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원폭2세환우회 한정순 회장.
1970년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 시민단체들이 지역별로 피폭자들의 도일 이유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와 전라도 출신자의 절반 이상은 징용 징병 등 일제의 강제징집을 원인으로 꼽았다. 반면 경상도 출신 가운데는 ‘생계 때문’이라고 답한 이가 많았다. 특히 합천의 경우 이렇게 응답한 비율이 95%에 달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판 ‘경상남도 통계연보’를 보면 왜 합천에 유독 생계형 도일자가 많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합천에 사는 조선인의 84.6%는 농사를 지었다. 농가 1호당 평균경작 면적은 2670평(약 8826㎡)으로, 같은 시기 조선의 평균치 4410평(약 1만4578㎡)과 비교해 턱없이 작았다. 일제 말기 본격적인 농작물 수탈이 시작됐을 때 영세농은 버티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벼랑 끝에 몰린 합천 농민들이 찾은 곳이 히로시마였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 거점이던 그곳엔 번성한 군수산업 덕에 일자리가 많았다. 이내 조선인, 그중에서도 합천 주민들의 집단 거주촌이 생겼다.
진 사무국장의 어머니 역시 부모 형제가 모여 살다 한꺼번에 피해를 보았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큰언니 역시 시체도 찾지 못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어머니가 남은 자식들을 데리고 합천으로 돌아와 홀로 키웠다.
“그래서 속사정 아는 사람들은 합천을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러요. 마치 이 땅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마을 어디를 가든 피폭에 얽힌 사연을 쉽게 만날 수 있거든요.”
진 사무국장은 한 회장과 함께 그중 한 가정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저거 두고 어떻게 눈 감을꼬…”
합천군 초계면 박달순(84)씨 댁. 나직한 슬레이트지붕 집 앞에 다다르자 지팡이를 짚은 중늙은이 한 명이 대문으로 터벅터벅 들어가는 게 보였다.
“문택주씨, 문택주씨!”
한 회장이 차창을 내리고 목청껏 부르는데, 꽤 가까운 거리임에도 걷는 속도에 변화가 없다. 진 사무국장이 등 뒤까지 다가가 ‘문택주씨!’ 소리치고서야 비로소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누군교?” 돌아보는 시선이 텅 비어 있다.
택주(59)씨는 이 집 큰아들이다. 정신지체에 시각장애, 청각장애까지 가졌다. 나이 들면서 조금씩 다리 근육이 뻣뻣해져 이젠 걸음마저 불편하다. 왜 몸 곳곳이 말썽을 부리는지는 병원에서도 알지 못한다. 9년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택주씨 아버지는 젊은 시절 히로시마로 징용 갔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왔다.
“문둥병 환자가 돼서 안 왔습니까. 몸이 헌 데가 많아 보지도 못해요. 물이 찔긋찔긋 나고 다리가 오그라들고…. 내가 거짓말은 안 하니요.”
박씨는 원자폭탄 열기에 전신화상을 입어 진물이 줄줄 흐르던 남편을 ‘문둥병 환자’라고 했다. 듣는 사람이 차마 못 믿을 것 같은지 몇 번이나 ‘내가 거짓말은 안 하니요’를 덧붙인다. ‘그 꼴을 하고’ 일본서 돌아온 날부터 남편은 한 번도 제 힘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
“잘 걷지도 못하고 눈도 실실 안 뵈는데 뭘 했겠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