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호

이인호

“큰 일은 원칙대로, 작은 일은 타협하라” 삶의 버팀목 된 호숫가 대화

  • 최영미 시인·소설가 ymchoi30@hotmail.com

    입력2005-10-13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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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호

    1997년 유럽기행 산문집 ‘시대의 우울’ 발간에 맞춰, 나(왼쪽)는 추천사를 써주신 이인호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핀란드로 향했다. 주 핀란드 한국대사관 사택에서 이인호 선생님과 함께.

    이인호 선생님을 멀리서 흠모하던 여러 제자 중의 하나에 불과한 내가, 선생님과의 인연을 감히 글로 써서 공식적인 지면에 발표하는 영광을 누리다니. 25년 세월의 감회가 새삼스럽다. ‘신동아’에 기고할 글을 위해 지금 이 책상에 앉기 전까지 ‘내 인생의 허와 실’을 반추하며 잔뜩 수그러들고 있었는데, 나의 삶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주 엉터리는 아니었나 보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0년 관악캠퍼스는 남자들 세상이었다. 전체 여학생의 비율이 남학생의 10%에 불과했고(내가 속한 인문계열 1학년을 통틀어 여학생이 20명도 안 되었다), 여자 교수님은 더욱 드물었다. 내가 수강 신청했던 교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이었고, 그래서 나는 1980년 어느 가을날까지 여교수를 가까이 본 적이 없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울려퍼지는지, 여성과 교수의 조합이 대체 어떤 이미지로 내 앞에 전개될지 알지 못했다.

    당당한 모습을 열망하다

    그날을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5·18민주화운동으로 닫혔던 교문이 다시 열린 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2학기 축제기간에 개교기념 학술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심포지엄을 청강하며 이인호 교수님을 처음 뵈었다. 말이 ‘축제’이지 교내에 전경이 상주하는 삼엄한 분위기에서 어떤 놀이도 토론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신입생들도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대학측에서 초대한 대중가수의 콘서트 같은 ‘반동적인’ 프로그램들을 거부하고 학술발표회 같은 심각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불온한 시대에 대한 우리의 거부감을 표현하며 동시에 젊음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어느 정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서울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여학생들 사이에 ‘미국의 유명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똑똑한 여자교수님’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1학년 여학생의 대다수가 이인호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러 심포지엄이 열린다는 학생회관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당시 나와 가까웠던 누군가의 충동으로, ‘러시아’라는 주제와 여교수님에 대한 호기심에 끌려 나도 2층인가 3층의 어느 회의실에 들어가 벌써부터 운집한 청중을 제치고 한구석에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자리가 없어 서 있거나 맨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아직 운동권에 포섭되지 않았던 열아홉 살의 순진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2단계 혁명론’이니 ‘멘셰비키’ ‘볼셰비키’니 하는 어마어마한 단어들을 애써 머릿속에 주워 담던 나의 모습이, 우중충한 창밖의 풍경과 더불어 지금도 선연하게 어제의 일처럼 떠오른다.

    매혹의 중성적 목소리

    그날 내 옆에 누가 있었는지, 동행했던 벗들의 얼굴을 나는 잊었다. 심포지엄이라는 딱딱한 형식으로 소개된 러시아 지성사의 붉은 페이지들도 속절없는 세월에 바래졌으나, 선생님의 독특한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내가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내 어머니의 ‘밥 먹어라’ ‘이제 들어오니’ ‘빨리 자라’ 같은 일상적인 언어들과 집안에서만 울리는 순종적인 목소리에 익숙하던 내게는, 마이크를 타고 드넓은 강당을 휘어잡는 정열적이면서도 감정이 절제된 선생님의 음성이 무척 낯설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여성성이 도드라지지 않는 중성적인 소리에 실려 도도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래의 사상과 개념들을 나는 미처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저런 어려운 말들을 하나도 더듬지 않고 역사니 혁명이니 하는 심각한 단어들이 여성의 몸에서 나올 수 있을까, 신기했다. 선생님의 강연은 내게 하나의 충격이었으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세례와도 같았다.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목소리에 반해 ‘나도 저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 나만의 당당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내가 대학에 입학해 나의 앞날에 대해 품었던 최초의 구체적인 꿈이며 욕망이 아니었는지. 선생님이 나처럼 여자였기에, 스무 살 무렵의 내게 그토록 강렬한 영감을 주었으리라.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우리는 모두 선생님에게 반했고, 그래서 여학생끼리 모이면 자연스레 이인호 교수님이 화제에 올랐다.

    이인호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사를 지낸 이인호 선생님(왼쪽)은 최근 명지대 석좌 교수로 재직 중이시다. 나는 인생의 여러 고민부터 신간의 제목까지 선생님께 의견을 구할 만큼 그분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내 뇌세포에 저장되었던 분명한 목소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인도했다. 계열별로 입학해 교양과정 1년을 수강한 뒤에 전공학과를 정했는데, 제1지망으로 독문학을 쓸까 서양사를 쓸까, 문학인가 역사인가를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다 ‘러시아’와 ‘지성’을 말했던 선생님의 얼굴이 아른거려 나는 서양사학과로 진학했다.

    추억의 교정에 스물하고도 다섯 번째의 가을이 피었다 지고, 혁명도 자유도 진부해진 중년의 거실에 웅크려 나는 곰곰이 곱씹어본다. 혁명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전율했던 가을날 오후, 이미 내 생의 방향이 정해진 게 아니었을까. 내가 그날 심포지엄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다르게 흘러갔을까. 나의 우상이던 선생님을 따라 서양사를 전공으로 택하지 않았다면, 역사와 철학의 본거지였던 5동이 아니라 어문계열이 몰려 있는 2동에서 왔다갔다했다면….

    서양사학과에 진학했지만 정작 역사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교실 뒤편에 앉아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지만, 앞서 언급한 심포지엄에서의 첫 만남에서처럼 선생님의 말씀이 크게 울리지 않았다. 이미 선배들이 주입시킨 의식화교육의 영향으로 잔뜩 바람이 들어가 오만하고 복잡해진 머리에는 역사 수업과 무관한 오만 가지 상념이 똬리를 틀었다.

    학내시위가 며칠 간격으로 터져 어수선하던 어느 날 영어로 진행되었던 서양현대사 수업은 특별했다. 이인호 선생님이 초빙해 한국의 강의실에 나타난 저명한 외국학자에게 수줍은 여학생은 손을 들어 질문할 용기는 없었지만, 학문적 열기가 무엇인지 몸소 체험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1980년대에 한국에서 국립대학의 교수라는 직책은, 급진적 사회변혁을 꿈꾸는 학생운동의 진원지였던 서울대의 교수 자리는 결코 편한 방석이 아니었다. 교수도 학생도 학문에 정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든 학생들을 지식의 세계로 인도하려 최선을 다했으며, 학과생들이 관련된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이 터질 때마다 멀찌감치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지 않고 제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인호 선생님은 서양사학과 80학번의 유일한 여학생이던 나뿐 아니라 모든 학년의 여학생들을 전담하는 지도교수였다. 언제이던가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지도교수와 학생간의 의례적인 면담을 마치며 슬쩍 선생님의 발을 쳐다본 적이 있다. 굽이 없는 편한 구두에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이 무척 시원하며 멋있어 보였고, 그래서 다음부터 나도 선생님을 흉내내어 여름에는 ‘랜드로바’ 밑에 스타킹을 신지 않았다.

    패션을 따라 했을 뿐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나는 내가 흠모하던 선생님과 어떤 특별한 인연을 만들지 못했다. 학내 시위에 휩쓸려 무기정학을 받은 뒤부터 나는 전공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고, 학교에서 쫓겨나 선생님들을 접촉할 기회도 차단되었다.

    제자들을 위해 차려낸 저녁상

    복학한 뒤 겨울이었나. 2학기가 끝날 즈음 이인호 선생님께서 당신이 가르치는 전공과목을 수강했던 학생들 전부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일대 ‘사건’이 있었다. 당시의 특수한 학내 사정상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서먹서먹하면 다행이었는데, 교수님이 학생들을 자택에 초대하다니. 난생 처음 스승의 집안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직접 준비한 요리를 맛보는 특권을 누리는 동안 나는 감격했더랬다(그때의 감격은 그 시절을 회고하는 2005년 현재 내가 체감하는 것처럼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청량리 외곽의 아담한 주택을 떼거지로 방문한 어린 손님들을 위해 1층 거실에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은 촌스러운 우리들의 배에 들어가기에는 과분한 훌륭한 요리였다. 맛은 물론 모양과 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반찬을 담은 그릇들에 이르기까지 어디하나 빠지지 않는 거의 예술에 가까운 환상적인 밥상이었다. 지금도 나는 선생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당신의 결코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멋스러운, 매우 창조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식탁과 부엌살림에 늘 감탄하곤 한다.

    제자들을 위해 친히 따뜻한 음식을 장만한 스승의 정성에 감사하기에 앞서, 철없던 일행 중의 누군가가 경직된 말투로 서구적인 상차림에 대해 무어라 시비를 걸었던 것 같은데, 접시를 나르는 선생님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러시아 민속치마의 화사함에 시선을 빼앗겼던 나는 밥상머리에 잠시 감돌았던 긴장도, 선생님의 의연한 대처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선생님 집을 나와 갑자기 추워진 골목길에서 담배를 하나씩 나눠 피우고 우리는 뿔뿔이 헤어졌다. 나의 학창시절에 드문 낭만적인 장면이었다고 내가 그날 밤을 그리워하는 건, 아마도 내가 남학생들과 자연스레 어울려 학생인 우리의 본분에 맞게 우리가 있어 마땅한 자리에서 젊은 열기를 방출했기 때문이리라.

    가장 암울했던 시기, 나의 버팀목

    이인호

    1985년 8월 하기 졸업식 날 서울대 5동 건물 앞에서 과동기 및 선배들과 함께.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1985년 여름 이후 한동안 나는 이인호 선생님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선생님은 물론 대학과 관계된 거의 모든 사람들, 학교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는 동창생들하고도 연락을 끊고 살았다.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지만, 내가 분명히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나를 버티는 하나의 지주였다. 선생님의 선례가 있었기에 이혼이라는 사생활의 곡절을 내가 그런 대로 의연히 감당했던 게 아닐까.

    단절되었던 사제간의 인연은 오랜 세월의 벽을 넘어, 학교 밖에서 다시 이어졌다. 먼 길을 돌아 결국 나는 전공인 역사가 아니라 문학을 본업으로 삼는 작가가 되었다. 유럽기행 산문집 ‘시대의 우울’의 출간을 앞두고 어느 분에게 추천의 글을 부탁할까 고민하던 나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대사로 임명되어 핀란드 대사로 부임한 옛 스승을 떠올렸다.

    학교를 떠난 뒤 10년 넘게 아무 연락도 없다가 느닷없이 원고더미를 보내며 추천사를 부탁하는 염치없는 제자를 선생님은 내치지 않으셨다. 공무로 바쁘신 와중에도 선생님은 까마득한 제자의 서투른 유럽기행문을 꼼꼼히 읽고 반짝거리는 시처럼 아름다운 글을 보내주셨다.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에 깊이 감동한 나는 혼자서 끌어안고 보고 또 보다 못해, 야심한 시각에 친구들에게 전화해 쉼표와 마침표까지 일일이 불러주며 자랑했더랬다. 출판사를 통해 받은 당신의 영혼이 실린 팩스종이는 선생님과 내가 훗날 교환한 다른 엽서들과 함께 지금도 내 서랍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신간 촌평과 더불어 선생님은 장문의 편지를 함께 보냈는데, 그 편지로 말미암아 당시 감옥에 수감 중이던 서양사학과 후배 황인욱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선생님의 간곡한 뜻에 따라 나는 나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비롯한 몇 권의 서적을 교도소에 보내고 인욱을 위해 계간 ‘창작과 비평’의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시대의 우울’ 들고 핀란드로

    이인호 선생님과 나, 그리고 황인욱. 이 세 사람의 만남은 인욱의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운동으로 이어졌고, 동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특별사면이라는 보람찬 결실을 보았다. 선생님이 내게 딱히 어떤 거창한 가르침을 전수해서가 아니라, 남을 도와줄 때는 확실히 도와주는 당신을 보며 나 또한 베풀며 사는 삶의 미덕을 스스로 터득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초판 발행일로부터 열흘도 되지 않아, 하루라도 빨리 선생님을 뵙고 감사를 표하고 싶어 나는 ‘시대의 우울’을 들고 핀란드로 날아갔다. 1997년 6월6일 오후, 헬싱키의 한국대사관저에서 나는 나의 큰바위얼굴이던 선생님과 12년 만에 재회했다. 백야의 호숫가에서 보낸 동화 같은 며칠을 나는 이미 글로 기록했지만, 야외의 테라스에서 선생님과 단둘이 맥주를 기울이며 나눈 대화의 일부를 여기 다시 인용하련다.

    “언제 싸우고 언제 타협해야 하나요?”

    “큰 일에는 원칙을 지키고, 작은 일에는 타협해야지.”

    “큰 일과 작은 일은 어떻게 분간하나요?”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저절로 알게 되지.”

    선생님의 말씀대로 해가 거듭될수록 나는 큰 일과 작은 일을 분별하게 되었고, ‘큰 일에는 원칙을 지키고 작은 일에는 타협한다’는 이후 내 삶의 모토가 되었다. 핀란드 대사에 이어서 러시아 대사로서의 임기를 성공리에 마치고 외교 일선에서 은퇴한 뒤에도 선생님은 일을 놓지 않았다.

    국제교류협력단을 이끌며 세계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일에 전념하시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저녁에 함께 귀가했던 어느 날의 식탁이 생각난다. 부엌의 탁자 위에 불어와 독어를 비롯해 서양의 언어로 된 각종 어학교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외국인을 위한 제대로 된 한국어교재를 만드느라 연구 중인데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없냐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 연배에 다시 외국어를 배우려는 당신의 대단한 정열에 자극을 받아, 나태했던 나를 바로 세웠다.

    매사에 정확한 선생님은 무슨 일이든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기회가 닿으면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 내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남자들에 대해, 하다못해 곧 나올 신간의 제목에 대해서도 당신의 의견을 구했다. 선생님과 나의 견해가 늘 일치한 건 아니고, 당신의 충고를 내가 따르지 않은 적도 있지만, 나중에 돌아보건대 당신의 판단이 옳았다.

    선생님과 30분이라도 대면했던 사람이라면 내 말에 동의하리라. 이인호 선생님은 대한민국에서 흔치 않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직한 지식인이다. 오늘날까지 나는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은폐하는 당신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지식인이라면 적어도 책임질 수 없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평소의 믿음을 저버리는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상상할 수도 없다. ‘위선’처럼 선생님과 거리가 먼 단어도 없다. 당신이 투명한 만큼 선생님은 타인의 허위에 민감하다. 세상 사람 백만명을 속일지언정 선생님의 예리한 눈을 속일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이불 맞대고 나눈 대화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삶의 핵심을 꿰뚫는 탁월함, 사회와 역사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의식주의 생활 문화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선생님의 높은 안목을 가까이서 보고 배웠던 행운에 나는 감사드린다. 나와는 다른 세계, 다른 성(城)이었지만, 단단한 계급의 벽을 허물고 선생님은 내게 당신을 보여주셨다. 스승과 이불을 맞대고 누워 도란도란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영광을 누렸던 제자의 한 사람이었음을 나는 오래도록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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