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호

北 ‘우리민족끼리’ 폐기… ‘두 개의 조선’ 전략 가동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9-08-28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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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민족제일주의 용어 안 써… 애국주의·국가주의 강조

    • 김일성민족도 김일성조선으로 바꿔

    • ‘두 개의 조선’ 개념 주민들에게 주입 중

    • 文정부만 ‘민족공조’ 외치는 형국

    • 美가 北 편들고 北이 南 조롱…경험해보지 못한 한미동맹

    • 체제 경쟁 다시 시작…배부른 돼지, 굶주린 늑대 싸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구경조종방사포의 시험 사격을 지도했다고 노동신문이 8월 3일 보도했다.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구경조종방사포의 시험 사격을 지도했다고 노동신문이 8월 3일 보도했다. [노동신문]

    북한의 행태가 도를 넘었다. 한국 정부를 ‘바보’ ‘똥’ ‘횡설수설’ ‘도적’ 같은 막말로 조롱했다. 청와대를 거명하면서 “새벽잠까지 설쳐대며…” “겁먹은 개가 더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것”이라고 했다. 8월 11일 권정근 북한 외무성 미국 담당 국장 담화에서다. 이튿날 청와대에선 “북쪽은 우리와 쓰는 언어가 다르다”면서 “이번 담화문은 한미연합훈련 종료 후 북·미 간 비핵화 실무협상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에 가까운 반응이 나왔다. 

    북한은 한국을 향해 탄도미사일, 신형전술유도무기로 무력시위에 나서고 미국과는 친서외교를 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을 노골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미 지휘소 연습과 관련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편드는 듯한 발언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8월 10일 트위터에 “김정은 위원장이 편지에서 매우 정중하게 한미연합훈련이 끝나는 대로 만나서 협상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밝히면서 “그것은 긴 편지로 대부분이 ‘터무니없고 비싼 훈련’을 불평하는 내용”이라고 적었다

    ‘남조선 당국자’ 비웃는 북한

    트럼프 대통령은 또 “김 위원장은 다른 쪽(한국)이 미국과 함께 하는 ‘워게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도 결코 좋아한 적이 없고, 팬(fan)인 적도 없었다. 거기에 돈을 지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비용을 보상받아야 하며 내가 한국에도 그걸 말했다”고 했다. 

    “똥, 꽃보자기 싼다고 악취 안 나냐”는 조롱이 담긴 권정근의 담화는 한미연합훈련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편든 직후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화경제 실현으로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겠다”고 밝힌 다음 날(8월 6일) 북한은 ‘남조선 당국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단거리탄도미사일을 쏜 후 “남조선이 그렇게도 안보 위협에 시달린다면 차라리 맞을 짓을 하지 않는 게 더 현명한 처사”라고 막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평화 구애(求愛)를 멈추지 않으나 북한의 태도는 시큰둥하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원장은 6월 28일 북한이 내놓은 담화에 2018년부터 이어진 남북관계에 대한 평양의 종합적 평가가 담겼다고 봤다. 

    “북·미관계를 중재하는 듯이 여론화하면서 몸을 올려보려 하는 남조선 당국자들에게도 한마디하고 싶다. 지금 남조선 당국자들은 저들도 한판 끼여 무엇인가 크게 하고 있는 듯한 냄새를 피우면서 제 설 자리를 찾아보려고 북·남 사이에도 여전히 다양한 경로로 그 무슨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듯한 여론을 돌리고 있다. 북·미대화 당사자는 말 그대로 우리와 미국이며 북·미 적대관계의 발생 근원으로 봐도 남조선 당국이 참견할 문제가 전혀 아니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북·미관계는 우리 국무위원회 위원장 동지와 미국 대통령 사이의 친분관계에 기초해나가고 있다. 우리가 미국에 연락할 것이 있으면 북·미 사이에 이미 전부터 가동되는 연락 통로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고 협상을 해도 북·미가 직접 마주 앉아 하게 되는 것인 만큼 남조선 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남조선 당국자들이 지금 북·남 사이에도 그 무슨 교류와 물밑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광고하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 남조선 당국의 제 집의 일이나 똑바로 챙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담화도 권정근 미국 담당 국장 명의로 돼 있다. ‘우리민족끼리’와 ‘민족공조’를 강조하던 북한이 돌변한 것이다.

    국가 담론이 민족 담론 대체

    북한이 ‘우리민족끼리’를 폐기하고 ‘두 개의 조선’ 정책을 가동하고 있다. 민족 담론이 사라진 자리를 국가 담론이 대체했다. 주민들에게도 남북이 서로 다른 나라라는 인식을 강조하면서 국가성의 강화를 시도한다. ‘우리민족제일주의’ ‘조선민족제일주의’가 자취를 감추고 ‘우리국가제일주의’가 통치 담론으로 떠오른 것이다. 

    우리민족제일주의는 김정일이 1986년 처음 내놓았다. ‘민족우월주의론’에 입각한 통치 담론이다.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강조한다. 소련 및 동유럽 붕괴 이후 위기 극복 과정에서는 체제 통합 이데올로기로 사용됐다. 한국의 친북 인사들도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며 호응했다. 

    북한이 7월 11일 공개한 개정 사회주의 헌법 서문에는 김정은 시대의 통치 담론인 ‘우리국가제일주의’가 담겨 있다. 기존 헌법 서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라고 시작하는 반면 개정 헌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국가건설사상과 업적이 구현된 주체의 사회주의 국가이다”라고 돼 있다. ‘조국’이 ‘국가’로 바뀐 것이다. ‘세계에 유일무이한 국가 실체’라는 표현도 새롭게 삽입했다. 

    북한은 1990년대부터 ‘김일성민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는데 최근까지 강조되던 김일성민족은 ‘김일성조선’으로 바뀌었다. ‘김정일애국주의’를 주창하면서 ‘민족’이 아닌 ‘국가’에 곁점을 찍는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의 분석은 이렇다. 

    “우리민족끼리는 껍데기만 남았다. 유일하게 남은 게 대남 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다. 오랫동안 사용해 브랜드 가치가 있으니 남겨둔 것이다. ‘우리민족’ ‘민족공조’ 담론이 사라지고 ‘국산품’ 애용 운동이 벌어지며 ‘국가’ ‘강국’ ‘공민’ 등 국가 담론이 ‘민족’의 자리를 대체했다. 한국을 민족적 관점이 아닌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다른 나라로 여기겠다는 전략으로 선회한 것으로 핵 보유를 뒷배로 제 갈 길 가겠다는 뜻이다. ‘두 개의 조선’ 전략은 남북관계가 북한에 과거와 같은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 코리아(Two Korea)가 쓰나미처럼 온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북한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안보 줄타기를 하는 게 가능해졌다. 과거 북한의 핵전략이 자위용, 미국과 협상용이었다면 현재는 강성국가의 상징으로 확대됐다. 따라서 북핵 문제는 핵 폐기 자체를 넘어 북한 문제 해결과 연동될 수밖에 없게 됐다. 체제 붕괴가 일어나 핵 문제가 자동 해결되거나 핵무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한을 인정해 친미국가가 됨으로써 핵 문제가 내용적으로 해결되는 길 외에는 또렷한 해결 방법이 없다. 친미국가라는 표현은 북한과 미국의 수교를 뜻한다. 김정은이 가장 원하는 모델은 파키스탄 방식이다. 파키스탄은 핵실험을 한 후 제재를 받다가 미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핵도 인정받고 경제적 지원도 받았다.” 

    그는 “투 코리아(Two Korea)가 쓰나미처럼 온다”고 우려했다. 

    “미국이 북핵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북·미관계가 개선되면 완벽한 투 코리아다.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을 다룬 전례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북·미관계 정상화 시 한미동맹은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한국과 북한을 등거리(等距離)로 다루는 모습까지 보인다. 1970년대까지의 체제 경쟁 1라운드는 북한이 앞섰다. 2라운드는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한국이 이겼다. 그때 북한이 무너졌어야 하는데 고난의 행군까지 하면서 다시 살아났다. 현재의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 됐으며 미국이 남북에 양다리를 걸친 듯한 형국인 데다 중국, 러시아가 북한의 뒤를 봐준다. ‘남조선 집권자는 5년마다 바뀌지만 나는 앞으로 50년을 집권한다. 누가 이기는지 최종 라운드에서 보자’는 생각이 김정은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북한이 한국을 ‘요리’하는 국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 30일 경기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 공군기지에서 연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도 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 30일 경기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 공군기지에서 연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도 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뉴시스]

    “어린 시절 뉴욕 브루클린 임대아파트에서 114.13달러(14만 원)의 돈을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 달러(1조2000억 원)를 받는 게 더 쉬웠다.” 

    트럼프 대통령이 8월 9일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열린 재선 캠페인 모금 행사에서 한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는 동시에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서는 ‘머지않아 보기를 원한다”며 호감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김 위원장을 두고 “우리는 친구고 사람들은 그가 나를 볼 때만 미소 짓는다고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친서”를 주고받는 사이다. 

    미국이 북한을 편들고 북한이 한국을 조롱하는 것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다. 북한이 ‘남조선’이 표적이라면서 탄도미사일과 신형전술유도무기를 쏴대는데도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아니면 괜찮다는 시그널을 보내면서 면죄부를 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도 돈으로 보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북한을 어르면서 한국에는 계산서를 들이민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에 한국이 비딱하게 나올 경우 주한미군 주둔 규모와 한미연합훈련 및 안보 공약 축소 등을 이슈로 삼아 한국을 압박하면서 그것으로 북한과 딜(deal)을 할 태세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7년 만에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만들었다. 한미동맹을 이완(弛緩)하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원장은 “나이가 어린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보다 노회하다. 2018년 이후 북한이 한국이라는 재료를 요리하는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민족끼리, 민족공조는 북한이 어려울 때 강조한 것이다.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다. 국가, 애국을 강조하는 것은 남북관계에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6차 핵실험(2017년 9월)과 지난해 6·12 북·미 정상회담, 그로부터 1주일 뒤에 열린 6·19 북·중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 됐다. 한국과 북한의 역학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미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핵 보유를 암묵적으로 인정받은 후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겠다는 게 북한의 전략이다. 체제 경쟁이 다시 시작됐다. 배부른 돼지와 굶주린 늑대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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