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시를 쓰는 가장 좋은 도구는 진실”

정호승 시인

  • 이소리│ 시인, 문학in 대표 lsr21@naver.com

    입력2012-04-19 11:0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04쇄 찍은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 고교 때 학교 안 가고 쓴 평론 당선…장학금 받고 입학
    • “수도꼭지 틀면 물 나오듯 시는 나오지 않아”
    • 나는 문학을 들고 일하는 자영업자
    • 젊은 시인은 자의식과 표현 과잉 버려야
    • 지금은 웅덩이에 시가 고이기를 기다리는 중
    “시를 쓰는 가장 좋은 도구는 진실”
    김용택, 도종환, 안도현과 더불어 한국 시단을 반짝반짝 빛내는 스타 시인 정호승. 정 시인은 1979년 3월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로 독자를 사로잡은 뒤 2010년 11월 10번째 신작 시집 ‘밥값’을 펴냈다. 등단 40년을 맞은 시인이 2006년 3월에 펴낸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는 이미 100쇄를 훌쩍 넘겨 지난 1월 27일 104쇄를 찍었다. 지금도 ‘서점가 터줏대감’으로 가부좌를 틀고 있다. 수많은 애독자를 거느린 정 시인은 그러나 요즘 너무 조용하다. 어디선가 또 가부좌를 틀며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을 거 같다.

    4월 3일 오후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대치동의 한 커피숍으로 가는 날, 초겨울 날씨처럼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차디찬 봄바람도 몹시 거칠게 불었지만 그의 첫마디에 온몸이 스르르 녹았다.

    “요즘 시를 통 안 쓰고 있어요. 요즘 시가 내 방에 찾아와 벌러덩 드러눕기도 하고, 슬슬 집적거리기도 해요. 시의 웅덩이에 시가 고이기를 기다리고 있어요(웃음).”

    옆구리에 노란 책봉투를 낀 시인의 은빛 머리카락도 봄바람에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시인은 별을 바라보는 사람이며, 데뷔작도 ‘첨성대’여서 아호(雅號)를 ‘첨성(瞻星)’이라고 지었다는 시인 정호승. 그래서인지 그날따라 시인의 눈에서는 더 많은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 아무리 멀어도 /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밥값’ 모두

    원두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맑은 눈웃음을 툭툭 던지는 그에게 요즘 작품 활동에 대해 물었다.

    “시로 등단한 지 꼭 40년이고, 소설가 박범신 선생과 같아요. 2010년 11월에 10번째 시집 ‘밥값’을 냈으니, 제가 시집을 너무 많이 낸 것인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 시인들은 보통 3년마다 시집 한 권씩을 내니까 조금 적게 낸 거 아닌가요. 11번째 신작 시집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그동안 통 시를 안 쓰고 있었어요. 여름날 냇가에 가서 모래를 파면 처음에는 물이 안 고이는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물이 스윽 고여 웅덩이가 되지요. 지금은 ‘밥값’ 이후 시의 웅덩이에 시가 고이기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시인이 시를 찾아가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가 저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올해 등단 40년이니까 시가 나를 찾아줄 것 같다는 소년 같은 설렘도 있지요. 예쁜 소녀가 그녀를 끝없이 기다리는 소년을 찾아오듯이.”

    ▼ 그동안은 시를 찾아가지 않았나요?

    “맞아요. 항상 시를 찾아갔죠. 제가 시를 찾아가니까 시가 마중을 나오는 때도 있었고요. 요즘은 ‘밥값’ 이후 새로운 시집을 구상 중입니다. 이러한 계획들은 오늘의 문제이지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오늘만 있지 내일은 없으니까요.”

    시인 정호승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지난해 세상을 떠난 김규동(1925~2011) 선생을 떠올렸다.

    “제 나이 60이 되었을 때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나이를 물으시고는 ‘시인의 인생에서 60~65세가 가장 좋은 시를 쓸 때’라고 하셨어요. 지금도 그 말씀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하고, 이 엄청난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 시인은 1950년생이니, 올해 우리 나이로 63세다.

    ▼ 2006년 3월에 펴낸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는 이미 100쇄를 훌쩍 넘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2006년 3월에 펴낸 책이니까 햇수로 6년째지요. 제가 시작노트에 적어두었던 좋은 말 한마디와 책을 읽다 가슴 깊숙이 와 닿는 글귀를 토대로 삼아 쓴 산문입니다. 이 산문집은 중간쯤 쓰다가 낸 책이어서 올해 안에 제대로 끝내기 위해 마무리작업을 하고 있어요.”

    인터넷을 뒤져보면 시인 정호승은 1950년 1월 3일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옮겨갔다.

    “대구가 고향 같은 곳”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아버지가 대구에서 은행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인 ‘가난의 힘’을 깨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아버지가 은행을 그만두고 여러 사업을 하다가 잇달아 실패하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때부터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녀야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활을 쏘아 명중시키려면 과녁을 멀리서 보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란다.

    고교문예의 성찰-고교시를 중심으로

    ▼ 고교 때 경희대 전국고교문예작품모집에 당선해 1968년에 경희대 문예대학생으로 입학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쓴 작품도 시였나요?

    “6회 대회였죠. 저는 시를 써서 당선한 게 아니라 평론을 써서 당선했어요. 평론 당선은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제목이 ‘고교문예의 성찰-고교시를 중심으로’였어요. 그 평론을 쓰기 위해 어머니에게 ‘학교(고교)에서 연락 오면 아프다고 하십시오’라고 핑계를 대도록 하고, 1주일 동안 집에 틀어박혀 120매 정도를 썼어요. 그 평론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분은 그때 심사위원이었던 김우종 선생님이었죠.”

    경희대에서는 지금도 전국고교문예작품을 공모하고 있지만, 그때에도 전국 고교생들이 쓴 문예작품을 모집해 당선한 학생에게는 1년 동안 문예장학금을 주었다. 재학 중에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제를 거쳐 기성 문인이 되면 졸업할 때까지 총장 장학금을 줬다. 시인 정호승은 1년 동안 문예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니다가 1969년 휴학을 한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최종심에서 떨어져 학비를 더 이상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때 경주에 있는 외갓집인 초가 암자에 들어가 1년 동안 고시 공부하듯 시를 써서 다시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만 또다시 최종심에서 미끄러진다. 시인이 1970년 그해 자원입대를 한 것도 휴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럼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된 때는 군인 신분이었군요.

    “그렇죠. 근데 참 안타까운 일은 제가 시로 당선한 그해 ‘대한일보’가 없어졌어요. 그때가 유신 초기였는데, 대한일보 사주인 김연준 이사장이 수재의연금을 모아 포탈했다는 혐의로 그만…. 저로서는 나자마자 엄마가 죽은 것과 같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태어나게 해준 것만도 감사한 일이지요. 등단을 어디로 하든 태어났으면 스스로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청년들은 너무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어 스스로의 삶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예나 지금이나 신춘문예 당선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어요. 시작이 곧 끝이 되어서는 안 되죠.”

    정 시인은 “(대한일보 폐간으로) 엄마 젖도 못 먹어 죽어야 했지만, 40년 동안 그래도 스스로 시를 쓰며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따름”이라며 “시를 쓰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며, 어떤 중심(목표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귀띔한다. 그래서일까. 정호승 시인이 펴낸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나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등에는 도시 변두리 삶이 많이 깃들어 있다. 시인 스스로도 농촌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대구나 서울에 있는 도시 변두리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나자마자 엄마가 죽은 것

    ▼ 왜 시를 쓰려고 했나요?

    “시를 쓰는 가장 좋은 도구는 진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원’이 유일한 잡지였어요.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아버지께서 민중서관에서 나온 ‘한국문학전집’을 사놓으셨어요. 그 책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형과 누나들 읽으라고 사놓으신 거였죠. 그 책은 깨알만한 세로글씨에 2단으로 빼곡하게 편집해 중학생들이 읽기에는 꽤 어려웠어요. 아버지께서 특별히 그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저는 그래도 다 읽었어요. 고교에 다닐 때부터는 용돈이 생기면 대구 시내에 있는 헌책방에 가서 현대문학 작품을 사서 시, 소설, 평론 등 닥치는 대로 다 읽었어요. 이때 평론은 곧 작가론이자 문학사론, 문학쟁점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경희대에 평론을 응모한 것도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죠.”

    “고교 때 읽은 ‘순애보’ 등 단편소설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시인의 눈에는 호기심이 톡톡 튀었다.

    “그때 읽은 단편소설 가운데 지금도 잊지 못하는 구절이 있어요. 어느 겨울날 창녀가 하는 말 가운데 ‘다들 불알이 탱탱 얼어붙었나? 왜 한 명도 안 오는 거야’라는 구절 말이에요. 이 구절을 읽고 당시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때부터 ‘어른들이 지닌 내면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어요.”

    ▼ 평론이나 소설을 더 좋아했는데, 왜 시를 쓰게 되었나요?

    “사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요. 제가 대구 대륜고에 다닐 때 문예담당 선생님이나 문예반 학생들이 대부분 시를 썼기에 저도 덩달아 시를 쓰게 된 것입니다.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된 것도 제가 소설가에 대한 꿈을 끝내 저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시인 정호승은 나이 41세 때인 1991년에 멀쩡하게 잘 다니던 ‘월간조선’을 그만둔다. 마치 고교 때 시인 아버지가 은행원을 그만둔 것을 대물림하듯. 시인은 직장생활을 처음 할 때부터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 10년 뒤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겠다는 야무진 꿈, 그것이다. 10년은 1년처럼 재빨리 지나갔다. 시인은 그때부터 6년 동안 소설에 모든 것을 건다.

    ▼ 소설이 시보다 더 적성에 맞던가요?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아무런 수입도 없이 소설에 매달리니까 긴 시간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어요. 6년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깨달았죠. 문학 장르가 여러 가지지만, 제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는 결국 시라는 것을. 그때부터 ‘아, 나는 소설이 아니다. 이러다가 시도 못 쓰겠다’ 생각하고 손을 놓았습니다. 시인으로서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난 셈이죠. 그해(1997)에 낸 시집이 ‘사랑하다 죽어버려라’입니다. 그 시집은 5개월 정도 집중적으로 쓴 시예요. 저는 평소 떠오르는 시상을 노트에 메모했다가 집중적으로 시를 쓰는 스타일이에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시인이지 소설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자기를 빨리 알아야죠. 다시 말하지만 저는 시인입니다.”

    ▼ 시인이나 작가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잖아요? 문인은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게 좋다고 봅니까?

    “어떠한 직업이든지 직업을 가져야 해요. 시나 소설을 쓰기 위해 직장을 버린다는 것은 달의 한 면만 보는 것과 같아요. 저도 일찌감치 직장을 그만두긴 했지만 항상 잊지 않고 있는 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일찍 일어나 직장으로 가기 때문에 나도 일찍 일어나 내가 만든 직장으로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죠. 아침 일찍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기획하고, 쓰는 것, 그게 내가 만든 직장입니다. 상호는 없지만, 문학을 들고 일하는 자영업자죠.”

    그는 구두미화원과 세탁소를 꾸리는 사람과 비교했다. 그들은 15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객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목이 쉬도록 외치고 다니며 산다. 문학인도 그들처럼 자기가 만든 직장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요지였다. 고통스럽지만 고통 속에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문학 자영업자

    ▼ 문학 자영업자로서 힘든 점도 많죠?

    “시는 인간을 이해해야 하고, 그들 삶과 인생을 이해하는 그 무엇입니다. 저는 인간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우니까요. 독자들은 나를 ‘70년대 시인’이라 하지만 나는 한 시대의 고통과 눈물을 닦기 위해 시를 씁니다. 인간이라는 나의 눈물조차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시를 써야 합니다. ‘죽음이 있는데 열심히 살면 뭐하나’라는 그런 생각은 버려야죠.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냥 시를 쓰죠.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니까요. 시를 써서 그 무엇을 이루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시는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시인 정호승은 “시인이 쓴 시를 놓고 잘 쓴다, 못 쓴다, 옳다, 그르다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다”고 못 박는다. 시는 누구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다음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 그럼 좋은 시는 어떤 시입니까?

    “시인은 영혼의 양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입니다. 꽃도 그러하죠. 꽃은 바라보는 사람의 것입니다. 꽃이 피어났는데 아무도 그 꽃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 꽃이 얼마나 슬플까요. 아마 그 다음해에는 꽃을 피우지 않을 수도 있겠죠.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시가 독자에게 읽히지 않으면 그 시인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요. 독자가 영혼의 양식으로 시를 맛있게 먹고 영양가를 빨아들여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겠죠. 시의 맛과 깊이, 영양가는 시를 쓴 그 시인에게 달려 있죠.”

    ▼ 올해는 정치의 해인데요, 시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뭐라고 봅니까?

    “시인으로서의 역할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기다림입니다. 한 개인, 한 시대, 한 국가의 삶에서 무엇을 기다리느냐는 매우 중요하죠. 기다림이 없으면 희망이 없는 것과 같아요. 기다림의 힘과 용기, 성실한 자세, 방향, 태도 등에서 정치인보다 시인이 더 소중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기다림도 용기죠. 언젠가 우리는 통일의 물꼬를 틀 수 있어요. 제가 통일된 조국을 볼 수 없다 할지라도 제 다음 세대에서는 제주도나 외국이 아닌 백두산으로 신혼여행을 갈 수 있을 거라 여겨요. 이에 따른 구체적인 기다림이 있어야죠. 그런 기다림이 없으면 노력도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대립한다고 할지라도 공통된 기다림이 있어야 해요. 정치인보다 시인이 그런 기다림,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정 시인은 우리 사회는 정치를 우선 색안경을 끼고 본다고 단언했다. 정치라는 말에 때가 많이 묻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확실하게 기다리고 있다”며 “기다림의 순간이 없으면 절망만 가득할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봄이 왔으니 꽃이 핀 것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수선화에게’

    시인 정호승은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이야기가 나오자 ‘수선화에게’란 시를 끄집어냈다. 올봄 서울 영등포 거리에서 수선화 화분을 산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인은 “그 화분에 매일 물을 주니까 꽃이 피었다”며 “수선화 꽃을 보고 ‘봄이 왔나’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이었다”고 고백한다. 봄이 왔으니까 꽃이 핀 것이지,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 진보와 보수? 그렇다면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나요?

    “문학에서 순수와 참여라는 대립관계는 이미 지나갔다고 봅니다. 지금은 서로 공유하는 시대죠. 순수니 참여니 하면서 시의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해요. 순수와 참여는 본질과 현상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현상의 변화에만 매달리고 본질을 보지 못하면 안 되겠지요. 시인은 본질의 본질에 더 가까운 삶을 살아야 해요. 한때 시의 본질이 훼손되고 결여된 채 살아온 시대가 있었어요. 순수와 참여가 마치 물과 기름처럼 대립하곤 했죠. 지금은 회복하는 시기예요. 커피에 우유를 타서 휘휘 저어서 마시듯이, 순수와 참여도 그렇게 어우러져야겠지요.”

    ▼ 시를 쓸 때 마음가짐은요?

    “원칙은 진실에 있습니다. 진실이 가장 좋은 시를 쓰게 하죠. 시인은 순수와 참여를 따지지 말고 진실을 지향하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인간은 진실 덩어리가 될 수는 없지만 지향은 해야 한다는 뜻이죠. 사물을 바라볼 때도 진실을 지향하는 마음을 지녀야 시를 쓰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이 생겨나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의 극명한 상태는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모성, 신의 사랑은 조건이 없지요. 그게 사랑의 본질, 곧 진실입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사물과 그 사물이 이루고 있는 형상을 바라볼 줄 아는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렵겠지만요.”

    시인 정호승은 1976년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1집에만 참여), 김명수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활동을 했다. ‘반시’에 실린 서문의 핵심은 “쉬운 일상의 언어로 현실적인 삶의 비애나 질곡을 구체적으로 노래한다”였다. 시인 정호승은 이러한 ‘반시’의 태도에 대해 “1960년대 시인들이 너무 추상적인 시를 썼다”고 꼬집는다. 이는 곧 60년대 시가 난해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시인은 “‘반시’는 그런 난해성을 버리고 구체성을 노래하려 했다”며 “‘반시’의 ‘반(反)’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반시’를 비롯한 ‘신춘시’ ‘현대시’ 등 동인활동에 대해 “1970년대 한국시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시는 외로움을 견디며 쓰는 것이지만 동인활동은 우선 외롭지 않아 좋았다”고 회상했다.

    ▼ 10권의 시집 가운데 가장 아끼는 작품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잖아요? 그중에서도 시집의 표제가 된 시들을 아껴요. 요즘엔 내가 아끼는 작품이 앞으로 더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해요(웃음). 사람은 언제든지 떠나요. 아침에 잠깐 ‘오늘의 중요성’을 강조한 법정 스님의 책을 읽으면서, 법정 스님은 ‘스님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무소유를 빼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 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어요. 스님은 오늘 이 순간을 열심히 살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지요. 순간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시인은 이 순간에 열심히 시를 쓰면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죽을 때 가슴속에 시가 들어 있어, ‘이 시를 다 못 쓰고 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가벼워지려면 빨리 쏟아내야 해요. 갈 때는 가슴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야 합니다.”

    “죽을 때 가슴에 시가 남아 있으면 안 돼”

    룸비니에서 사온 /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 산산조각이 나 / 얼른 허리를 굽히고 / 무릎을 꿇고 /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 불쌍한 내 머리를 /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산산조각’ 모두

    시인 정호승이 늘 가슴속 깊숙이 담고 있는 자작시는 ‘산산조각’이다. 시인은 인터뷰 자리에서 이 시를 마치 글쓴이 앞에 부처님이 나타나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나직하게 읊었다.

    정 시인은 요즘 젊은 시인들이 발표하는 시와 그 시에 대해 대중가요처럼 본질적 서정을 잃고 있다고 걱정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양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지닌 희로애락은 항상 변하지 않고 있는데, 젊은 시인들의 시가 먼저 변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자의식과 표현이 과잉되어 있는 것 같아요. 좋게 말하면 개성이나 발전, 변화라 할 수 있겠지만 너무 산문화되고 있어요. 자기 자신만의 자의식이 넘치다보면 시의 본질을 잃을 수 있죠. 시는 시 정신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산문 정신이 바탕이 된 것 같은 우려가 들어요. 마치 21세기 새로운 시의 유행에 길든 것처럼 연과 행 구분도 없어요. 시의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깊은 계곡도 있어요. 산문 흐름 속에도 물론 강과 계곡이 있겠지만, 왜 시의 본질적 형태에 기대지 않고 산문적 형태에 의존하느냐는 거죠.”

    ▼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활용하나요?

    “변화된 시대, 변화가 ‘긍정화’되는 시대에 변화는 있을 수밖에 없어요. ‘소셜’은 개인의 삶의 형태이자 성격일 수도 있죠. 어떤 옷을 입느냐는 것과 같아요. 저는 변화는 받아들이지만 조금 소극적이에요. ‘트위터’ ‘페이스북’도 하지 않고, 홈피도 없어요. 저는 드러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홈피나 블로그도 만들지 않지요. 한번은 ‘페이스북’을 하려고 가입했다가 곧 그만두었어요. 나라는 존재가 너무 드러나기 때문이죠. 지금 인터넷에 떠도는 정호승 홈피들도 제가 만든 게 아니라 팬들이 만든 팬 페이지입니다. 그 홈피들도 문제가 많아요. 제가 쓴 멀쩡한 시를 행과 연도 제멋대로 바꾸고, 시 내용이 다른 것도 꽤 많거든요. 저야 그렇다고 쳐도, ‘소셜’은 수많은 사람에게 현대적 삶에 대한 자기표현의 한 방법이라고 여겨요. 저 또한 변화무쌍한 소통의 방법을 너무 모른 척할 수 없어 앞으로는 전자책을 읽을 생각입니다. 전자노트로 시를 쓰려고 해요. 저는 그 편리함을 가치 있게 활용하면 된다고 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노트북으로 시를 쓰는 게 훨씬 좋아요.”

    정 시인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시로 쓴 자화상’이라며 자작시 ‘소년’을 직접 읊었다.

    온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된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