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지도자는 경영도 알아야 한다
"금메달 두 개 딴다고 했으면 약속을 지켜야죠"
돈 있어도 기회 못잡는 올림픽 후원
北 장웅 “이회장은 큰 장사꾼입네다”
부드럽고 온화한 리더십으로 빙상연맹을 14년간이나 이끈 박 전 회장. [박해윤 기자]
“어느 날 이건희 회장이 ‘참고하라’면서 임원들에게 직접 회람을 돌렸답니다. 박 단장이 탁구대 모서리를 ㎜ 단위로 쪼개서 공이 어느 지점에 어떻게 맞았을 때 어떤 방향으로 튄다는 걸 자세하게 그린 뒤 그럴 때 어떻게 맞받아쳐야 할지를 적은 메모였다는 거죠. 이건희 회장이 박 단장의 이런 면모를 배우라고 임원들에게 지시한 겁니다.”
이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88 서울올림픽 끝나고 며칠 지난 뒤였나. 서울에 있는데 어느 날 밤 12시에 전화를 하셨어요. ‘뭐 합니까’ 하셔서 ‘이제 막 자려고 합니다’ 했더니 ‘이번에 올림픽도 다 잘하고 그랬는데 혹시 내가 말해 준 것 중에 도움되는 것이 있었나요’ 하고 물으시는 거예요. 당연히 ‘예’라고 대답했죠. 회장님이 그중에 기억나는 말들을 메모로 정리해서 달라고 하시길래 이틀 뒤에 A4 용지에 빽빽하게 적어서 보고드렸더니 ‘사장들보다 낫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걸 임원들에게 돌려보라고도 하셨습니다.”
IOC 위원이 된 이후 달라진 것들
인터뷰하는 내내 느꼈지만 그는 겸손이 몸에 밴 사람 같았다. 자신은 자랑할 것이 별로 없고 “모두 남들이 도와준 덕분에 그 시절을 지나왔다”고 자주 말했다.
현역 지도자 시절 체육계에서는 그를 두고 ‘할아버지 같은 부드럽고 따뜻한 성품의 인간적 리더십을 가진 사람’으로 통한다고 전했다.
88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 본격적인 스포츠 CEO의 길을 걷게 되시지요.
“계속 탁구팀을 이끌다가 4년 뒤 1992년 회장께서 ‘삼성에 스포츠단을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제가 비서실 스포츠팀장이 됩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르셀로나 올림픽 현지에서 배종렬 비서실 차장이 전화를 해서는 ‘비서실로 발령이 났으니 준비하라’는 거예요.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며칠 기다렸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내가 뭘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 가만히 있었죠.
한 달쯤 지났나. 이학수 차장이 전화를 해서는 ‘배 차장한테 연락 못 받았습니까’ 하길래 ‘받기는 받았습니다’ 했더니 ‘아니 지금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빨리 비서실로 오세요’ 하는 거예요. 갔더니 ‘그룹에 스포츠단을 만들고 박 감독을 단장으로 올리라’고 바르셀로나에서 말하는 회장님 육성 녹음을 들려주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그룹 내 스포츠를 아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회장님 생각에 ‘그래도 저 사람이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큰 중책이 맡겨져 어리둥절했습니다.”
삼성스포츠단장을 맡게 된 그는 사장단 회의에도 참석하게 된다.
“회장님 지시였어요. 스포츠팀장이라고 스포츠만 알아서는 안 된다, 경영도 알아야 하고 인사도 알아야 한다면서 사장단 회의에 들어오라고 한 겁니다. 스포츠 말고는 문외한이었던 저는 정말 큰 경험을 했습니다. 전혀 다른 업무여서 회의 석상에서 많이 깨졌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백내장이 왔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듬해 신경영 선언이 있었고, 한 3년 동안 정말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당시 이건희 회장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직 도전 프로젝트에도 투입된다.
“1992년 부부 동반으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가셨잖아요. 거기서 사마란치 위원장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으세요. 아마 그때 분위기를 읽으셨던 것 같아요. IOC 위원이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이건희 회장님이라도 IOC 위원이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도와주셨고, 저도 스위스 로잔에 여러 차례 출장을 가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설득 작업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위원이 되셨는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게 소식을 들으시고도 전혀 표정 변화가 없으셨어요. 당시 제가 수행했기 때문에 너무 잘 알지요.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레슬링 금메달 두 개가 목표였는데 한 개밖에 못 땄어요. 저도 실망이 컸지만 IOC 위원이 되셨다는 낭보가 전해졌으니 좀 봐주시겠지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었어요. 그런데 회장님이 새벽 1시에 전화를 하셔서 오라고 하시길래 내심 ‘애썼다’는 말을 해주시려 하는 걸까 했는데 웬걸! ‘믿고 맡겨놓았더니 금메달 한 개가 뭡니까’라며 야단을 치셨어요. 나중에 주변 몇 분에게 이 이야길 전해드리니 ‘그게 회장님식 칭찬’이라고 위로해 주었는데 그때는 정말 서운했습니다.”
북한 IOC 위원 장웅의 감탄
2024 파리 올림픽 사격 여자 10m 공기권총 금메달 오예진, 은메달 김예지(대한민국), 동메달 마누 바커(인도)가 시상식에서 ‘셀피’를 찍고 있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IOC 위원이 되면서 삼성 브랜드가 세계에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1996년에 위원이 되시고 1997년에 바로 올림픽 후원 계약을 해서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부터 후원을 시작합니다. 올림픽 후원은 돈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가전 부문에 삼성이 스폰서를 하겠다고 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죠. 근데 회장님이 IOC 위원이 되시니 대접이 달라지더군요.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무선통신 분야 스폰서를 하게 된 거죠.
그런데 그때만 해도 우리가 세계시장에 내놓을 만한 전화기가 없다 보니 일본 도코모에서 나온 전화기에 삼성 라벨을 붙여갖고 광고를 했어요. 그러던 것이 시드니 올림픽에서 조금 나아지더니 아테네 올림픽에서 드디어 ‘삼성 애니콜’이 나와 제대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죠. 저는 오늘날 삼성 휴대폰을 세계에 알린 광고로 올림픽 스폰서가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그의 말은 32년 동안 삼성의 홍보책임자였던 이순동 전 전략기획실 사장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오늘날 삼성전자 브랜드가 높아진 건 제가 보는 입장에서는 회장께서 쌓아놓은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삼성전자를 올림픽 스폰서에 참여시킨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문화를 기반으로 한 문화 마케팅, 즉 글로벌 브랜드 마케팅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두 가지가 축이 돼서 삼성 브랜드가 비약적으로 세계시장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올림픽 홍보와 관련해서는 1996년 애틀랜타에서 하계올림픽이 열렸을 때 회장께서 ‘삼성 브랜드 이미지 조사를 해보라’고 해서 보니까 C+ 수준이었습니다. 그룹 내에서 본격적인 브랜드 마케팅 전략이 세워집니다.
돈이 있어도 기회를 잡을 수 없는 게 올림픽 후원입니다. 각 분야에 세계적 기업들이 들어와 있고 대다수가 미국 기업들, 일본 기업 한두 개일 때였어요. 이런 기업들에 우선권이 있기 때문에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게 그쪽 생태계입니다.
삼성전자는 40년간 올림픽 휴대폰 후원을 통해 최신 모바일 기술을 전 세계 선수들과 스포츠 팬들에 알렸다. 2024년 파리 올림픽 삼성홍보관 개막식 광경. [삼성전자]
한편 박 전 회장은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이 올림픽에서 삼성 휴대폰 광고를 보고 “이건희 회장 대단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것도 전했다.
“장 위원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회장님과 같이 IOC 위원이 됐어요. 애니콜이 올림픽 스폰서 모델이 되는 걸 보더니 제게 ‘이건희 회장은 정말 큰 장사꾼입네다. 박 선생도 거기서 배왔으믄 보통 아니갔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웃음).
회장님이 IOC 회의에 참석하실 때 제가 거의 다 수행했는데 장 위원이 꼭 회장님 옆에 앉곤 했어요. 회장님에게 꽤 친근감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 분이 말을 참 잘해요. 회장님한테 막 뭘 이야기하면 회장님은 빙긋이 웃거나 고개를 끄덕하시거나 짧게 대꾸하시거나 했지요. 그렇게 몇 번 만나더니 제게 와서는 ‘이야~ 나는 이건희 회장이 저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하고 말하곤 했죠.”
한편 박 전 회장은 “스포츠나 광고는 어려울 때 투자가 위축되기 마련인데 회장님은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IMF 외환위기에도 올림픽 후원을 끊지 않았죠.
“그렇습니다. 회사가 그렇게 어려웠는데도 그대로 하라고 하셨죠. 회사가 어려울 때이니 스포츠단에 대해서도 ‘줄여야 한다, 없애야 한다, 당장 없애지 못한다면 우선순위라도 정하자’ 등 말이 많았어요.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버텼죠. ‘내가 그만두면 그만뒀지, 팀을 하나라도 없애면 사기가 떨어져서 안 된다’면서 말이죠.
운동이라는 게 사기를 먹고사는 건데 팀을 없애면 전체가 영향을 받아요. 다들 저더러 ‘답답하다, 고집이 세다’고 했는데 저는 ‘조금만 이 고비를 넘기자, 힘을 내자’고 했지요. 결국 회장님이 지원을 끊지 말라고 결정해 주셔서 그대로 가게 됩니다.”
“겨울 스포츠의 꽃은 빙상이다”
박 전 회장은 2000년대 접어들면서 한 기업의 스포츠단을 이끄는 리더가 아니라 대한민국 선수단을 이끄는 단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이하 빙상연맹)을 이끌면서 2002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 이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한국선수단장으로 역대 최고 성적을 올려 동계올림픽의 새 역사를 쓴다.
탁구선수 출신인데 빙상연맹 회장을 맡게 된 것이 궁금합니다.
“회장님이 IOC 위원이 되신 걸로 제 임무도 끝나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 2월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여름 스포츠의 기본이 육상이라면 겨울 스포츠의 기본은 빙상이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겨울 올림픽을 유치하려면 빙상을 반드시 육성해야 한다’ 하셨어요. 그러면서 삼성이 빙상연맹을 맡고, 저더러 회장을 맡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빙상에 문외한이었고 그때만 해도 워낙 빙상이 불모지여서 자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회장님이 늘 ‘무슨 일을 하려면 10년을 내다보고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덤벼들었습니다.
빙상연맹이 활성화가 안 된 시절이었어요. 아무리 삼성이 좋은 뜻을 갖고 한다 해도 갑자기 나선다고 하면 말들이 나올 수 있어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삼성이 맡아주길 원한다면 제가 회장을 맡아 한번 해보겠다’는 자세로 주변에 말씀드리니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흘러가서 맡게 됩니다.”
그는 제일 먼저 한 일이 ‘꿈나무 육성’이었다고 한다.
“기업도 스포츠도 인재 육성 방식은 똑같아요. 떡잎을 알아보고 픽업해서 꾸준히 지원하는 거죠.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쇼트트랙, 스피드, 피겨 꿈나무 대회를 열었는데 이게 주효했어요. 김연아, 모태범, 이상화 이런 선수들이 다 여기를 거쳤죠. 제가 회장 취임할 때가 연아 선수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어요.
한국 빙상의 성취는 회장님이 정말 묵묵히 오랜 기간 지원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우리 운동하는 사람들은 10년을 내다보는 장기 전략을 짜기가 힘듭니다. 하루하루 승패에 익숙한 DNA를 가졌기 때문이죠. 지금도 프로 감독들 성적 나쁘면 금방 쫓겨나잖아요.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제일 많이 통하는 데가 스포츠계 아닙니까. 하지만 회장님은 꿈나무 발굴, 경기력 향상을 주문하시면서 10년을 투자하라고 하셨고,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거죠.”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단 결단식. 박용성 대학체육회장이 박성인 선수단장에게 태극기를 전달하고 있다(위).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단 귀국 기자회견. 박성인 선수단장, 이승훈·김연아·이상화·모태범 선수 등의 모습이 보인다. [동아DB]
“저조차 스피드에서 그렇게 금메달(이상화·모태범·이승훈)이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연아 선수는 실수만 안 하면 금메달을 내다봤지만요. 연아 선수의 금메달은 브라이언 오서 코치의 힘이 컸습니다. 딱 2년 지도받았는데 그게 결정적 계기가 된 거죠. 그런 코치는 절대 돈이 없으면 데려오지 못해요. 당장은 큰돈이 나가도 할 만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결정하는 그런 판단이 필요합니다. 회장님이 반도체다 뭐다 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잖아요. ‘미래에 이게 된다’는 확신을 갖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무자비하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밀고 나가시잖아요.”
두 차례에 걸친 장시간의 인터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이건희 회장의 업적은 기업 경영뿐만 아니라 스포츠 분야에도 지대했다. 이는 곧 한국 기업과 스포츠의 상관관계를 통한 성장사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가 될 것이다. 기자는 앞으로도 계속 이 분야 관련자들을 만나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고리로 한 한국 스포츠의 어제와 오늘을 짚어볼 예정이다.
이건희 상상력의 핵심 키워드는 뭘까요.
“맥(脈)이라고 봅니다. 본질을 짚으시는 거죠. 뭘 하실 때 대충 하는 법이 없으셨어요. ‘이거다’ 붙잡으면 끝장을 보셨습니다. 깊이 보셨다고 해야 하나. 안 됐을 경우엔 왜 안 됐을까를 알 때까지 파고드셨어요. 다른 걸 쳐다보시는 법도 없으시고.
회장님은 삼성의 3대 스포츠라고 해서 야구, 골프, 럭비 붐도 조성하시고 프로팀도 지원하셨지만 아마추어 종목, 흔히 메달 종목이라고 하죠. 그걸 일구신 것이 큰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한국 스포츠의 뼈대가 됐으니까요. 한창 시절 삼성이 후원하는 팀만 스무 개가 넘었을 겁니다. 제가 비서실에 올라갈 때만 해도 농구, 레슬링, 야구, 탁구 등 여섯 개 정도였는데 회장님이 IOC 위원 되시고 많이 늘었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에는 삼성이 지원하는 종목에서 금메달이 8개나 나왔어요. 거의 절반이었습니다. 한국의 엘리트 종목은 사실 이건희 회장님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이런 성취가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한국 양궁의 성취도 정몽구·정의선 회장으로 이어지는 40년 지원이 토대가 된 거 잖아요. 체육인들은 엎드려 큰절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을 마지막으로 본 날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010년 3월 3일 밴쿠버 올림픽 직후 청와대 행사에서였어요. ‘체중이 불어서 걱정’이라고 하시길래 제가 ‘체중 불어나신 건 회장님 책임입니다. 운동도 잘 안 하시고…’ 이랬죠. 저는 사실 회장님께 있는 그대로 스스럼없이 말씀드리는 스타일이었어요. 회장님은 또 그런 걸 잘 받아주셨고요.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니 회장님이 ‘근데 그게 게을러서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회장님 그러면 큰일 나십니다. 꼭 운동하셔야 합니다’ 했는데… 그게 마지막 뵌 거였어요.”
그는 말을 더는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