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야당은 물론이고 청와대와 여당 역시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선 공감한다. 다만 개혁의 방법과 범위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다.
야당은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국정원 개혁의 심각성을 확인한 후 국회가 주도적으로 국정원 개혁 방안을 처리하기를 원하고 있다. 물론 야당의 노림수는 온 국민의 관심을 끈 가운데 정부에 상처를 주고 정국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것이다.
야당의 국정원 해체요리법
민주당과 야권이 주장하는 국정원 개혁 방안은 국가정보원의 명칭을 ‘통일해외정보원’으로 변경하고 국내파트를 폐지해 정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것이다. 야권은 9월 2일 현재 국정원 개혁과 관련해 총 8개의 법안을 국회 정보위원회에 발의했다. 한편 새누리당은 국정원 스스로 개혁안을 마련해 오면 국회에서 그 내용을 심사하고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개혁 방안은 △국내파트 폐지 및 국내정보 수집기능 폐지 △수사권 폐지 △기획조정권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이관 △국회 통제권 강화로 요약된다. 이 중 핵심 쟁점은 ‘국내파트 폐지 및 국내정보 수집기능 폐지’다.
국가정보원법 제3조 1항에 따르면 국정원은 ‘국외정보 및 국내보안정보(대공, 대정부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의 수집, 작성 및 배포’ 권한을 갖고 있다. 정부조직법과 국가안전보장회의법에도 국가정보원의 국내외 정보수집 권한이 명시되어 있다.
민주당은 국정원의 정치 개입을 원천차단하기 위해서는 국정원 직원이 국가기관이나 정치인, 언론사,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동향 파악에 나서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이 이렇게 주장하는 첫 번째 근거는 미국과 영국 등이 해외정보와 국내정보를 각기 다른 기관이 담당케 하는 분리형 정보기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해외정보 업무는 CIA, 국내 보안과 방첩은 FBI로 크게 양분돼 있다. 영국의 경우 해외정보는 MI6라고 불리는 외무부 소속의 SIS가, 국내 방첩은 MI5로 불리는 내무부 소속 SS가 맡는다. 프랑스는 국방부 소속 대외보안총국(DGSE)과 내무부 소속 국토감찰국(DST)으로, 독일은 연방총리실 소속 연방정보부(BND)와 연방내무부 소속 연방헌법보호청(BfV)으로, 이스라엘은 모사드(Mossad)와 신베드(Shin Beth)로, 일본은 내각조사실과 공안조사청으로 해외정보 업무와 국내정보 업무가 분리돼 있다.
국정원 국내파트 폐지에 대해서 새누리당은 반대 입장이다.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한 잘못은 바로잡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국정원의 본래 기능을 훼손하고 종북세력의 반국가적 행위를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사이버 선동을 통해 대정부 불신과 국론 분열을 조장하고, 궁극적으로 전복을 기도하는 상황에서 국정원의 국내파트 축소 또는 폐지는 위험한 발상이며 오히려 사이버 공격과 정보전에 대비하는 분야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국정원 댓글 사건 또한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 대응하기 위한 정상적인 활동인데도 이를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야권을 비판한다.
야권은 국정원의 수사권도 검찰과 경찰에 이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안정국 조성과 같은 정치 개입을 차단하고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려면 국정원으로부터 수사권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보안과 밀행을 속성으로 하는 정보기관이 정보수집권과 함께 수사권까지 가지면서 수사 전반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하고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간 국정원에 의해 저질러진 각종 조작 사건과 정치 개입, 인권 유린은 국정원이 가진 수사권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외국의 경우를 봐도 미국의 CIA, 영국의 MI6, 독일 BND, 이스라엘 모사드 등은 수사권을 갖고 있지 않다. 독일 연방정보부 역시 정보기관으로 수사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해외정보 수집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에서 날고 기는데…
반면 새누리당은 국정원의 수사권이 없었다면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야권의 국정원 국내파트 폐지와 수사권 분리 주장은 국가보안법 폐지 의도를 담고 있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국정원의 국내파트 폐지와 관련한 논란이 뜨겁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국내보안 정보 수집권을 폐지하고 정보수집 범위를 대북 및 국외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제는 국내보안 정보와 대북 및 국외 정보가 명백히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보 개념이 군사안보뿐 아니라 경제안보, 생태안보, 사회안보로 확대되는 현실을 볼 때 국내 정보, 대북 정보, 해외 정보를 분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새로운 안보 위협 요소로 등장하는 테러, 마약범죄, 국제범죄는 국경을 넘나든다. 글로벌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가 밀접하게 얽혀 있고, 국경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이 뒤섞이는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해외정보와 국내정보를 구분해 정보기관을 분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해외정보 파트와 국내정보 파트를 구분해 정보기관을 운영할 경우 업무 효율성과 조직 관리의 측면에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이들 조직 간의 유기적 협조가 어려워진다.
반면 양 파트를 분리하면 조직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고 조직 간 경쟁 유발로 양질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으며 정보 독점과 오용(誤用)으로 인한 폐해를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경로 의존성’과 고정관념이 더 문제
국정원 개혁은 불가피한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 개혁의 방법과 범위는 여야의 주장을 넘어 사회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은 국정원 개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우선 국정원 개혁이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쟁(政爭) 수단으로 다뤄지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는다. 국민의 정치혐오증만 키우면서 여야 모두 패배하는 게임으로 끝날 것이다. 여론은 국정원 개혁 문제가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순수한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모든 제도는 ‘경로 의존성’을 갖고 있다. 경로 의존성은 ‘개혁을 해도 과거의 습성, 행태,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다’는 뜻이다. 정보기관의 폐해는 수십 년간 이어져왔다. 국민의 고정관념 속에 국정원은 안보의 보루라기보다는 감시와 고문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대부분이 과거 정권하에서 자행된 것이긴 하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고정관념이 별로 바뀌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비단 국정원 댓글 사건뿐 아니라 불법사찰, 불법도청 등 국정원의 정치 개입 문제는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꾸준히 계속돼왔다.
‘경로 의존성’을 고려할 때 국정원 개혁은 보다 철저하게, 전면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 현행 ‘국가정보원법’에도 국정원의 국내파트는 ‘간첩 및 기타 반국가활동 세력과 그 추종 분자의 국가에 대한 위해 행위로부터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취급되는 정보’만을 수집하도록 돼 있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사회각계 전반을 감시하고 사찰해왔다. 이러한 업무 습성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해외정보 파트와 국내정보 파트를 제도적으로 분리하는 것과 관련해 현실적 어려움과 논리적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경로 의존성의 극복과 고정관념의 개선이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