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 이황의 글씨.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는 바로 이러한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지식인이다. 두 사람의 모습이 1000원권과 5000원권 지폐에 담긴 한 가지 사실을 보더라도 이황과 이이가 우리 역사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대의를 추구한 근엄한 유학자인 동시에 어릴 적부터 역사책에서 빈번히 만나온 더없이 친숙한 지식인이다.
이 글에서 이황과 이이의 삶과 사상을 제대로 다루기는 어렵다. 두 사람이 조선 중기 이후 우리 유학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뤄온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종장(宗匠)이었던 만큼, 그동안 결코 적지 않은 연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황과 이이는 전통사회에서 활동했던 학자이자 지식인의 모범이었다(누구는 영남학파의 또 하나의 거목으로 남명 조식을 지적할지 모르겠다. 조식 또한 주목받아야 할 지식인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학통을 계승한 북인이 인조반정 이후 몰락하면서 영향력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유학자의 모범 이황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퇴계(退溪)다. 아버지는 식이며, 어머니는 박씨 부인이다. 12세에 작은아버지인 우에게서 ‘논어’를 배웠고, 학업을 연마해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3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부정자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출사를 거듭했지만, 50세 전후부터는 학문에 전념했다.
퇴계의 학문적 연구는 주로 고향에서 이뤄졌다. 그는 46세에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로 이름을 바꾸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물러나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 호에는 학문에 대한 그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셈이다. 60세에 이황은 도산서당을 지어 여기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으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이황은 당대에 이미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학자로 칭송받았으며, 숱한 업적을 남긴 다음 1570년(선조 4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이황은 매우 진지한 학자였으며, 대단히 인간적인 지식인이었다. 이황은 수기치인(修己治人)과 외유내강(外柔內剛)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자신을 닦은 후에야 남을 다스린, 자신에게는 아주 엄격했지만 타인에게는 더없이 너그러웠던 이가 다름 아닌 이황이었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이황의 기여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성취하고 이를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완성했다는 데 있다. 이황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에 의해 적잖이 이뤄졌다. 무엇보다 이황은 우리 역사에서 주자 성리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심층적으로 해석한 최고의 학자로 꼽혀왔다.
정옥자 교수에 따르면,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는 우주론적 이기론(理氣論)에 있다. 이는 음양동정(陰陽動靜)하는 작용인 기(氣)와 그 작용의 원리인 이(理)에 의해 이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세계의 본질이 이에 있는가, 아니면 기에 있는가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현실 정치와 정책의 선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 유학의 역사에서 이황과 이이가 가장 주목받아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은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에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했으며, 이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사상적 기반을 이뤘다.
이황의 견해는 이와 기가 동일한 비중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시각이다. 정옥자 교수에 따르면 이황 철학의 핵심은 이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데 있는바, 이황 이후 영남학파에서 주리론(主理論)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현실 문제의 해결보다는 이론적 원칙의 탐구에 주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이 이황이 고봉 기대승과 벌인 사단칠정 논쟁이다. 성리학에서 사단(四端)이란 맹자가 실천도덕의 기본으로 제시한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와 ‘중용’에 나오는 희·노·애·락·애·오·욕을 말한다.
이황에 따르면 사단이 ‘이’에서 나오는 마음이라면, 칠정은 ‘기’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그는 인간 마음의 작용을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의 두 가지로 구분했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구체적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이의를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