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은 눈부신 경제발전의 결과
25∼29세 중위 임금, 현대차 연봉 3분의 1
수출 대기업 성장, ‘뒤처진 사람들’ 양산하다
7월 18일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뉴시스]
동시다발적 극우 포퓰리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 정치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 주요 정당들은 세계화와 정보통신(IT) 기술로 중산층 일자리가 대거 사라지면서 이데올로기, 정책, 지지자 등에서 복합적 위기를 겪고 있다. 이민 확대와 그에 따른 문화적 갈등 심화, EU 등 주권 국가의 범위를 넘어선 거버넌스 권한 강화는 새로운 정치 전선을 만들어냈다.
한국도 이 같은 변화에 예외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몇 해 전부터 지지자 연합 구성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화와 기술 발전에 힘입어 성장한 글로벌 대기업이 만들어내는 고임금 일자리와 나머지 변변치 않은 일자리의 격차는 확대일로다. 수도권과 지방(공간), 부유층·상위 중산층과 나머지(계급), 아파트와 주식(자산)을 통해 균열은 확대 재생산된다. 뒤처진 사람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형 트럼프 또는 한국형 르펜이 머지않아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현대차 성장 수혜 보는 사람들
불평등은 눈부신 경제발전의 결과다. 현대자동차 신입사원이 초봉으로 최대 9400만 원(성과급 포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건 현대차의 성공 덕이다. 현대차는 2000년대 후반부터 제품 고급화, 해외 생산, 전기차·수소연료전지차 등 신기술 개발의 세 방향에서 전사적 역량을 투입했다.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를 만들고 디자인 개선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였다. 미국, 체코에 만들어진 공장은 증설을 거듭했다. 기술력을 갖춘 전기차는 몇 년 전부터 현대차 약진의 원동력 중 하나다.
그렇지만 국내에서 현대차 성장의 수혜를 보는 사람은 예전보다 훨씬 줄었다. 2003년 현대차 직원 5만8500명 가운데 88.3%인 5만1600명이 한국에서 일했다. 2013년 직원 수는 12만3700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는데 국내 직원은 7만3000명으로 1만1400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늘어난 일자리는 고학력·고기능 직종에 집중됐다. 국내 연구개발 부문 인력은 2003년 3800명, 2013년 8700명, 2021년(직군별 국내 직원이 마지막으로 공개된 해) 1만2500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사무직은 같은 기간 1만600명에서 1만2900명으로 찔끔 늘었다. 영업직이나 생산직도 마찬가지다.
정당 내부 균열의 세 요소, 계급·지역·세대
현대차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국내에 공장을 새로 짓지 않았다. 최근 전기차 생산 라인 증설을 발표했지만, 전기차는 내연기관 자동차보다 부품 수가 적고 고용 창출 효과가 떨어진다. 부품 산업 등을 통한 낙수효과도 감퇴했다. 2008년 26만1700명이던 ‘자동차 및 트레일러 제조업’ 종사자는 2015년 36만5800명까지 늘어난 뒤 35만∼36만 명대에서 정체 상태다(차체, 엔진, 부품 포함·사업체 노동 실태 현황 기준).
경제학자들은 소득 불평등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이 기업 간 격차에 있다고 설명한다.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보다 어느 회사에 다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 니콜라스 블룸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1978∼2013년 임금 소득 불평등 가운데 3분의 2는 회사 간 격차가 확대됐기 때문이었다(‘Firming Up Inequality’·2019). 직급이나 직종별 임금 격차는 불평등 확대의 3분의 1만 설명했다.
기업의 평균임금 차이가 벌어졌을 뿐 아니라, 생산성이 높고 임금을 더 많이 받는 근로자들이 극소수 기업에 집중되는 현상도 강해졌다. 한국은행이 2023년 내놓은 보고서(이종하, 오삼일·‘산업 간 임금 격차 확대 분석’)에 따르면 2009∼2021년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동종 산업 내 기업들 임금 격차는 약간 줄었지만, 다른 산업 간 격차는 확대됐다. 산업으로는 IT, 직종으로는 연구개발업에서 임금이 올랐다. 반면 사회복지 서비스업이나 기타 개인 서비스업의 고용 비중이 늘고 임금 수준이 내려갔다.
2022년 25∼29세 근로자의 중위 임금은 월 266만 원, 30∼34세도 315만 원에 불과했다. 월 650만 원 이상 받는 사람의 비율은 각각 2.9%와 7.2%다. 평범한 근로자의 삶과 연 9000만 원을 받는 현대차 직원의 삶은 소득에서 시작해서 자산, 결혼과 육아, 노후 대비 등 생애주기를 밟아가는 과정에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수출 대기업의 성장이 ‘뒤처진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같은 경제 여건 변화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거 한국 사회 변화에 기반한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 연합의 응집력을 약화시켰다. 계층을 넘나드는 포괄정당(캐치올 파티·catch-all party), 광주와 대구로 상징되는 단단한 지역 기반, 일종의 세대 동맹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사회·문화적 가치 전쟁 등 양당을 지탱하던 기둥들이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는 것.
민주당 내부의 균열 확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민주당은 서울의 상위 중산층과 호남, 그리고 호남 출신 중하층 노동자나 자영업자 이주민의 연합 정당이었다. 그런데 상위 중산층과 중하층 노동자·자영업자의 이해관계는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서울과 수도권 위주 정당이 되면서 호남 등 지역의 불만은 높아져 갔다. 여기에 1980년대 학번-1960년대생이 주도하고 그보다 젊은 세대들이 동참했던 ‘가치관 전쟁’에 대한 반감이 1990년대생부터 눈에 띄게 커졌다.
종합부동산세 및 상속세 완화를 놓고 민주당과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 적잖은 내홍이 있는 건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86세대 사이에서 상속세 완화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주장은 몇 해 전부터 수면 아래에서 암암리에 이야기됐다. 종부세 완화를 주장하는 의원들 지역구는 강남 3구만큼은 아니지만 집값이 비싼 광진구 자양3동이나 목동이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군포시같이 전통적 민주당 강세 지역이던 경기 서남부에서 민주당이 패한 건 당 내 지지 세력 균열 확대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블루칼라나 자영업자가 민주당 지지 연합에서 대거 이탈했고, 호남 이주민이나 그 자녀들이 지지를 철회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후 선거에서 다시 민주당 지지로 되돌아왔다고 하지만, 이들은 언제든 다시 이탈할 수 있다. 2016년 이후 호남에서 민주당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간헐적으로 분출되는 현상도 계속되고 있다.
지방 청년들이 기존 정당에 냉소적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붕괴가 바탕에 깔려 있다. 지난해 25∼34세 성비는 여성 100명당 남성 110.4명으로 심각한 남초(男超)였다. 그런데 경북(129.1명), 울산(127.4명), 경남(121.4명), 충북(128.1명), 충남(126.3명), 강원도(124.1명) 등은 더욱 심각한 남초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지역경제 기반인 제조업이 흔들리면서 젊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서울행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주의 결과 서울의 성비는 여성 100명당 남성 96.3명으로 여초가 됐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제조업 기반 몰락이 초래한 지역사회 위기가 젊은 남성들에게 집중적 타격을 줬고, 그들은 극우 포퓰리즘 정당을 지지하게 됐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은 사망률이 상승하고 평균수명이 감소한 거의 유일한 인구 집단이다. 알코올중독과 자살 급증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치학자 찰스 머레이가 2012년 펴낸 ‘커밍 어파트’에서 백인 노동계급의 거주 지역으로 상정한 피시타운의 경우 남성 혼인율이 1960년 84%에서 2010년 48%로 급락했다. 독일 대안당의 표밭인 옛 동독 지역은 여성들이 떠나가면서 젊은 세대의 성비는 여성 100대 남성 120에 육박하고 있다.
국민의힘 지지 연합이 좀처럼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원인에서다. 서울 강남 3구로 대표되는 자산가, 산업화 시대 한국의 엘리트 사회에서 지분을 크게 늘린 영남 명문고-명문대 졸업자, 성장의 과실을 함께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영업자와 블루칼라 노동자,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부산·울산·경남까지 확장된 지역 기반 등을 아우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정책·인물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서울 강남 3구 자산가들이 점점 취약해지고 있는 영남 지지를 기반으로 민주당에 불만을 가진 이들을 흡수하겠다는 전략을 펴는 게 현실적 차선책이 될 수 있다.
‘건강한 국민’과 ‘노력주의’
영국에서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은 우파 포퓰리즘이 어떻게 빠르게 성장하고 세를 확보하는지 잘 보여준다. 반EU 담론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변방의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노동계급과 고졸 이하 학력 보유자들 사이에서 급격히 확산됐다. 노동당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 시절 ‘신노동당’을 앞세워 노동계급 정당이 아니라 고학력 중산층 정당으로 변했다.
보수당에 대한 실망은 커져갔다. 저소득층, 블루칼라 노동자나 중산층 내에서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집단, 노인, 지방 중소 도시나 농촌 지역 주민 불만이 EU 반대로 결집했다. 2017년 국민투표 당시 탈퇴 찬성파들은 영국이 매주 3억5000만 파운드(6200억 원)를 EU에 퍼주고 있다며, 대신 그 돈을 건강보험 NHS를 살리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을 핵심 메시지로 내걸었다.
‘우리’를 구성하는 것들이 ‘외부’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는 메시지가 뒤처진 사람들을 투표소에 나오게 했다. 프랑스 국민연합은 이민 문제를 블루칼라나 쇠락한 제조업 중심지의 불만과 적극적으로 연계했다. ‘국내화한 공장 이전’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이주노동자들이 국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프랑스 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한 것.
6월 30일(현지 시각)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마린 르펜 의원이 총선 1차 투표 출구조사에서 1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오자 환호하고 있다. [뉴시스]
진보 진영은 흔히 반공, 반이민, 반여성 등의 구호를 극우 세력 등장의 증표라 주장했다. 하지만 서울의 부유한 강남 좌파, 온갖 좋은 건 독식하는 명문대 출신 엘리트들이 뒤처진 사람들을 억압하는 ‘적’으로 규정하는 우파 포퓰리즘이야말로 더 실감 나게 다가올 현실적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