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임기 단축 개헌=연성 탄핵
쉽지 않지만 낯설지 않은 개헌론의 역설
이화영 1심 판결이 불러일으킨 헌법 84조 논란
대통령 만들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개헌
[Gettyimage]
개헌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개헌론은 낯설지 않다. 제도권 내에서 개헌에 제일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곳은 조국혁신당이다. 이들은 총선 당시부터 “3년은 길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윤석열 대통령 임기 단축을 전제로 한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주장했다. 이에 더해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의 헌법 전문 수록, ‘수도는 법률로 정한다’는 조항 신설, 검사의 영장신청권 조항 삭제, 사회권 강화 조항 신설, ‘동일 가치 노동, 동일 수준 임금’ 명문화, 토지공개념 강화 등의 추가 내용도 발표했다.
애드벌룬 띄우기式 ‘개헌론’
절반을 훌쩍 넘는 의석을 지닌 더불어민주당은 조국혁신당보다는 신중한 태도다. 지난해 5·18을 하루 앞둔 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고 민주당의 공약이기도 했던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이것을 지킬 때가 됐다”며 “5·18 민주화운동의 헌법 전문 수록을 위한 원포인트 개헌을 반드시 내년 총선에 맞춰서 할 수 있도록 정부·여당이 협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공식적으로 제안드린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선 원포인트 개헌에 크게 힘을 싣지 않았다.현재는 개별 의원들이 ‘대통령 4년 중임제’ 혹은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제한’을 위한 원포인트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애드벌룬을 띄워보는 수준이다. 민주당의 당원중심주의를 적용하면 당장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조국혁신당 주장대로 개헌을 통해서라도 윤 대통령 임기를 단축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재명 대표는 아직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권력구조에 대한 개헌이 이 대표 본인의 사법 리스크와 연동된다는 시각, 이 대표의 재판 스케줄과 대선 일정의 관계가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말을 아끼는 것으로 보인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쌍방울 대북 송금·뇌물 수수 혐의에 대해 1심 재판에서 징역 9년 6월의 중형을 선고받은 이후 이 같은 프레임이 더 강화되고 있다. 이 선고 직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자기 범죄로 재판받던 형사피고인이 대통령이 된 경우, 그 형사재판이 중단되는 걸까요?”라면서 “어떤 학자들은 재판은 중단되지 않는다고 하고, 어떤 학자들은 중단된다고 합니다.(헌법 제84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에서 ‘소추’에 재판이 포함되느냐의 해석 문제겠죠) 지금까지는 현실세계와 거리가 먼 학술적 논의일 뿐이었지만, 거대 야당에서 어떻게든 재판을 지연시켜 형사피고인을 대통령 만들어보려 하는 초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중요한 국가적 이슈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이 대표를 겨냥했다.
결국 이 사법 리스크가 개헌 동력이 될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는 6월 9일자 온라인 칼럼에서 “이 대표는 야권에서 차기 대선 주자 입지를 확고히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선을 2027년에 치르나 2026년에 치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법원의 재판이 끝나기 전에 대선을 치르는 게 유리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잘하면 4년 임기 대통령을 한 번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대표는 앞으로 원내 투쟁과 장외 투쟁을 병행하며 탄핵과 개헌 카드로 윤 대통령을 계속 압박할 것입니다”라고 예측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이 5월 2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 초청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그러면서 나 의원은 “우리가 논의해야 할 개헌은 정쟁이 아닌 미래, 분열이 아닌 국민 통합, 야당의 사욕이 아닌 국가 혁신을 위한 개헌”이라며 “그 핵심은 ‘권력구조 혁신형’ 개헌”이라고 덧붙였다.
임기 단축 개헌은 가능할까
2023년 1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4년 중임제와 결선투표 도입을 뼈대로 한 개헌 필요성을 주장했다. [뉴스1]
성한용 기자는 앞서 인용한 칼럼에서 “윤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지지 않고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자신의 임기 단축을 포함한 개헌입니다. 이 대표와 정치 회담을 통해 4년 중임제 개헌에 합의하고 구체적인 협상은 국회에 맡기면 됩니다. 그 대신 윤 대통령은 남은 2년 동안 노동·교육·연금 개혁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탄핵을 피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라고 밝혔다. 탄핵으로 쫓겨나느니 임기를 1년 줄이고 정쟁적 사안 대신 국정에 전념하라는 이야기다.
성 기자가 언급하진 않았지만 임기 단축 개헌론의 스케줄은 2026년 지방선거 전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고, 차기 대선을 지방선거와 동시에 진행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윤 대통령이 정국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고, 남은 2년을 개혁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없지 않다. 이명박 정부 때 법제처장을 지낸 보수 법조인 이석연 변호사는 언론 기고에서 “개헌을 통해 합헌적으로 윤 대통령의 임기를 1년 단축하고 보장된 임기 내에 무리 없이 국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런 윈-윈 그림이 펼쳐질까? 이 주장이 현실화할 경우를 가정해보자. 윤 대통령은 스스로 자기 임기를 1년 줄이는 것 외에 구체적 개헌 내용은 국회로 넘기게 된다. 개헌 논의는 블랙홀처럼 모든 의제와 이슈를 빨아들이고 ‘구체적 협상’은 거대 야당 의중대로 진행될 것이다. 결국 식물 대통령 신세가 된다. 자진해서 국민의힘을 탈당하거나 혹은 탈당당하게 될 것이고, 이념적·정파적·집단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노동·교육·연금 개혁을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동력(능력과 별개로)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지방선거와 대선의 승자를 예측하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국가백년대계를 생각하면, 개헌 후 향후 4년(혹은 8년)간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현재 개헌 논의가 분출하고 구체적 그림도 그럴듯하게 나오고 있지만, 전에도 그랬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실시 이후 거의 모든 정부가 개헌을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는 내각제 개헌 약속을 축으로 3당 합당을 성사시켰다. DJP연합의 집권도 내각제 개헌이 축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대연정 제안, 권력구조 개편을 골자로 하는 원 포인트 개헌을 제기했다. 이명박 정부는 행정구조 개편을 포함하는 개헌안을 띄웠고, 박근혜 정부 역시 탄핵 위기에 몰린 시점에서 개헌안을 내놓았다. 문재인 정부는 후임자부터 대통령의 권한을 많이 줄이는 개헌안을 발의했다. 집권 후반기 외환위기 직격탄을 맞은 김영삼 정부만이 개헌을 언급하지 못했을 뿐이다. 최근엔 국회의장들도 하나같이 개헌을 주장하면서 의장 직속으로 이런저런 위원회를 꾸렸다.
‘87년 체제’의 산물인 현행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된 것이고 근거도 상당히 많이 축적돼 있다. 진보냐 보수냐는 관점 차이는 있지만 통일 준비 혹은 분단 체제에 걸맞은 영토 조항 정비, 경제민주화 조항 개정, 국민 기본권 정비, 행정부와 의회 관계 재정립, 검찰권과 헌법재판소의 지위 등 여러 사안을 전반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누적돼 있다.
개헌이 성사되기 어려운 구조
이명박 정부 이후로 따져봐도 2009년 국회의장 자문위원회 의견, 2014년 국회의장 자문위원회 조문 시안, 2017년 국회의장 자문위원회 조문 시안, 2018년 문재인 대통령 발의 헌법 개정안, 김진표 국회의장 시절 ‘헌법 개정 및 정치제도 개선 자문위원회’가 만든 조문 시안이 쌓여 있다. 모든 헌법 조문에 대한 대안이 다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권력구조의 경우 최근엔 ‘4년 중임제’가 부각되고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 내각제 등의 선택지가 나와 있다. 그런데 이게 문제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는 광범위하지만 “이렇게 하자”는 공감대는 극히 협소하다. 권력구조의 경우 대권주자나 대선 승리 가능성이 높은 정당은 늘 4년 중임제를 주장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가 강해질 것이라는 비판과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긍정론이 엇갈린다. 입법부 권한 강화가 안전판 격인데 ‘대통령 4년 중임제’는 지금보다 대통령 권한을 더 막강하게 만들고, 여당은 사실상 대통령 재선 선대위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식자층에선 극한 대결 정치를 지양할 수 있는 데다 실력 없는 정권은 단 한시도 권력을 지킬 수 없는 내각제에 대한 선호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국민은 ‘나눠 먹기’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강하다.
개헌과 관련해 거의 모든 중요 사항이 모두 다 이런 식이다. 예컨대 헌법과 대한민국의 권력의 실효 범위에 대해 통일 대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남북분단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동상이몽이긴 하지만 통일을 함께 이야기했던 북한은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남이다’ 식으로 헌법을 싹 뜯어고쳤다. 검사의 영장청구권 삭제 등 야당이 주장하는 ‘사법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또 어떤가.
헌법 전문의 경우 여야가 모두 5·18 민주화운동을 헌법에 담자고 하는데 조국혁신당은 부마항쟁과 6·10도 넣자는 입장이다. ‘촛불혁명’, 동학농민운동, 제주 4·3도 넣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경제 조항의 경우 과도한 규제의 근거가 되는 부분을 손보자는 주장과 사회적 경제, 경제민주화, 토지공개념을 강화하는 등 국가 개입의 문을 더 확대하자는 주장이 엇갈린다.
국회 자문기구를 포함해 전문가들이 이런 쟁점에 대해 ‘안’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국민적 합의 수준에 이른 것은 거의 없다. 중론이 어느 정도 모인다고 해도 개헌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헌안은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나 대통령의 발의→국회의원 재적 3분의 2이상 동의→유권자의 과반 투표, 투표자의 과반 찬성’으로 확정된다.
선거처럼 여러 안 중 다수 안이 채택되는 것이 아니라 유의미한 정치세력이 모두 하나의 안으로 뜻을 모야야 개헌이 성사되는 구조다. 투표율이 50%를 넘지 않아도, 과반 득표를 못 해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는 점과 비교하면 대통령 만들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개헌이다.
1987년 개헌 때처럼 정치권 모든 세력이 합의하고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만 개헌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10여 년 전부터 여론조사를 하면 개헌 찬성 의견은 늘 높게 나온다. 하지만 위에서 짚어본 쟁점을 구성하는 사회 경제적 사안에 대한 여론은 늘 엇갈린다.
야당이 192석을 차지한 의석 분포, 윤석열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감안하면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전면적 개헌이 아니라 권력구조 개편에만 집중한다면 조금 더 쉬울 수도 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 임기 단축과 국회에서 개헌 논의’는 사실상 ‘연성 탄핵’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국민도 ‘4년 중임제’를 원하긴 할까? “윤석열이 싫다”와 “이재명이 좋다”는 다르다. 우리 편이 8년 집권하는 건 좋지만 저쪽 편이 8년 집권하는 건 절대 막아야 할 악몽이지 않을까.
과거 원 포인트 개헌 논의 저지 주동력은 개헌 불가론이 아니었다. “기왕 개헌을 하는 것이라면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폭넓은 논의를 해서 국민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당한 ‘공자님 말씀’의 힘이 컸다. 이번에도 개헌론은 무성하겠지만 개헌이 현실화하기는 쉽지 않은 싱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