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육학교 축구팀이 공부도 잘하고 축구도 잘할 수 있도록 지도하신 이계근 선생님은 진정한 축구인이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내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축구협회 지도부와 타협하지 않고 한국축구연구소를 만든 것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다.
체육학교 시절. 체육학교 축구부는 정규 학과수업을 다 받으며 운동을 병행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고교축구 전국대회 3관왕에 오르는 금자탑을 쌓았다. 앞줄 왼쪽 세 번째가 신문선, 뒷줄 왼쪽 여섯 번째가 이계근 선생.
살벌하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간단하다. 체육학교는 특수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일반 학교와는 달리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군대처럼 기상점호와 취침점호를 하는 등 엄격한 생활을 했다. 이뿐 아니다. 일반 학교와 똑같은 학과 수업을 받았고 중간고사와 학기말고사에서 낙제할 경우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퇴교 조치를 당했다. 또한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운동을 못하면 역시 퇴교 조치됐다.
이런 분위기는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오후 3시까지 학과 수업을 받은 뒤, 쉴 틈도 없이 운동장으로 달려가 축구공과 뒹굴었다. 또한 저녁식사 후에는 지친 몸을 추슬러 다시 책과 씨름했다.
1970년대 초반은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나랏돈으로 먹여주고 재워주며 공부까지 시켜주는 것은 큰 혜택이었다. 이 혜택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남들과는 물론, 나 자신과도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 했다.
혹독한 단련
시험이 끝나면 시험 성적과 석차를 전교생이 다 볼 수 있도록 대자보로 붙였던 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대자보가 붙기 전까지 가슴을 졸이던 긴장감은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였다. 대자보가 붙는 날이면 성적이 부진한 학생은 이불 보따리와 개인물품을 챙겨 학교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험기간에는 며칠 밤을 새우며 공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학생들의 치열한 노력과 더불어 선생님들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가르침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담임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은 물론, 방과 후에도 퇴근을 미루고 밤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취침점호가 끝나면 자신의 반 학생들 기숙사를 찾아가 소등된 침상 머리맡에서 30cm 대자를 들고 영어 책을 외우라며 다그치곤 했다. 우리는 1과부터 36과까지 있는 영어 교과서 중에서 선생님이 지정해준 부분을 달달 외워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외우지 못하면 어김없이 대자의 날선 면이 까까머리에 불똥을 튀게 했다.
체육학교 1기생으로 모두 210명이 입학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무사히(?) 졸업한 학생은 121명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체육 엘리트를 육성하기 위해 세운 이 학교가 엄격한 학칙을 바탕으로 일반 학교와 다름없이 학과 공부를 강하게 시킨 배경은 간단했다. ‘운동선수는 깡패’ ‘운동선수는 깡통’이라는 당시 사회적 편견을 타파하라는 최고통치권자의 지시로 학교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해 일반 과목 선생님, 체육선생님, 각 종목 감독선생님들은 한국 체육의 체질과 풍토를 바꿀 엘리트를 육성한다는 사명감에 혼신을 다해 제자들을 강하게 단련했다.
축구계와 체육계, 언론계에서는 나를 보고 ‘축구계의 야당’ 혹은 ‘축구계의 쓴 소리꾼’이라고 부른다. 축구협회 회장과 집행부를 향해 끊임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기 때문일 것이다. 들어서 기분 좋은 덕담과 공치사는 제쳐두고 듣는 사람이 불편해할 쓴소리를 하고 아픈 곳을 찔러대는 칼날 같은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축구 국가대표를 지내기도 한 신문선은 축구해설가, 축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축구계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성적이 부진할 때마다 내가 시퍼렇게 날을 세운 글을 쓰며 축구 개혁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체육학교 시절 선생님들에게서 수도 없이 들은 체육인의 양심과 참 용기에 대한 가르침 덕분이다.
‘패배는 죽음’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분은 이미 고인이 되신 이계근 선생님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뛰던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선생님을 만났다.
고교시절까지 축구선수를 한 선생님은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가 퇴교당한 뒤 경희대와 실업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교사자격증을 받고 교사가 되셨다. 평범치 않은 이력만큼이나 선생님에겐 다른 교사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전공 실기인 축구연습시간에는 우리와 같이 운동 팬티를 입고 함께 달리고 넘어지고 뒹굴었고, 운동이 끝난 후 저녁 공부 시간에는 축구선수들을 모아 과외공부를 시켰다.
당시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게 ‘패배는 죽음’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를 강하게 담금질하시던 선생님은 축구부가 유도, 태권도, 농구, 배구, 육상 등 여타 종목 선수들과의 학과 성적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엄청난 벌을 주기도 했다. 벌이란 운동선수들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것으로,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체벌까지 포함됐다.
1주일 혹은 10여 일간의 시험기간에는 축구연습도 중단하고 교실에서 집중적으로 시험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당시 선생님은 인간의 능력으로 며칠 밤을 새우며 공부할 수 있을지 알아보라는 과제를 내주며 시험공부에 매진하게 하기도 했다. 나는 꼬박 나흘밤을 새우며 공부하고 시험을 본 후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기억이 있다.
이렇게 제자들을 다그치며 강하게 키운 이유를 훗날 내가 성인이 됐을 때 선생님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축구선수였던 선생님은 어렵사리 공군사관학교 생도가 됐지만, 결국 학과공부 때문에 사관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교 조치를 당해 방황했다. 선생님은 당신이 겪은 그런 아픔을 제자들은 결코 겪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노력으로 강하게 단련된 우리 체육학교 축구팀은 고등학교에 진학해 ‘체육고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다. 2학년부터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3학년 때는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전국고등학교선수권대회, 추계연맹전, 부산MBC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국 최고의 팀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당시 많은 언론매체는 ‘공부하며 축구하는 체육고 축구팀 돌풍’이라는 제목을 뽑아 신바람난 연승을 보도하기 바빴다.
제자 옹호하다 쓰러지신 선생님
체육고 축구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축구장엔 무려 2만여 명의 관중이 운집할 정도로 인기 최고였다. 당시 우리 팀이 인기를 모았던 것은 공부하면서 축구를 잘한다는 점도 있었지만 심판 판정에 승복하고 철저히 페어플레이 정신에 입각한 경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상대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고 주심의 판정에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경기를 지연시키는 비신사적인 플레이를 하지 않았던 점도 팬들의 사랑을 받은 요인이었다.
이런 면모도 다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사이면서 현역 심판으로도 활동하시던 선생님은 늘 “심판 판정을 존중하고 정해진 룰에 따라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루라”고 강조하셨다. 이 가르침 덕분에 나는 연세대와 육군대표 충의팀, 대우축구단, 유공 프로축구단을 거쳐 1985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퇴장당한 적이 없다.
정몽준 회장(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등 축구협회 관계자들과 산행을 하는 신문선(오른쪽에서 네 번째). 그는 “축구협회에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이계근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큰 대회를 앞둔 일요일이나 외부에서 연습경기를 할 때, 혹은 특별 훈련을 할 때면 선생님은 우리를 당신의 댁으로 데려가 삼계탕을 끓여주셨다. 주중에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기숙사 밥을 먹어야 했던 우리에겐 아주 특별한 만찬이었다. 박봉을 털어 30명 가까운 먹성 좋은 축구선수들의 배를 채워주신 그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무더운 여름날 땀을 흘리며 연탄불에 큰 솥을 얹고 오랫동안 닭을 삶고 찹쌀로 죽을 끓이던 선생님과 사모님의 제자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도 체육고 축구부의 전성시대는 없었으리라.
요즘은 초중등학교 축구팀도 대개 전용버스를 보유해 대회 참가와 친선경기 때 편하게 이동하지만 당시는 연습경기가 끝나면 시내버스를 타고 귀교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빈 자리가 나면 운동하느라 피곤한 제자에게 자리를 내주며 선수들을 배려했다. 또한 그 어렵던 시절에 선생님은 지방에서 열린 대회에 나갈 때면 당신의 주머니를 털어 과일과 음료 같은 간식을 준비해 선수들의 사기를 높이곤 했다.
선생님과 나는 고교 졸업 후 20여 년 만인 1990년대 말에 축구계에서 다시 해후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던 축구계를 비판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귀국, 한국초등학교축구연맹 사무국장으로 활동하셨다. 선생님은 한국 축구의 초석은 초등학교 축구에 놓아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그 시기 학생들이 꿈을 키우고 기량을 연마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250여 개 학교가 출전하는 ‘전국 꿈나무 축구대회’를 창설하는 데 온 정열을 쏟으셨다.
초등연맹 사무실이 대한축구협회 건물 안에 있다보니 축구협회 고위 인사들과 함께 식사할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대한축구협회 고위 인사가 초등연맹 임원까지 동석한 식사자리에서 내가 한겨레신문에 축구협회 행정에 대해 비판적인 칼럼을 쓴 것을 거론하며 나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때 그 자리에 계시던 선생님께서 “신문선은 내가 가르친 자랑스러운 제자이고, 제자의 글은 한치의 잘못도 없이 올바르다”며 목소리를 높여 큰 충돌이 있었다. 이 충돌은 급기야 선생님의 퇴출로 이어졌고, 그 후 선생님은 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셨다.
운명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병문안했을 때 선생님은 수척해진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한국 축구의 정치 도구화를 더 이상 묵과하지 말고 축구 개혁과 발전적 대안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달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 “힘과 돈이 없더라도 능력만 있으면 대우받는 축구계를 만들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도 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나를 강하게 키우셨고, 축구를 통해 얻은 부와 사회적 혜택을 축구계에 환원하라는 선생님의 평소 가르침과 유지를 받들기 위해 나와 체육학교 1기 동기인 이용수(KBS 해설위원), 김남주, 오일영 박사, 역시 선생님의 제자이며 내 후배인 채재성(동국대 교수), 김종환(중앙대 교수) 등과 함께 2004년 말 한국축구연구소를 창설했다.
제자들 모여 한국축구연구소 창설
|
한국축구연구소는 축구선수 출신 박사들로 구성돼 있다. 축구연구소 구성원의 절반에 가까운 축구박사들도 모두 이계근 선생님의 제자들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청소년기에 선생님의 엄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공만 찬 평범한 축구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계근 선생님은 지덕체를 겸비한 체육인이자 축구인으로 인생을 값지게 살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셨고, 진정한 축구인으로서의 참 용기를 갖게 해주셨다. 선생님께 보답하는 길은 한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위해 건전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경기에서 지면 심판의 오심 탓으로 전가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이기는 것이 애국인 양 조장하는 그릇된 애국심과, 학업은 멀리하고 공만 차게 하는 잘못된 학원축구를 바로잡는 것 또한 내 몫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선생님을 생각하며 못난 제자가 선생님께 편지를 써보았다.
선생님. 선생님의 엄한 교육과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는 분명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학창시절 선생님이 강제로 영어 문장을 외우게 하고 수학과 물리 문제를 풀게 하지 않았다면 저는 볼만 찬 깡통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선생님의 진정 어린 축구 사랑과 제자 사랑으로 저는 한국 축구를 걱정하는 축구인으로 거듭나게 됐으며 축구를 통해 받은 국가적, 사회적 혜택을 축구계에 환원하는 과제도 갖게 됐습니다.선생님의 교육 철학과 축구에 대한 사랑은 한국 축구의 개혁을 위한 씨앗이며, 이 씨앗은 분명 한국 축구 발전이라는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사랑과 가르침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한국 축구 발전에 빛과 소금같이 꼭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다짐해봅니다. 선생님. 한국 축구가 혼란스럽고 어려울 때마다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지금 한국 축구는 프로축구 경영수지 악화로 위기를 맞고 있으며 국가대표팀만을 좇는 스포츠내셔널리즘으로 어려움이 겹치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타파하고 한국 축구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많은 지혜를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도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