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는 카탈루냐 대표팀
언어가 다르니 문화도 다르다. 1990년대 후반에는 카탈루냐 주지사의 공식 명칭을 ‘주정부 수반’으로 하느냐 ‘국가원수’로 하느냐를 두고 주민투표를 벌였을 정도다. 1998년 이 지역 카탈루냐·갈리시아·바스크족은 “스페인의 국가형태를 미국식 합중국(合衆國)으로 바꾸자”는 선언도 했다. 2006년 6월에는 카탈루냐 지방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스페인 내전 당시 바르셀로나 인근에서만 100만명 이상의 카탈루냐인이 희생됐다. 카탈루냐 주기(州旗)는 노란색 바탕에 붉은 횡선 다섯 줄이 있는 모습인데, 카탈루냐인 중에는 이것이 스페인과 전쟁 중 부상당한 사령관이 죽어가면서 당시 입고 있던 노란 셔츠 위로 피 묻은 다섯 손가락을 문지른 흔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중세의 아라곤 왕국이었던 카탈루냐는 현대사에서도 마드리드와 대립했다. 스페인 내전(1936~39) 당시 마드리드는 국민파의 본거지였고 바르셀로나는 공화파의 보루였다. 공화파로 참전해 목 관통상을 당한 조지 오웰이 공화파 내부의 권력투쟁과 부패를 고발한 ‘카탈루냐 찬가(1938)’를 탈고한 곳도 바르셀로나다.
바르샤는 프로팀이지만 스스로도 ‘카탈루냐 대표팀’이라 여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호남의 대부호 백명곤(白命坤)이 불교청년회 축구단을 중심으로 확대 창단한 조선축구단(1926~35) 얘기다. 조선축구단은 조선팔도에 흩어져 있던 당대 최고 선수들을 불러 모아, 월급제를 시행해 선수들이 오직 축구에만 전념하도록 배려했던 일종의 프로팀이다. 조선축구단은 국내 대회뿐 아니라 일본, 중국 만주, 상하이, 톈진 등에서 해외원정 경기에도 참가했다.
1920~30년대의 교통 및 경제사정을 생각하면, 조선축구단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매년 세계일주 순회경기를 벌인 것과 같다. 조선축구단은 영어 공식 명칭을 ‘Korean F.C.’로 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활용했다. 경기복 가슴에 새겨진 팀 명칭도 물론 ‘Korea’였다. 드러내 말하기 어려운 이 단어를 어떻게 하면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었을까, 몇날 며칠 고민한 결과였으리라.
최근 바르샤의 성취를 두고 카탈루냐 사람들은 “역사에서는 패배했지만 축구에서는 우리가 승자다”라고 말한다. 바르샤 팀 구호는 “Mas que un club”, 즉 “클럽 그 이상이 되자”다. 바르샤 입장에서 보면, 스페인 주류 사회를 대표하는 명문구단 레알 마드리드와의 일전에서는 절대로 지면 안 된다. 레알 마드리드 입장도 마찬가지다.
바르샤와 레알 마드리드
이 두 구단이 민족적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어떻게든 상대를 꺾어야 한다”는 의지가 기묘한 형태로 드러났다. 두 팀 다 경영 성과나 예산 등과 상관없이 세계 최고의 선수를 끌어오려고 노력한 것. 양 구단은 ‘국가대표 축구팀’이라는 큰 틀에서는 상호 협력하지만 지역 특성(local identity)은 오히려 강화했다. 대표팀 내 반목과 질시를 거두고, 보다 더 큰 차원의 성취를 위해 힘을 모은 것.
잠깐 옆길로 새자면, 스페인의 지역화합에 대한민국도 기여한 바가 있다. 스페인 공주의 남편은 카탈루냐 사람인데, 둘이 처음 만나 사랑을 키운 곳이 바로 우리나라 잠실 경기장이다. 1988 서울올림픽 당시 스페인 공주는 승마 대표선수였고 신랑은 핸드볼 대표선수였다. 선수촌에서 꽃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던 사마란치의 고향도 바르셀로나다.
다시 2011년으로 돌아가자. 축구평론가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2011년 바르샤는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이라고 평가한다. 축구사(史)의 맥락에서 살피면, 바르샤의 최근 공연(公演)은 토털사커의 완성판이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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