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병제를 채택한 한국에서 국방 의무는 말 그대로 의무일 뿐이다.
- 의무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나 교육 없이 의무의 공평성에 대한 논의만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군복무를 시간 때우기, 또는 피할 수 없는 시간 낭비로만 인식한다.
- 잇따른 군 사고의 해결책은 참군인의 정체성 확립일지 모른다.
8월 8일 육군 30기계화보병사단 장병들이 특별인권교육을 받았다.
요즘 아내가 내게 진지하게 얘기한다. 고등학생인 두 아들이 ‘군대에 가면 별 이상한 일들을 당한다’는 갖가지 소문을 얘기하면서 군대에 가기 싫다고 얘기할 때마다, 아내와 나는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당연한 국방의 의무는 절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고 타일렀다. 군대에 가서 생각보다 배우는 것도 많다고 얘기해줬다. 얼마 전 군대에 간 조카가 휴가 나왔을 때 보여준, 훨씬 늠름해진 모습을 보고 더욱 확신에 차서 아들들을 설득해왔다.
하지만 최근 뉴스에서 접하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군대 관련 사건들을 보면, ‘이건 아니지’ 싶다. 아들들이 얘기한 그 이상한 소문들이 그냥 근거 없는 루머이고, 군대를 안 가려고 하는 것이 잘못되고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꾸짖을 명분도 없다. 아마 우리 부부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아들을 키우는 모든 부모는 똑같이 난처해졌다. 아니, 난처해진 게 아니라 솔직히 겁난다.
한국 군대의 특수성
지금 한국 사회는 완전히 ‘멘붕’에 빠져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느냐는 논란과 병영문화혁신 같은 향후 대책에 대한 여러 논의가 진행 중이다. 총기난사, 폭력, 성희롱, 자살 등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이 단기간에 연속적으로 일어나서 사람들이 예민해진 탓도 있지만, 폭력행위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서 온 국민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더구나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그동안 다양한 노력을 통해 병영 문화나 환경이 개선돼왔다고 생각했기에 더 허탈해졌다. 그렇다면 왜 그간 이런 노력들이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을까.
군대 내에서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을 단순화하면,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당사자의 개인적 문제로서의 원인, 그리고 누구에게든 상관없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군대, 특히 한국 군대의 특수성과 관련된 원인이다. 현재 한국 사회를 달구는 뜨거운 논의의 초점은 대부분 후자인 환경적 요인에 맞춰졌다. 특히 군대에서 인권을 소홀히 다뤄 이런 사고들이 발생한 듯한 논의와 함께, 매번 내놓는 대책은 군내 병사들의 인권 보호를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과연 군대와 인권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바탕으로 한 건지 의문스럽다. 또한 개인적인 요인과 환경적 요인은 상호작용하며,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다뤄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문제를 단순화한다.
최근의 총기난사와 폭행사망 사건들은 절대 군대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적인 불행이다. 하지만 일어나선 안 된다고 믿는다고 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굳이 군대가 아니더라도 유사한 사건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일어난다. 2012년 서울 여의도에서는 직장 동료들에게 앙심을 품은 청년이 길거리에서 행인들을 흉기로 살해하고 부상을 입힌 ‘묻지 마’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묻지 마’ 범죄가 증가 추세에 있다는 게 엄연한 사실이다.
최근 뉴스를 보면 청소년들이 동년배 학생을 폭행하고, 성매매에 동원하고, 심지어 살해해서 암매장하는 등의 사건이 종종 보도 된다. 사회에서 이런 끔찍한 사건을 일으킬 만한 젊은이들이 징집되기 전에 그런 사고를 치지 않을 경우 때가 되면 군대에 간다. 보통 같은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 중에 군대에 가는 비율은 90% 이상으로 알려졌다.
무한책임, 무한신뢰
그렇다면 군대 복무 기간이건 그 후건 범죄행위나 각종 사고를 일으킬 위험성을 가진 젊은이 대부분이 군대에 복무한다는 얘기가 된다. 사회에 있으면 더 끔찍하고 다양한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군대에서 관리하는 것이고, 그것이 완벽하지 못해 각종 사고가 일어난다고 볼 수도 있다.
군대에서 발생하는 사고 빈도는 오히려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고 빈도보다 낮다. 실제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병사들의 자살률도 같은 또래 일반 자살률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일반 20대 자살률은 약 0.02%인데, 같은 연령대의 병사 자살률은 약 0.01%다. 물론 이런 사고들도 최대한 막아야 하겠지만, 수치상으로만 해석한다면 군대가 이런 사고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사고를 낮추는 환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똑같은 사건이 군대에서 일어나면 관련자들과 일반 국민의 반응은 더 과격하고 극단적이 된다. 유족, 특히 그 부모의 비통함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모습을 종종 언론을 통해 접한다. 이 현상을 자식에 대한 유별난 사랑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일반 사회에서 비슷한 사고나 자살이 발생했을 때 자녀를 잃은 부모나 사회의 반응과는 다소 다르기 때문이다. 그 사건 자체에 특수성이 있다기보다는 군대이기에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이 독특한 것이다. 이런 독특성은 하나가 아닌 여러 복잡한 요인과 연결되고, 그 요인들은 한국 사람의 심리적 특성과 연결된다.
우선 한국에서는 군대에 대한 인식에서 ‘의무’가 지나치게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징병제를 채택한 한국에서 국민의 의무 중 하나가 국방의 의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무가 왜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나 교육 없이 그 의무의 공평성에만 더 집중해왔다. 그러다보니 그 필요성과 가치보다 무조건적인 의무만을 강조했고, 대부분의 젊은이와 심지어 그 부모들은 군복무를 ‘시간 때우기’ 또는 피할 수 없는 무가치한 시간 낭비로만 인식한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서 사소한 의미라도 찾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사건에 적응하는 데 크게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고 의미가 없는 죽음은, 특히 명분을 강조하는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억울한 고통이 된다.
여기에 가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한국인에게 국가로 인해 받은 피해는 억울함뿐 아니라 배신감마저 갖게 한다 ‘군사부 일체’라는 유교적 관념에서 군(君)은 현대사회에서 임금이 아닌 정부를 의미한다. 그래서 정부는 부모와 같이 국민에게 무한책임을 지며, 국민은 정부를 믿고 따르고 싶어 한다. 서구 사람들이 한정된 약속에 근거해 정부를 지지하고 국가 시스템을 신뢰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정부와 국민 간 관계가 마치 가족 간의 무한책임, 무한신뢰여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자녀의 사고와 실패에 대해 아무 잘못도 없는 부모가 자신을 책망하듯이, 책임의 유무나 정도와 상관없이 정부가 군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군대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모와 그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은 억울함과 배신감에 더 분노한다.
실제로 군대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한국 젊은이의 90% 이상이 복무하는 군대에서는 일반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자식을 군대에 보내는 것은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는 줄 알면서도 큰아버지를 믿고 자식을 맡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큰집에 간 아들은 별일 없을 거라고 모두 믿는다. 그래서 한국민에게 군대는 특별하다.
군대는 원래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비상시를 대비한 조직이다. 그런 군대가 일반적으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대비만 하다가 끝난다. 대부분의 군인도 자신이 복무하는 기간에는 전쟁을 겪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군대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효과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군대는 항상 자기모순 속에 산다.
군대의 자기모순
강원 고성군 22사단 일반전방소초(GOP)에서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임모 병장(가운데 총 든 사람)이 7월 8일 현장검증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했다.
배의 바닥이 해안 모래에 닿자마자, 기관총 총알이 쏟아져 부딪히는 바로 그 앞문을 열고 돌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 순간 자신이 죽을 것이 빤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거짓말같이 군인들은 배 앞의 문을 활짝 열고 돌격했다. 실제로 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앞에 있던 군인들은 한 발짝도 내디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만약 이 순간 각 병사 개개인에게 그 돌격 명령의 합리성에 대해 판단할 능력과 기회가 주어진다고 가정해보자. 행여 병사들이 ‘열까 말까, 조금만 기다렸다 열까, 과연 이 명령이 합리적인 것인가, 이게 최선인가?’라고 고민한다면, 과연 전투가 가능하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군대에도 합리적인 명령만을 따르고 부당한 명령에는 따르지 않는다는 교과서적인 지침은 있지만, 현실에서 이는 그냥 허울 좋은 지침일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전시에는 상사의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하며 따르지 않으면 처벌도 가능하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있다.
하지만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어떨까. 훈련할 때는 각 병사가 합리성을 가지고 판단하고, 전시에는 그런 판단을 하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상관의 명령에 이유를 묻지 말고 무조건 따르라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시에는 훈련 때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위험하고 (각 병사가 보기에는 빤히 죽을 것 같은) 비합리적인 명령이 난무할 텐데, 평상시에 경미한 명령을 따르지 않던 병사들이 전시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군대는 병사들이 ‘돌격이나 후퇴’라는 명령을 받으면 상황판단을 하기보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게끔 하기 위해 평상시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반복적인 훈련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유 없이 부당하게, 그것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폭행을 가한다거나 성폭행 성추행과 같은 기본적인 윤리를 벗어나는 (전시에도 전혀 합리화할 수 없는) 명령은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윤리와 상대적으로 관련성이 작은 경우에는, 명령의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매우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각각의 개별적인 명령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군대라는 조직의 본질과 정체성이 기본적으로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상명하복의 위계적 구조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군대다운 군대’에서 민주적, 자율적, 인류 보편적 등의 개념들이 어울리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사냥개로 태어난 개에게 언제 할지도 모르는 사냥에 대비해 맹수처럼 훈련시키는 동시에 평상시에는 애완견으로 살기를 바란다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사냥개에게 얼마나 혼란을 주는 일이겠는가.
윤 일병 사건을 접하면서 많은 사람은 사회에서 멀쩡한 대학생들이 도대체 왜 저랬을까, 하며 궁금해했다. 일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가해자를 제외하고는 동조자나 방관자의 가족과 주변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원래 자신들이 알던 아들, 형제, 친구라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무언가 잘못됐다고 강변할 거다. 이들의 주장은 맞으면서도 틀렸다. 그들은 아들이며 형제와 친구를 군대에 보냈지만, 군대에는 그들의 아들과 형제와 친구가 없다.
군대의 거의 모든 시스템은 병사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누군지를 잊어서 어떤 명령이라도 맹목적으로 따르도록 아주 정교하게 설계돼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군복이다. 모든 병사가 같은 군복을 입고, 군복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이름표 말고는 개인 식별 정보가 없고,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가장 눈에 띄게 붙여놓은 것은 계급장뿐이다. 병사가 자신을 소개할 때도 계급을 먼저 얘기하고 이름을 얘기하는데, 절도 있게 크게 얘기하다보면 계급만 들리지 사실 이름은 알아듣기도 힘들다.
탈개인화 현상
이런 모든 것은 바로 병사들끼리뿐 아니라 스스로도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다. 군인이 아닌 개인으로서 각 병사는 사회경제적 지위도 다르고, 능력도 각기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이런 차이에 대한 인식은 명령보다는 개인적 신념, 소신, 욕구 등을 더 고려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전시에 모든 병사는 똑같이 취급받아야 한다. 누구의 목숨이 더 중요하고 누구의 목숨이 덜 중요하지 않다. 전쟁 중 자신의 가족, 자신의 꿈, 자신의 욕구와 같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인식은 돌격이라는 명령에 스스로를 망설이게 만든다. 왜? 자신은 소중하니까.
하지만 군대에 있는 우리의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대학생이라는 사실도, 누구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앞으로 얼마나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될지도 잊어버린다. 대학생이라는 신분뿐 아니라 사회에서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고 통제해왔던 수많은 신념과 기준도 그들의 머릿속에서 함께 약해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탈개인화(deindividuation) 현상이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약해지면서, 평소에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던 개인적인 신념, 성격, 태도, 윤리적 기준 등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상황의 힘에 휩쓸려 평소 절대 하지 않을 행동도 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절대 다른 사람을 죽일 생각도 없고, 죽이고 싶지도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믿는 사람도, 전쟁에서 적을 죽이기 위해서는 개인으로서가 아닌 그냥 한 사람의 군인으로서가 훨씬 편하다. 이런 탈개인화 현상이 바로 군대가 운영되는 중요한 심리기제 중 하나다.
이런 탈개인화 현상은 집단주의 성향이 있는 한국 사회에서 다소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래도 전 세계의 모든 군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현재 한국 군대에서의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특별히 잘 설명할 수는 없다. 탈개인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우리 군인들을 그렇게 이상하고 폭력적으로 만드는 요인 중 하나로는 오히려 우리 문화의 관계주의를 들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공적인 역할보다는 사적인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호구조사를 한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이 아니라면, 만나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서 만나는 사람이고 그 이유에 따라 이미 서로의 공적인 관계가 결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뭔가 부족한 느낌을 가지고 뭔가 더 알아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태어난 곳에서부터 살던 동네까지, 사촌의 친구의 친구까지 어떻게든 사적인 관계를 찾아야만 진정으로 서로를 알게 되고 통했다는 느낌에 만족하게 된다. 그런 기존의 거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상대방과 자신만의 고유한 연결성을 찾는 데서 한국인은 ‘우리성(weness)’을 경험하며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관계주의적인 한국인에게 군대라는 조직은 여러 면에서 매우 불편한 환경이다. 적어도 2년 동안 가족보다 더 가까이 함께 살면서 공적인 상하관계로 운영되는 사회인 데다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전국에서 모여 개인적인 관계를 찾기 힘든 사람들 간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 있는 사적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철저하게 계급으로 조직화한 공적인 역할관계는 오히려 새롭게 형성하려는 사적관계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개인주의적 서양 사회는 공적인 역할관계의 원칙에 의해 운영된다. 그래서 서구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공적인 자신과 사적인 자신을 분리해 역할 중심의 관계 속에서도 개인적 정체감을 잘 유지할 수 있다. 일본과 같은 전형적인 조직적 집단주의는 군대와 같은 전제 조직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정체감을 잃어버려도 상대적으로 불편하지 않다.
공적관계 속 사적관계
하지만 관계주의적 속성과 강한 주체성을 가진 한국인은 공적인 관계를 강요받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게 되는 군대 환경이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 병사들은 공적인 관계를 초월하는 또 하나의 사적관계를 유기적으로 형성함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계급으로서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을 따르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공적관계로만 절대 만족할 수 없기에, 그 이상의 뭔가를 서로에게 기대하고 그것을 시키고 그것을 따름으로써 뭔가 관계가 형성됐다는 안도감을 갖게 된다.
전쟁에 대비하고 각종 위험한 사고에 노출되고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있다는 불안감은 이러한 사적관계를 통한 마음의 안정을 더 극단적으로 찾게 만드는 것이다.
2013년 10월 1일.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건군 65주년 ‘국군의 날’ 행사의 하나로 군 장병들이 시가행진을 펼쳤다.
얼마 전 환락의 천국이라는 태국 사창가의 한 여성은 전 세계의 남성들이 성매매를 위해 자신들을 찾아오지만, 친구와 동료가 떼를 지어 찾아오는 건 한국 사람들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이런 행태는 조금 과장하면 지금 군대에서 일어나는 모습과 뭐가 다를까 싶다. 군대에서는 서로에게 너무나 이상한 행동을 시키고 너무나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한다. 기존에 만난 적이 없는 두 동물이 처음 만났을 때, 서열을 정하기 위해 으르렁대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이미 서열과 공식적 관계를 부여했는데도 거기에 만족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돼 있을 뿐이다.
군대답지 않은 군대
비극이 반복되고 그 해결책이 수차례 시도됐는데도 변화가 없다면, 문제에 접근하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을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군대에서의 사고를 군대와 인권의 갈등, 비이성과 이성의 대결로 해석한다. 과연 이러한 해석은 타당하고, 그것에 근거한 해결 방법은 효과적일까.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병사들의 인권을 강조하며 각종 대책이 나오지만, 군대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대책들은 군대를 군대답지 않게 만드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서 그 사건이 잊히면, 군대를 군대답게 만들기 위해 그러한 대책들은 없어진다. 원래 군대는 자신이 누군지 잊을 수밖에 없다. 만약 지금의 대책들이 병사 스스로가 누군지를 잊지 않고 자신의 삶의 기준과 판단으로 군대 생활을 하게 한다면, 군대답지 않은 군대가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문제를 개인적 윤리, 자율권, 개인적 인권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 마치 군대 자체가 인권의 적이라는 인식에서, 인권을 세우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군대가 될 거라는 기대는 현실성이 없다.
문제의 본질은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아무 내용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누군인지를 잊고 군인이라는 인식만 남을 때, 그 군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정체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군대는 도망 갈 수 없어서 억지로 가서 시간을 때우는 젊은 날의 억울하고 우울한 시간이라는 인식만 남았다.
이런 현실에서 개인적 인권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면 우리의 군대는 한마디로 진정한 ‘당나라 군대’가 될지도 모른다. 모두 각자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군인을 만들어도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오히려 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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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개인화 현상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개인적 정체감이 약해졌을 때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집단적 정체감에서 오는 규율과 규범(Institutional norm)을 따르게 된다. 연구 결과를 보면 개인적 정체감이 약해지고 의사로서 또는 교사로서의 집단적 정체감이 강해지면, 오히려 더 올바르고 인류애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군대에서 병사들이 더 바른 행동을 하고 지금과 같은 불행한 사건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자율성과 군인으로서의 정체감을 약화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군인의 모습과 행동이 무엇인지를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가를 지키는 명예,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모범이 되는 규칙과 원칙을 지키는 자부심을 확립하는 정체감을 찾아가는 대책이 필요하다. 멀쩡한 대학생이 군대만 가면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는 ‘개’지만 군대만 가면 멀쩡한 군인이 될 수 있는 해결책을 고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