. 한마디로 호르몬 치료제의 일환으로 피임약을 사용하는 것이다. 첫째, 다낭성난소증후군 등으로 불규칙한 생리주기 혹은 희발월경(생리주기 35∼40일 이상), 무월경인 경우다. 경구 피임약을 복용함으로써 정상적인 생식 사이클을 회복할 수 있고 매달 생리를 하게 된다. 언젠가 생리를 하지 않아 걱정이라며 딸을 데리고 병원에 온 아빠가 있었다. 중국에 유학을 보냈더니 이제는 아예 생리를 하지 않는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딸이 중국에서 끼니도 거르고 스트레스로 인해 체중까지 줄어들었다고 했다. 골반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자궁도 작아졌고 난소는 보이지도 않았다. 먼저 끼니를 거르지 않고 체중을 1~2kg 늘리라고 하면서 피임약을 처방했다. 1년이 지난 뒤 다시 병원에 왔을 때는, 딸아이는 얼굴이 밝아졌고 체중도 2kg 정도 늘었으며 생리도 꼬박꼬박 하게 됐다고 했다. 

    무월경인 여성 중에는 터너증후군인 경우가 있다. 터너증후군이란 성염색체 이상으로 생기는 장애인데, X염색체가 하나밖에 없어 난소가 생기지 않는다. 이들은 난소가 없어서 노화가 빨라질 수 있으므로 초경 때부터 피임약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 자궁은 있기 때문에 꾸준히 호르몬을 복용하면 자궁이 어른 크기가 되며 다른 사람에게서 난자를 제공받으면 임신도 할 수 있다. 

    둘째, 난소의 종양이나 초기암으로 난소를 모두 제거했을 때다. 난소가 없으면 난자도 없고 배란도 없다. 즉 에스트로겐 제로 상태가 된다. 이런 여성이라면 터너증후군 여성처럼 피임약을 계속 복용하는 것이 좋다.

    사후 피임약 장기 복용하면 난임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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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생리혈이 너무 많을 때도 피임약이 도움이 된다. 내막이 두꺼울수록 월경량이 많아지는데 피임약을 쓰면 내막이 상대적으로 얇아져서 월경량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넷째는 조기 폐경 여성 혹은 폐경기 여성이다. 폐경은 난소의 기능이 저하되고 난자가 고갈된 상태를 말한다. 난자가 없으니 에스트로겐(E2)이 분비될 리 만무하다. 하지만 피임약으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생식 사이클에 맞게 공급받는다면 노화와 갱년기를 좀 더 늦출 수 있다. 폐경이 된 여성에게 호르몬 투여를 시작하게 된 것도, 몇몇 의사에 의해 60세 전후 여성 중 또래에 비해 젊음을 유지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피임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물론 이 경우에는 일반적인 피임약보다 낮은 용량을 처방하는데, 이 역시 광범위한 의미에서 피임약 요법이라 볼 수 있다. 

    피임약을 둘러싼 연구 결과는 다양하다. 경구 피임약을 5년 복용할 때마다 자궁내막암 위험이 약 25%씩 줄어든다(영국 옥스퍼드 의대/2015)는 보고가 있는가 하면, 피임약을 통해 공급받는 에스트로겐(E2)이 신체 면역계를 증강시켜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대응력을 키우고 헤르페스 성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캐나다 맥마스터 대학 연구팀/2016)도 있다. 반면, 피임약이 우울증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의대/2016)와 폐경기 여성들의 호르몬 대체 요법(이하 HRT)이 유방암 발병률을 높인다(영국 옥스퍼드 의대/2019)는 연구 결과도 나온 바 있다. 

    여성 중에는 실질적인 피임을 위해 피임약을 장기 복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피임약을 장기간 복용할 경우 자칫 난임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피임약 복용자가 약을 끊고 난 이후 1년간 가임률은 79.4%, 2년 후 가임률은 88.3%로 대체로 높다. 

    정작 난임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은 사후 피임약이다. 성관계 후 24시간 내에 복용하면 피임률이 95%에 달한다는 사후 피임약에는 고용량의 프로게스테론이 함유돼 있어서 호르몬 불균형을 초래한다. 배란 전에 복용하면 에스트로겐 환경을 교란시키고, 배란 후에 복용하면 고용량의 프로게스테론으로 자궁 내벽이 탈락(생리)되면서 자주 복용하면 자궁내막이 딱딱해져서 착상이 힘든 환경이 될 수 있다. 

    경구 피임약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에 속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위대한 약제 121가지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다. 1956년 미국에서 개발돼 한국에 도입된 시기는 1968년이었다. 돌이켜보면 ”무턱대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며 보건소에서 피임약을 나눠주던 시절도 있었다. 피임약은 임신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성생활을 변화시키면서 여성 삶의 질을 한 단계 높여준 아주 요긴한 치료제임이 분명하다.


    조정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 前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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