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호

바르샤 질주 누가 막겠나?

완벽한 토털사커에 천재 메시까지

  • 장원재│대한축구협회 기획자문위원 drjang12@gmail.com

    입력2011-06-22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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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 질주 누가 막겠나?
    5월28일 오후(현지시각)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 ~11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이하 챔스리그)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샤)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를 3대1로 꺾고 우승했다.

    유럽 각국의 정상급 클럽만이 출전할 수 있는 챔스리그는 꿈의 경연으로 불린다. 챔스리그 결승전은 사실상 올해의 세계 최강 클럽을 가리는 경기다. 역대 결승전은 늘 박빙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바르샤가 맨유를 ‘압도(壓倒)’했다. 유럽의 축구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바르샤의 축구레슨’이라 불렀다. 어느 정도였냐고? 통계를 보자. 바르샤 대 맨유의 볼 점유율은 63% 대 37%, 패스 성공률은 86% 대 72%, 슈팅 수 19개 대 3개, 유효 슈팅수 12개 대 1개. 그나마 맨유의 유일한 유효슈팅(루니의 동점골)은 엄밀히 말해 오프사이드였다.

    패스 시도횟수도 비교가 안 된다. 바르샤는 772회 중 667회 성공, 맨유는 419회 시도에 301회 성공이다. 대학팀이 중학팀을 상대로 플레이해도 이 정도 기록은 쉽지 않다. 문제는 일방적으로 당한 상대가 프리미어리그 지존인 맨유라는 사실. 도대체 얼마만큼 연습하면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있는 걸까?

    맨유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



    스페인 축구 대표팀은 그간 기량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았다. 물론 유로2008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2010 남아공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유로선수권 우승은 44년 만이었고, 이전 월드컵에서는 늘 8강 문턱에서 좌초했다.

    하지만 프로 구단은 좋은 성적을 냈다. 매년 열리는 유럽 각국 프로팀 경쟁에서 스페인 구단은 압도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샤가 들어올린 우승컵만 헤아려도 다른 유럽 국가의 우승 횟수를 넘어선다.

    이 ‘알다가도 모를 일’의 비밀은 민족주의, 아니 배타적 민족주의에 기초한 지역감정에 있다. 스페인은 다민족 국가다. 표준 스페인어인 카스티야어 외에도 포르투갈 국경 북쪽의 갈리시아족,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접경지대의 바스크족, 스페인 남부와 프랑스 접경지대의 카탈루냐족이 쓰는 언어가 모두 다르다. 스페인 정부는 이들 4개 언어를 모두 공용어로 인정한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방은 소수민족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이 때문에 카탈루냐 지방정부는 “카탈루냐 지역에서 상영되는 방송·외국 영화의 50% 이상이 카탈루냐어로 방송돼야 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카탈루냐어 역시 스페인어처럼 고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학자들은 카탈루냐어가 스페인어보다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사투리에 더 가깝다고 분석한다.

    바르샤는 카탈루냐 대표팀

    언어가 다르니 문화도 다르다. 1990년대 후반에는 카탈루냐 주지사의 공식 명칭을 ‘주정부 수반’으로 하느냐 ‘국가원수’로 하느냐를 두고 주민투표를 벌였을 정도다. 1998년 이 지역 카탈루냐·갈리시아·바스크족은 “스페인의 국가형태를 미국식 합중국(合衆國)으로 바꾸자”는 선언도 했다. 2006년 6월에는 카탈루냐 지방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스페인 내전 당시 바르셀로나 인근에서만 100만명 이상의 카탈루냐인이 희생됐다. 카탈루냐 주기(州旗)는 노란색 바탕에 붉은 횡선 다섯 줄이 있는 모습인데, 카탈루냐인 중에는 이것이 스페인과 전쟁 중 부상당한 사령관이 죽어가면서 당시 입고 있던 노란 셔츠 위로 피 묻은 다섯 손가락을 문지른 흔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중세의 아라곤 왕국이었던 카탈루냐는 현대사에서도 마드리드와 대립했다. 스페인 내전(1936~39) 당시 마드리드는 국민파의 본거지였고 바르셀로나는 공화파의 보루였다. 공화파로 참전해 목 관통상을 당한 조지 오웰이 공화파 내부의 권력투쟁과 부패를 고발한 ‘카탈루냐 찬가(1938)’를 탈고한 곳도 바르셀로나다.

    바르샤는 프로팀이지만 스스로도 ‘카탈루냐 대표팀’이라 여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호남의 대부호 백명곤(白命坤)이 불교청년회 축구단을 중심으로 확대 창단한 조선축구단(1926~35) 얘기다. 조선축구단은 조선팔도에 흩어져 있던 당대 최고 선수들을 불러 모아, 월급제를 시행해 선수들이 오직 축구에만 전념하도록 배려했던 일종의 프로팀이다. 조선축구단은 국내 대회뿐 아니라 일본, 중국 만주, 상하이, 톈진 등에서 해외원정 경기에도 참가했다.

    1920~30년대의 교통 및 경제사정을 생각하면, 조선축구단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매년 세계일주 순회경기를 벌인 것과 같다. 조선축구단은 영어 공식 명칭을 ‘Korean F.C.’로 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활용했다. 경기복 가슴에 새겨진 팀 명칭도 물론 ‘Korea’였다. 드러내 말하기 어려운 이 단어를 어떻게 하면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었을까, 몇날 며칠 고민한 결과였으리라.

    최근 바르샤의 성취를 두고 카탈루냐 사람들은 “역사에서는 패배했지만 축구에서는 우리가 승자다”라고 말한다. 바르샤 팀 구호는 “Mas que un club”, 즉 “클럽 그 이상이 되자”다. 바르샤 입장에서 보면, 스페인 주류 사회를 대표하는 명문구단 레알 마드리드와의 일전에서는 절대로 지면 안 된다. 레알 마드리드 입장도 마찬가지다.

    바르샤와 레알 마드리드

    이 두 구단이 민족적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어떻게든 상대를 꺾어야 한다”는 의지가 기묘한 형태로 드러났다. 두 팀 다 경영 성과나 예산 등과 상관없이 세계 최고의 선수를 끌어오려고 노력한 것. 양 구단은 ‘국가대표 축구팀’이라는 큰 틀에서는 상호 협력하지만 지역 특성(local identity)은 오히려 강화했다. 대표팀 내 반목과 질시를 거두고, 보다 더 큰 차원의 성취를 위해 힘을 모은 것.

    잠깐 옆길로 새자면, 스페인의 지역화합에 대한민국도 기여한 바가 있다. 스페인 공주의 남편은 카탈루냐 사람인데, 둘이 처음 만나 사랑을 키운 곳이 바로 우리나라 잠실 경기장이다. 1988 서울올림픽 당시 스페인 공주는 승마 대표선수였고 신랑은 핸드볼 대표선수였다. 선수촌에서 꽃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던 사마란치의 고향도 바르셀로나다.

    다시 2011년으로 돌아가자. 축구평론가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2011년 바르샤는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이라고 평가한다. 축구사(史)의 맥락에서 살피면, 바르샤의 최근 공연(公演)은 토털사커의 완성판이라고 부를 만하다.

    축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토털사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선수 각자가 자기 포지션을 지키며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과 수비 구분 없이 전원이 공격하고 전원이 수비하는 획기적인 전술이다. 네덜란드는 이 혁명적 기술을 들고 1974년 월드컵에 입성해 압도적인 화력으로 상대를 초토화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홈팀 서독에 1대2로 물러섰다. 4년 후 월드컵에서는 역시 결승전에서 홈팀 아르헨티나에 연장전 끝에 1대3으로 패한다. 후반 종료 직전 스코어는 1대1. 네덜란드의 마지막 슛이 아르헨티나 골문 오른쪽을 맞고 원바운드로 튕겨져 나온다. 이 공이 각도를 조금만 달리했다면 이후 세계 축구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왜 토털사커는 ‘축구의 개념 자체를 바꾸는 획기적인 전술’로 불리는가. 토털사커 이전 축구는 선수 개개인에게 포지션을 부여하고 일정한 구역을 할당해,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맡은 지역을 벗어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수비수는 절대로 하프라인을 넘어서는 안 되고 오른쪽 공격수는 경기장 왼편으로 이동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러한 기본개념 뒤에는 분업을 통해 능률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각자의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하고 개인의 체력소모를 극소화해 팀 전체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아이디어다.

    바르샤는 토털사커 완결판

    이러한 구도하에는 경기 중간 중간 특정 선수에게 과도한 부담이 지워진다. ‘공이 안 오는’ 곳을 맡은 몇몇 선수는 개점휴업 상태로 있기도 한다. 이러한 자원(선수들의 에너지) 배분의 왜곡은 분명 중요한 문제였지만, 부분적인 모순이 있더라도 90분 전체를 기준으로 하면 여전히 실(失)보다 득(得)이 많다는 것이 세계 축구계의 결론이었다. 따라서 세계 축구는 “기본 뼈대는 그대로 두고 선수들의 포진을 바꾸는 미세조정을 통해 개혁과 개선을 추구하자”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포지션에 구애하지 않는 ‘리베로’를 도입하거나 최후방 수비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최전방까지 밀고 올라가는 ‘윙백’을 만든 것.

    그러나 토털사커는 기습에 약하다. 어렵게 골을 넣었지만 쉽게 실점하면 관중이나 선수나 맥이 빠진다. 복싱으로 치자면 12회전 내내 가드를 내리고 경기하는 것과 같다. 19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예멘계 영국인 세계 챔피언 프린스 나삼 하메드가 실제 이런 스타일을 선보인 적이 있다. 가드를 올리는 데 쓰는 에너지를 아껴 상대를 공격하는 데 쓰는 것. 이 전략의 핵심은 결정타를 허용하지 않는 빠른 스텝과 보디워크다.

    문제는 천재적인 눈과 발, 허리를 가졌던 하메드도 가벼운 펀치에 다운되는 경우가 잦았다는 사실. 복싱에서는 다운을 당하더라도 상대를 KO시키면 그 순간에 경기가 끝난다. 사소한 실수를 단번에 만회할 수 있다. 하지만 축구는 다르다. 어렵게 넣은 골이건 자책골이건 모두 한 골이다. 승부를 단번에 마무리 짓는 방책 따위는 애당초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약점을 상쇄하기 위한 바르샤의 보완책은 무엇인가.

    축구에서 스피드는 절대적이지 않다

    1974년 월드컵 네덜란드팀 주장 요한 크루이프는 1974년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바르샤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바르샤 감독으로 부임해 토털사커의 기반을 다졌다. 현역 시절의 별명은 ‘축구장의 피타고라스’. 깡마른 체구의 크루이프는 정말로 수학자처럼 움직이며 새로운 공간개념을 열었다. “나는 체력이나 스피드 면에서는 일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일류가 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정확한 볼 컨트롤,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읽어내고 한 발 앞서 움직이며 위치를 선점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축구에서 스피드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임을 증명했다. 상대보다 반 발짝만 앞서 원하는 위치에 도달한다면 속도는 상관없었다.

    토털사커는 순간적으로 특정 장소에 병력을 집중해 상대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는 전략이다. 공이 ‘위수(衛戍)지역’을 벗어나는 경우에 대비해 선수 개개인의 이동능력을 극대화하고, 상대보다 공의 예상 진행공간을 먼저 차지해 공격기회를 이어가거나 위기상황을 타파하는 것이 핵심 아이디어다. 이를 위해 선수의 체력을 끌어올리고, 장기간 반복훈련을 통해 팀 전체가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팀워크를 다져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도 2011년 바르샤는 축구사의 새 장을 열었다. 먼저 체력과 조직력.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을 비롯해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등 주전 선수 8명이 바르샤 유소년팀 출신이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선수로 활약한 로컬보이.

    메시 “절대 바르샤 안 떠난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메시는 13세 때 유소년팀에 뽑혔다. 당시 바르샤는 신장이 136㎝에 불과한 이 아르헨티나 소년과의 계약을 망설였다. 초조해하는 메시와 메시의 부모에게 당시 유소년팀 감독이 “내가 책임지고 경영진을 설득하겠다”며 점심을 먹다말고 냅킨 위에 계약서를 쓴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바르샤는 이후 엄청난 금액을 투자해 메시에게 매일 성장 호르몬 주사를 투여하는 등 그를 보살폈다. 지금의 ‘축구 영웅’ 메시를 키운 건 8할이 바르샤다. 메시가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바르샤를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공언하는 건 이유가 있다.

    이것이 바로 과르디올라 감독이 “우리는 똑같은 DNA를 지닌 진정한 하나의 팀”이라고 자부하는 이유다. 세계의 유명 스타를 엄청난 몸값에 모셔와 급조한 팀과는 근본이 다르다. 바르샤는 ‘완성된 부품을 모아 조립해 팀을 만드는 구단’이 아니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바르샤 특유의 축구철학을 구현할 전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바르샤는 11개 유소년팀에 연간 1500만유로(약 231억원)를 투자한다. 스페인에만 25명의 스카우트 담당자를 투입해 ‘유망주’를 모은다. 조안 라포르타 전 바르샤 회장은 인터뷰를 통해 “우리의 축구 철학은 크루이프 감독에게서 온다”며 “크루이프가 지휘한 ‘드림팀’의 플레이 스타일을 유소년 시절부터 가르친다”고 밝혔다.

    팀이 유럽 정상권에서 활약하던 1993년, 크루이프 감독은 돌연 사표를 던졌다. “이 시스템으로는 내가 구상하는 축구를 구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 바르샤는 ‘유소년 육성’이라는 먼 길을 돌아 차근차근 정상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어린 선수들의 체력과 전술이해력을 ‘토털사커’라는 전술에 맞춰 수년간 훈련하고, ‘아직까지는 인류가 고안한 최고 수준의 축구전술’을 구현할 시설과 노하우를 완성한다는 것. 그것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그래서 이번 성공이 더욱 빛난다.

    선수 때부터 크루이프 감독의 수제자로 꼽혔던 과르디올라 감독이 동원한 전술은 크게 두 가지다. 상대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바깥, 말하자면 최전방부터 압박을 펼쳐 볼을 가둔다. 상대 진영부터 압박하려면 엄청난 체력 소모를 각오해야 한다. 그만큼 바르샤 선수단 개개인의 체력과 테크닉이 정점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이 작전에 말려, 챔스리그 상대 가운데 하나였던 아스널은 아예 단 한 차례의 슈팅도 시도하지 못했다.

    누구든 공 보낼 곳이 여덟 곳은 있다

    두 번째는 끊임없는 패스로 공의 소유권을 잃지 않으면서 상대의 빈틈이 생기면 귀신처럼 파고들어가는 ‘패스 축구’다. 매 순간 모든 공간에서 돌발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축구의 속성이므로, 포지션에 구애하지 않고 그때그때 탄력적으로 대처하는 것.

    유기적이고 빠른 패스를 끊임없이 이어가면서 팀 전체가 움직이며 전진하는 바르샤의 전술은, 에너지를 아끼고 상대의 체력소모를 극대화한다. 상대편 선수들은 언제 어디서 공을 갖더라도, 바르샤가 늘 수적 우위를 점한다는 놀라운 사실에 경악한다. 볼을 소유하는 경우 통상 전진패스나 횡패스가 가능한 지점은 하나 정도고 그 밖에는 백패스나 드리블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르샤는 언제 어디서 누가 공을 잡더라도 공을 보낼 수 있는 선택지가 여덟을 넘는다. 이 때문에 상대 선수들은 쉽게 지쳐버린다.

    이 경우 상대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둘이다. 위험지역을 머릿수로 커버하는 극단적인 수비전술과 태클 혹은 몸싸움으로 공을 빼앗아 오는 것. 그러나 천재 메시의 존재는 이 두 가지 방안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메시는 백스윙 없이도 강한 슛을 날릴 수 있고 무게중심을 낮추며 좁은 공간에서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정규전으로 붙어도 우세한데, 메시의 존재가 더해지니 바르샤는 온갖 종류의 기습공격, 매복, 전격전에서도 이길 수밖에 없다.

    통상적인 수비방법으로는 바르샤를 막을 길이 없다. 당분간 바르샤의 시대가 이어지리라 예측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게다가 다른 구단이 유소년 시스템을 통해 근본적인 개혁에 성공하더라도 최소한 몇 년의 시간은 필요할 테니. 오오 바르셀로나, 비바(Viva) 카탈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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