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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②

인고의 세월을 바느질로 승화한 침선장 김영재

바늘과 실이 빚어낸 아름다움에 취해 60년을 바치다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인고의 세월을 바느질로 승화한 침선장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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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고의 세월을 바느질로 승화한 침선장 김영재

안에 털을 댄 갓저고리 외투(위). 겨울 방한모 남바위는 귀까지 따뜻하고 시야를 가리지도 않아 서양 모자보다 편리하고 멋있다(옆).

그때 아버지는 딸의 솜씨가 그저 좋은 솜씨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도 양재학원을 다니는 대신 집에 들어앉아 얌전하게 옷을 지어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걸로 만족했다. 동네 친구가 혼례를 치를 때 녹의홍상 새색시 옷을 지어주고 친구가 시집으로 들어갈 때 후각시(들러리처럼 신부의 연고자로서 시집까지 동행하는 사람)로 따라갔더니 그 동네 사람들이 다들 새색시 옷 예쁘다고 감탄하더란다. 같이 간 한 동네 사람이 “이 아가씨가 바느질한 것”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그는 그날 치사를 참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런 그였기에 스무 살, 자신이 시집갈 때 자기 옷은 물론이고 시부모 옷까지 죄다 직접 지어갔다. 남편은 그보다 네 살 많은 멋진 해군 장교였다.

“멋쟁이 중 멋쟁이였습니다. 본래 해군이 멋진데, 이 사람은 더 멋있었어요.”

멋쟁이 남편은 한량이었다. 남편을 따라 진해로 살림나와 신혼을 보냈는데, 남편에 관한 소문을 들어도 그는 곱게 자란 숫기 없는 성품으로 남편에게 따지는 법을 몰랐다. 진해에서 2,3년 살다 남편은 제대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해양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해군 경비선을 타고 한번 나가면 보름씩 걸리곤 했어요. 그러면 동네 할머니들이 옷 뜯어서 손질할 때 제가 꾸며드리곤 했지요. 이곳이 객지인데다 세 들어 사니까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게 됐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텃밭에 고구마나 고추 농사지으러 가면 따라다니기도 하고요.”



남편은 해양경찰도 그만두고 이번에는 외항선을 탔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올까말까 했다. 그렇게 외항선을 타고 떠도는 남편을 기다리며 그는 바느질을 시작했고, 이곳 부산이 제2의 고향이 됐다. 이제는 부산 사투리가 입에 붙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다만 본토박이 부산 사람들보다 훨씬 부드럽다.

그가 바느질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당장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남편은 외항선 타면서 받는 월급을 가족에게 보내지 않고 혼자 다 썼다.

“제가 바느질할 줄 안다는 걸 믿고 그랬겠지요. 언젠가 배에서 신원보증을 세워야 한다기에 제가 친정아버지와 이모부에게 부탁해서 서류를 만들어주었는데 직원이 보고 ‘와, 우리 회사보다 재산이 더 많네’ 했대요. 우쭐해진 남편은 그 다음부터 사람들에게 돈을 더 잘 쓰게 된 겁니다.”

천생 한량인 남편은 가족 부양의 의무마저 저버렸지만 그는 부부싸움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마 있었다고 해도 싸울 줄 몰랐겠지만. 외항선을 그만둔 남편은 곧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막내가 겨우 세 살 때였다. 그리고 14년간 남편은 발길을 끊었다.

“어떻게 견뎌냈느냐고요? 바느질이 수양이 됩디다. 새 작품을 만들어낼 때마다 기쁨이 있으니까,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그런 건 묻지 않고 그저 참고 견디며 바느질을 했지요.”

친정아버지는 과부 아닌 과부가 된 딸을 위해 쌀과 보리, 깨, 콩, 찹쌀까지 농사지은 것을 선주였던 이모네 배에 바리바리 실어 부산 자갈치까지 보내주었다. 거기서 대신동 그의 집까지 일꾼이 부려다놓았으니, 그는 멀리서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안쓰러운 딸이었다. 그 아버지는 해가 질 무렵이면 마루 아래 축담 섬돌에 앉아 곰방대를 하도 탁탁 쳐대어서 담뱃대의 목이 다 휘어지곤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곰방대 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 영감이 또 딸 생각하나 보다”고 수군거렸다.

“가끔 제가 친정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야야, 니 아버지 담뱃대 봤나?’ 묻곤 했지요.”

그는 이 말을 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남편의 부재가 만든 명장

그의 나이 서른에서 마흔다섯까지, 그에겐 남편 대신 여섯 아이와 바느질뿐이었다. 마침 1970년대와 1980년대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사람들은 고운 치마저고리나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차려입는 멋을 부리기 시작했고, 명절이나 결혼식, 졸업식, 사은회 때면 우리옷을 입는 것이 멋이고 유행이었다. 꼼꼼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저절로 이름이 나니, 부산에서 옷 좀 입는다는 부인네는 모두 그의 가게를 찾았다. 그 덕택에 그는 여섯 아이를 다 번듯하게 키워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병들고 지친 몸으로 조강지처인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 평생 남편에게 따질 줄 모르고 늘 따뜻한 밥상을 차려냈던 그는 이번에도 남편의 건강을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몸이 완전히 망가져 돌아온 거예요. 그때 옷 한 벌 짓는 삯이 2500원이었는데, 한 해 약값으로 250만원이 들어갔어요. 좋다는 보약은 뭐든 다 썼습니다.”

그의 정성에 남편은 차츰 건강을 회복했고, 친구들과 등산을 다니며 즐겁고 편하게 그의 곁에서 지냈다. 그는 또 여름이면 모시옷을 날아갈 듯이 손질해 입혀 왕년의 멋쟁이로서 남편의 위신도 세워주었다. 사람들은 “뭐가 예뻐서 그렇게 좋은 옷을 해주느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얌전한 그도 당차게 대답하곤 했다.

“내가 남편을 위해 사는데 왜 당신이 상관하느냐고,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이 어떻게 해줄 거냐고, 제가 이렇게 대답하면 아무 말 못했지요.”

그때 그는 남편을 원 없이 모시고 받들며 살았다. 젊은 날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아내 노릇을 남편의 마지막 15년 동안 이렇듯 곱고 진하게 해낸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눈을 감았을 때 그는 비로소 참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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