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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⑭

암살 위협 속에 탄생한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털’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암살 위협 속에 탄생한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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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공식적으로 기록된 암살 기도는 10여 년 후에 벌어졌다. 학생 출신의 알렉산드르 솔로피에프(Alexandre Soloviev)는 1879년 4월 20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를 향해 권총 5발을 쏘아댔지만 황제는 암살자의 공격을 지그재그로 피해 달아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그런데 세 번째 암살 시도가 있은 1879년 12월부터가 문제였다. 그전까지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암살 시도는 개인적인 단독 범행으로 밝혀졌지만, 이때부터는 급진 혁명조직이 암살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직의 주체는 ‘나로드니키(Narodniki)’라는, 이데올로기에 근간을 둔 ‘인민의 의지파(Narodnaya Volya)’라는 단체였다. ‘나로드니키’는 ‘인민주의자’라는 뜻의 러시아어로, 농촌 공동체를 바탕으로 농민을 혁명운동 주체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 이 단체의 이름은 ‘토지와 자유파’였는데, 1874년 분쇄된 후 혁명노선을 두고 대립하다가 1879년에 ‘인민의 의지파’와 ‘흑토 재분할파(Chyornyl peredel)’로 분열됐다. 이 두 분파 중에서 ‘인민의 의지파’는 보다 과격한 단체로서 테러 중심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단체는 황제가 탄 기차를 폭파시키려고 했지만, 해당 기차를 놓쳐 역시 미수에 그치고 만다. 이듬해에도 ‘인민의 의지파’에 의한 암살 시도는 끈질기게 계속됐다. 1880년 2월에 황제가 저녁식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겨울궁전의 식당을 폭파해 황제를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결국 그날 ‘인민의 의지파’ 조직원인 스테판 칼투린이 식당 아래층 경호원 휴게실에 장착한 폭탄이 터져 11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다행히 식사 시간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해 간신히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사건 이후 알렉산드르 2세는 반대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그들이 끈질기게 요구하는 의회 제도의 시행을 검토하는 위원회 설립을 검토하는 등 유화 정책도 병행했다.

‘인민의 의지파’ 조직원이 던진 폭탄

그러나 여러 차례 암살 기도를 극적으로 모면한 알렉산드르 2세도 결국 집요한 암살자들의 마수를 끝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때는 1881년 3월 13일 아침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수년간 매주 일요일마다 해오던 관습대로 군사점호에 참석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가를 달리고 있었다. 황제가 탄 마차는 6명의 용맹한 코사크 호위 기병이 둘러싸고 있었고, 또 한 명의 호위병은 마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마차 뒤로는 경호책임자와 경찰대장이 뒤따랐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일행이 다리를 통과하던 순간 좁은 인도에서 손수건으로 폭탄을 싸서 숨긴 채로 황제를 기다리고 있던 니콜라이 리사코프(Nikolai Rysakov)라는 ‘인민의 의지파’ 소속 젊은 조직원이 마차 쪽으로 폭탄을 던졌다. 폭음과 함께 코사크 호위병 한 명이 죽고 마부가 크게 다쳤지만, 황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 덕분에 무사했다. 암살 시도에 놀란 황제는 마차에서 나와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때 현장에서 체포된 암살범 니콜라이가 갑자기 현장 주위에 몰려든 행인 중 한 명에게 소리를 쳤고, 이를 들은 경찰대장은 호위병들에게 즉각 황제를 현장에서 피신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인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2의 암살자가 황제를 정확히 겨냥해 또 다른 폭탄을 던졌다. 수없는 암살 기도를 극적으로 모면해왔던 알렉산드르 2세도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폭탄으로 치명상을 입은 뒤 현장에서 겨울궁전으로 급히 옮겨졌으나 결국 얼마 후 사망하고 만다. 뒷날 수사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이날 제2의 암살자뿐 아니라 두 번째 시도마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세 번째 암살자까지 현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은 현장에서 이를 직접 목격한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와 손자 니콜라스 2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부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르자 마자 부친의 죽음에 대한 보복이나 하듯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과 반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실 알렉산드르 2세는 암살당하기 바로 전날 반대 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여 선거로 선출되는 의회 설립안을 완성하고 발표만을 남기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3세는 즉위한 이후 이런 계획을 즉각 폐기했고, 러시아는 결국 입헌군주제를 좀 더 일찍 도입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알렉산드르 2세는 재임 기간 내내 불안한 정국 속에 반대파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만큼 즉위 후 일찌감치 암살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그의 걱정과 예민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술이 바로 오늘날까지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샴페인 ‘크리스털(Cristal, 영어로는 Crystal)’이다.

크리스털 샴페인은 짙은 초록색 병을 특징으로 하는 여느 샴페인과는 달리 속이 환히 비치는 투명한 병의 유명 샴페인이다. 크리스털이라는 이름도 결국 이러한 병 모양에서 유래했다.

세 황제의 만찬에 선보인 ‘크리스털’

이 투명한 병의 탄생 기원은 1867년 6월 7일 당시 명성이 높았던 프랑스 파리의 카페 앙글레(Cafe ′ Anglais)에서 벌어진 이른바 ‘세 황제의 만찬(Three Emperors Dinner)’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일 독일의 첫 황제가 되는 빌헬름 1세(1797~1888, 재위기간 1861~1888)는 당시 프로이센 왕 자격으로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를 카페 앙글레에 초대했다. 카페 앙글레는 빌헬름 1세가 그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석할 때 종종 찾았던 레스토랑으로,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서도 음식 맛이 훌륭하기로 소문 난 식당이었다.

빌헬름 1세는 카페 앙글레의 셰프에게 비용에는 구애하지 말고 초대 손님을 위해 최고의 음식을 준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날 만찬에는 알렉산드르 2세 이외에도 그의 아들과 프로이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도 참석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이 자리가 오늘날 ‘세 황제의 만찬’으로 불리는 것도 빌헬름 1세, 알렉산드르 2세와 함께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식사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만찬에 초대받은 알렉산드르 2세는 평소 즐겨 마시던 샴페인을 빠뜨릴 수 없었다. 제정러시아 시절 러시아 황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당시 최고의 문화 선진국인 프랑스의 영향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황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프랑스어가 통용되고, 외교 문서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될 정도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고급술이 없었던 러시아에 프랑스의 술이 공급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탓에 알렉산드르 2세가 만찬에 샴페인을 준비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샴페인 특유의 무겁고 속이 거의 보이지 않는 짙은 초록색의 병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샴페인 병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해 소형 폭탄을 장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프랑스의 유명 샴페인 회사인 루이 뢰드르(Louis Roederer) 사에 속을 훤히 볼 수 있는 투명한 샴페인 병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루이 뢰드르 사는 즉시 플랑드르의 유리 제조 장인에 의뢰해 병 밑이 편평하면서 병 전체가 투명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샴페인 병을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병에 자사의 최고급 샴페인으로 속을 채웠다. 이때부터 이 샴페인은 투명한 병의 모습을 따 크리스털로 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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