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연극에 대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서울예전에 들어가 연극과 무용을 공부한 나는 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과에서 이해랑 선생님을 만났다. “연기는 영혼의 폭발이지만 절제의 미가 있어야 한다” “연기뿐 아니라 연출과 희곡에도 매진하라”는 선생님의 조언은 내 연극 인생의 길라잡이가 됐다.
예술원 회장을 지낸 이해랑 선생. 후배 연극인들은 그의 이름을 딴 ‘이해랑 연극상’을 제정해 연극계에 끼친 그의 공을 기리고 있다.
1974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온 나는 곧바로 남산에 있는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4년제 정규대학을 졸업하고 전문대학에 다시 입학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연극을 깨치려는 집념에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었다. 사실 어머니께서 앓던 병이 도져 세상을 떠나신 데에는 이런 연유도 있었다.
전문대학에 들어가 연극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나는 명동의 한 술집에서 고려대 연극동아리인 고대극예술연구회 선배들에게 심한 욕설과 비난의 술 세례를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잠재울 수 없었다. 수색 근처 단칸 셋방에서 홀로 되신 아버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연극 인생을 걷겠다고 거듭 맹세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연극이라는 화두는 나로 하여금 급기야 무용과에 입학해 무용까지 공부하게 만들었다. ‘한국 연극을 하면서 어찌 한국의 몸짓을 외면할 수가 있으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해서 만난 또 한 분의 평생 스승이 도살풀이춤 인간문화재 김숙자 선생이다.
셰익스피어처럼 되어라
우여곡절 끝에 서울예전 연극과와 무용과를 졸업한 나는 당시 서울예전 학장이시던 유덕형 선생님의 배려로 연극과 조교 생활을 하면서 강의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나는 이미 또 하나의 학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대학원 입학이었다.
당시 동국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는 우리 연극계와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분들이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해랑, 이진순, 유현목 감독, 그리고 장한기 교수님 등이었다. 특히 이해랑 선생님은 내게 연극의 새로운 길을 일깨워주신 분으로 내 맘속에 남은 영원한 스승이시다.
1916년 서울에서 나신 선생님은 1938년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하고 극연좌, 현대극장, 신협, 국립극장 등을 두루 거치면서 배우와 연출가로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들어내셨다. 오늘날 선생님의 뜻을 기린 ‘이해랑 연극상’이 제정돼 후학들에게 그 정신을 전해주고 있지만, 이해랑 선생님의 연극에 대한 가르침은 남달랐다.
1977년 가을이었다. 장충공원에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이 수북이 쌓인 어느 날, 우연히 선생님과 마주쳤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언제나 장충공원을 한 바퀴 돌고 학교로 올라가던 나의 습벽을 들켜버린 그날, 선생님은 다른 수업을 마치고 국립극장으로 올라가시던 중이었다.
“학교 올라가니? 요즘 연습은 잘돼?”
그다지 짙지 않은 색의 선글라스를 낀 선생님의 모습은 늘 그랬지만 멋있는 황혼의 가을빛이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내 대답이 시큰둥했던지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공원벤치에 앉았다.
“연극 하기 힘들지? 하지만 더 어려운건 작품 분석이야. 그 속은 망망대해거든. 마치 양파 껍질을 끝없이 벗겨내는 일 같지.”
공원의 가을을 쓸쓸히 관조하시던 선생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재주가 많으니까 연기만 하지 말고 연출도 겸했으면 해.”
선생님의 그 말씀은 당시 연극 삼매경에 빠져 있던 내겐 하나의 감로주였다. 선생님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본격적인 연극 강론을 이어가셨다.
“진정한 연기자는 연출자의 경지에 올라 있어야 해. 그래야 서로 대화가 되지. 셰익스피어를 봐. 작가지만 연출자, 그리고 연기자의 경지에서 작품을 썼거든. 바꿔 말해 연극은 인생을 꿰뚫어보는 인생 천리안의 직접 내지는 간접 체험 예술이야.”
마치 인도의 사두학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일문일답을 주고받는 듯한 진풍경이었다. 난 선생님께 물었다.
“연극이 다른 예술보다 더 어려운 건 무엇 때문인가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지. 연극엔 문학이 있고, 시각적인 무대장치는 물론 의상, 조명, 분장과 같은 회화적인 요소에다 음악, 배우의 대사, 음향 같은 청각적인 요소도 있어. 또 살아 있는 율동과 액션의 무용적인 면이 포함되어 있거든. 그뿐인가, 생생하게 현장에서 하는 예술로 관객이 함께 숨쉬고 있어. 그래서 이 어려운 연극에 한번 빠져들면 못 벗어나는 거지.”
어떤 연극론 책에서도 맛볼 수 없는, 선생님의 오랜 연극 인생에서 우러나온 걸쭉한 진국이었다.
“연기는 영혼의 폭발”
1977년, 그러니까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기 1년 전, 정부의 주선으로 제1회 대한민국 연극제가 치러졌다. 오직 창작극만 무대에 올리게 되어 있어 우리 연극 활성화에 청신호가 켜진 해였다. 그 가운데 극단 가교가 당시 젊은 작가 오태영의 ‘아득하면 되리라’란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주인공인 곱사등이가 그 마을의 처녀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나눈다는 ‘한국판 노트르담의 꼽추’와도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가교에서는 주인공 곱사등이 역엔 여지없이 배우 장두이가 적격이란 의견에 일치했고 곧바로 날 찾아왔다. 나는 이 아름다운 한 편의 연극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건 영혼의 일체감이었다. 동네 어귀 동산에서 연을 날리면서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지금도 나의 가슴을 아련히 적신다. 지금도 변함없이 연극을 하고 있는 최주봉, 윤문식, 박인환 선배들과의 공연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공연 시작하고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누군가 분장실에서 이해랑 선생님이 객석에 오셨다고 알려줬다. 순간 내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날처럼 공연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적은 거의 없던 것 같다.
막이 오르고, 나는 진땀에 흠뻑 젖은 채 어떻게 공연했는지 몰랐다. 어느새 막이 내렸다. 분장을 다 지우고 극장 로비에서 스승님과 맞닥뜨렸다. 그건 외나무다리였다. 강의 시간이나 일상생활에서 별 표정 없는 모습에 익숙해 있던 내게 그날 밤 선생님의 얼굴은 전혀 달라 보였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는가 하면 맥주를 함께 마시자고 ‘프러포즈’를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우리는 광화문 근처까지 걸어가 어느 맥주집엘 들어갔다. 담갈색 맥주를 흥건하게 따르시며 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공연 좋았어. 오랜만에 배우의 열정과 끼가 아닌 기(氣)를 봤지. 에너지가 보이더군. 연기는 바로 그것이거든. 몸에서 뿜어져 나와 극장 안을 가득히 메우는 에네르기, 거기에 연기의 자석이 숨어 있지.”
사실 난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에너지며 에네르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끼와 기는 어떻게 다른지….
“우리 배우들은 힘으로 연기를 하지. 하지만 진정한 힘은 물리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거든.”
선생님의 면도날처럼 예리한 지적에선 ‘비록 이제는 연출만 하고 있지만 역시 연극예술은 연기자의 예술’이라는 확신이 느껴졌다. 당신 마음속에 연기를 다시 하고픈 열망의 불꽃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장두이는 희곡을 직접 쓰고, 연출도 하고 무대에도 직접 오르는 배우다. 이해랑 선생은 그에게 연극의 새로운 지평을 일깨워줬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연극 연출가 그로토우스키와 함께 작업한 적이 있다. 우리는 ‘디디무스’라는 한 작품을 가지고 4년 동안 단 하루만 빼고 매일 연습했는데, 어느 날 그로토우스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두이, 지금 그 역할에 미쳐야 해! 생명을 모두 넣어봐! 연기는 죽음도 마다않는 위대한 희생이야.”
제자가 다시 올리는 ‘황금 연못’
유럽에선 간혹 배우들이 미친다. 실제로, 공연 후 정신병원에 들어가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역할에 빠져 있거나 혼신의 힘을 쏟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그로토우스키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문득 이해랑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 것이다. 연기자 자신이 미치면 관객의 몫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여백을 남겨두는 아량, 그곳에 숨겨진 비밀의 방과 공간, 바로 그곳에 관객을 정중히 초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1978년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뉴욕 라마마 극장에 초청돼 미국에 가게 됐다. 대학원 졸업을 한 해 남겨둔 시점이었으나, 나는 새로운 연극의 현장이자 세계 연극의 메카인 뉴욕행에 가슴이 설레었다. 떠나기 며칠 전 선생님을 찾았다.
“두이, 선진국에서 연극을 잘 배우고 오게. 그러나 한 가지, 자네가 한국 사람이란 걸 절대 잊지 말게나! 우리는 우리 연극을 해야 돼. 아니면 누가 우리 연극을 하겠나?”
그해 미국으로 날아가 17년 후인 1995년 귀국할 때까지 나는 선생님의 ‘훈령’을 가슴에 새기면서 일했다. 내 일생 가장 힘들면서도 보람 있었던 미국 활동을 굳건히 떠받친 것은 내게 연극 정신의 피와 살을 심어준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미국에 건너간 이듬해 1월 뉴욕 무대에 춘향가를 바탕으로 한 ‘춘향 그리고 태을성’이란 작품으로 연출의 문을 두드렸다. 젊은 예술가들의 예술정신이 번뜩이는 그리니치 빌리지 소극장에서 2인극으로 춘향가를 올렸다. 춘향가의 첫 대목이 춘향과 이몽룡(전생에 태을성군이었음)이 전생에서 만나는 장면이었기에 제목도 ‘춘향 그리고 태을성’에다 단 두 사람이 출연하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물론 연기와 연출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는데(제작비가 없으니 연기자를 구할 수도, 연출자를 초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또 하나의 연극 분야에 뛰어들었다. 바로 작품을 쓰는 극작가의 역할이었다. 그것도 작가료를 지급할 수 없는 처지라 시작한 일이다.
그 뒤로 나는 모든 작품에 배우, 연출에 극작가라는 수식어까지 달고 다녔다. 다행히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터라 글 쓰는 작업이 먼 나라 얘기는 아니었다. 이후 줄곧 우리의 소재를 발굴하고 쓰는 일에 몰두했다. 1987년 뉴욕 46 플레이 하우스에서 공연돼 ‘뉴욕타임스’로부터 호평을 받은 ‘The Song Of Shim Chung’과 198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한 샌프란시스코 이민 초기의 인삼 장수 이야기 ‘태평양 로맨스야’, 그리고 귀국해서 쓰고 연출한, 하회탈을 배경으로 한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200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경기민요 한강수 타령을 배경으로 한 작품 ‘한강수야’, 2007년 2월6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할, 우리 무속을 배경으로 한 ‘Korean Shaman Chants’(춤추는 파도) 등 오늘날까지 배우로 연출가로 작가로 일인 3역을 하고 있다.
연극은 분명 삶의 예술적 표현이요 거울이다. 누군가 “연극은 그 나라 문화의 표본이다”라고 했듯이 연극이야말로 모든 예술 분야가 녹아든 종합예술이며 더욱이 그 민족의 언어가 생생하게 꿈틀대는 가장 정체성 짙은 예술행위이다. 인간의 가장 직접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언어와 육체의 표현예술인 연극은 그래서 이해랑 선생님과 내게 더욱 매력 있는 세계가 아니었나 싶다. 또한 연극은 우리말을 사용하는 범주에서 볼 때 민족예술의 종합적인 정점이다. 그것이 번역극이든 창작극이든 우리말로 공연되면 우리의 정서와 소통하는 예술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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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우리 연극계에 수많은 화두를 남기시고 이해랑 선생님은 가셨다. 나는 미국에서 선생님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오열했다.
이제 세월이 흘러 필자도 강단에서 후학들에게 ‘평생 노하우’를 강론하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내가 연기하고 연출하고 작품을 쓰는 일련의 작업들이다.
마침 오는 12월6일부터 이해랑 선생님께서 1980년대에 직접 연출하신 어네스트 톰슨 원작의 ‘황금 연못’을 완전히 한국적인 이야기로 개작해 직접 출연하고 연출까지 맡게 됐으니 스승과 제자의 연이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이 작품을 통해 나의 반평생을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볼 수 있어 이번 겨울은 정말 춥지 않을 모양이다.
“선생님! 이젠 열반의 황금 연못에 제 연극처럼 하얀 정원을 가지시고 하얀 집에서 백색의 풍요로움을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