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명의 ‘요리 명인’에겐 공통된 성공비결이 있다. 최고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야망, 음식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열정, 누구에게든 배우려는 자세,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요리 개발에 나서는 창조적 신명,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아야 채워지는 보람…. 홍어, 복어, 초밥, 국수, 비빔밥, 중국요리, 이탈리아 요리 등 수십 년 동안 한 우물을 파며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食神’들을 만나보자.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홍어요리 전문점 ‘순라길’을 열고 장사를 시작한 지 올해로 23년째. 카센터에서 일하던 남편의 봉급만으로는 두 아들 대학 등록금 대기가 빠듯해 일거리를 찾다가 식당을 찾아나섰는데, 장보기 요령에 따라서는 이윤이 꽤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직접 장사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식당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요리 비법은 절대 안 가르쳐줬어요. 음식 쓰레기조차 주방장이 직접 갖다버리더라고. 주방장을 졸라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내가 죄다 버리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들고 나온 쓰레기를 몰래 뒤져 뭘 재료로 쓰는지 살폈습니다. 자나깨나 음식 만드는 것 연구하고 미친 듯이 일했어요. 앞치마 벗는 것도 잊고 집에 온 날도 많지.”
식당에서 10년 일하는 동안 두세 달에 한 번씩 일자리를 옮겨다녔다. 더 배울 게 없다고 판단되면 또 다른 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 혼자서 3000원짜리 칼국수를 만들어 파는 집에서 걸쭉한 국물 맛의 비결을 알고 무릎을 쳤다. 값비싼 감자를 통째로 삶아 갈아넣었던 것. 재료를 아껴 이익을 많이 남기는 장사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음식 다루는 사람은 음식을 자식 사랑하듯 해야 합니다. 세상에 자식보다 소중한 게 어디 있어요. 음식이 자식이다 생각하고 혼을 바쳐야 비로소 맛이 나는 거요. 몸이 피곤하거나 꾀가 날 때 음식을 만들면 평소 잘 내던 맛도 안 나온다니까.”
4대째 대물림한 서울 권농동 집에서 ‘숟가락 5개’로 시작한 ‘순라길’은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메뉴는 홍어회와 찜, 탕이 전부지만 홍어 맛을 제대로 알고 삼합(홍어, 돼지고기, 묵은 김치)을 찾는 미식가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단골이 꾸준히 불어났다.
“11월에서 4월까지가 홍어철인데, 이 시기에 흑산도에서 나는 홍어가 제일 맛있어요. 5월에 나는 홍어는 좀 씁쓸한 맛이 나지. 어머니가 하시던 전통 방식으로 홍어를 삭히려면 날씨에 민감해야 해요. 서늘한 그늘을 찾아 항아리를 옮겨가며 정성으로 돌봐야 제 맛이 나죠. 자칫하면 홍어가 삭기 전에 썩어버립니다. 홍어를 삭히는 기간은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죠.”
회나 찜 등 조리 방법에 따라서도 홍어를 삭히는 기간을 달리해야 한다. 오래 삭힐수록 특유의 향이 강해지므로 찜에 쓰이는 홍어가 회에 쓰이는 홍어보다 삭히는 기간이 짧다.
김씨의 홍어요리는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 대신 홍어 고유의 향이 은근히 배어나면서 육질이 부드러운 게 특징. 비결은 오랜 전통 방식을 따라 제대로 삭히는 데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소금”
김씨는 “홍어 맛을 제대로 보려면 홍어 불고기가 제격”이라고 한다. 홍어 불고기는 잘 삭힌 홍어를 손바닥 크기로 두툼하게 어슷어슷 썰고, 곱게 빻은 고춧가루와 간장, 설탕, 참기름, 마늘, 깨소금에 배를 갈아넣어 버무린 양념장을 먹기 직전에 발라 굽는다. 삭힌 홍어는 열을 가할수록 향이 더 강해진다. 그래서 홍어 불고기는 찜기에 쪄내는 홍어찜보다 냄새가 더 강한데, 홍어를 웬만큼 좋아하는 사람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는 것. 그래도 맛은 일품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순라길’에선 홍어 불고기 맛을 볼 수 없다. 대중을 상대로 내놓기엔 맛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홍어찜은 회, 탕과 함께 ‘순라길’의 3대 메뉴다. 삭힌 홍어를 적당한 크기로 토막내서 찜기에 쪄내는데, 약한 불에 30분 정도 은근하게 쪄야 쫄깃한 맛이 살아난다. 홍어찜은 젓가락으로 살을 떼어낼 때 특유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한다. 너무 오래 찌면 살이 뭉그러져 흐물흐물하게 되고 결도 없어진다.
‘순라길’에서 재료로 쓰는 야채는 김씨가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것들이다. 농약을 쓰지 않고 자연상태 그대로 자란 싱싱한 야채를 얻으려고 김씨는 농사지을 터를 찾아 전국을 헤매다녔다.
“5년 전부터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에서 직접 가꾼 야채며 밑반찬을 가져다 씁니다. 고추장과 된장, 간장, 장아찌, 김치 등도 이곳에 담가둡니다. 장맛은 물맛이니까. 야채도 농약 안 쓰고 물과 공기가 좋은 곳에서 길러야 맛이 깊어요.”
지난 겨울에는 손수 수확한 고랭지 배추 4000포기로 김장을 담갔다. 일반 배추와 달리 고랭지 배추는 씹을수록 달고 은근한 맛이 배어난다. 이렇게 담근 ‘순라길’의 묵은 김치 맛에 반한 손님도 많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소금”이라는 김씨는 신안군에서 나는 천일염을 강원도까지 공수해 김치를 담근다.
김씨는 딱 한 번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였다.
그러자 홍어를 먹으려다 헛걸음한 손님들이 ‘그 맛난 음식을 어디 가서 먹으란 말이냐’며 가게 문에다 쪽지를 몇 장씩 붙여놓았다. 오랜 단골이던 한 손님은 병석에 눕자 아들을 시켜 홍어회를 사오게도 했다.
결국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문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손님들이 있으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만듭니다.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은 벌받아야 해. 나는 식당 해서 빌딩 샀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됩디다. 음식 만들어 팔아서 어떻게 그리 큰돈을 벌 수 있는지….”
‘순라길’은 식탁 10개가 전부다. “가게 치장하고 사람 쓰는 데 들일 돈 있으면 좋은 재료 쓰는 데 써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다. 어머니에게서 홍어요리법을 전수중인 막내아들 이서구(31)씨는 장보는 방법을 배우는 데만 7년이 걸렸다.
“자식들 키우면서 ‘나쁜 짓 빼놓고는 뭐든지 하되, 그 직업에서 일인자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작은아들이 홍어요리를 배우려 할 때도 ‘용두사미 되려면 시작도 말라’고 했어요. 음식을 다루는 일은 최고의 직업입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손님들이 즐거워하고 건강해진다면 세상에 그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소?”
김씨는 손님이 식당을 나설 때 음식값을 세는 대신 그의 얼굴을 본다. 표정을 살펴보면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돈벌이에 앞서 장인정신이 몸에 밴 김씨.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그녀의 홍어회를 맛보기가 쉽지 않다.
[초·밥] 남춘화 “싱싱한 생선은 ‘기본’, 최고의 초밥은 ‘초’와 ‘밥’이 결정”
“요리는 아름답고 그걸 알아주는 손님이 있으니 행복하다”는 ‘초밥왕’ 남춘화(54)씨. 서울 대치동의 초밥전문점 ‘남가(南家)’ 사장이자 주방장인 그는 초밥의 원조격인 일본으로 날아가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때는 요리사로는 처음으로 ‘자랑스런 신한국인상’을 받았고, 자신의 이름으로 펴낸 요리책이 다섯 권에 이른다. 세 편의 CF에도 출연했다. 틈틈이 미국의 일식집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현지 초청강의에 나서기도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머슴살이를 하다 열여덟 나이에 고향인 경북 문경에서 무작정 상경해 식당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후 37년 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살았다”는 그는 이룰 만큼 이룬 지금도 1년 365일 하루도 빠짐 없이 두어 평 남짓한 스시 바에서 초밥을 빚어낸다.
‘달인’의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혹독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끼 밥과 하룻밤 잠자리를 찾아 식당을 전전하던 시절,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연탄을 갈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겨울엔 찬물에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하느라 손이 얼어터지고 피가 났다. 그래도 쫓겨날까봐 힘들다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칼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음식을 척척 만들어 내놓는 요리사를 훔쳐보며 ‘언젠가는 나도 저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악물었을 따름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10년 뒤 그는 하얏트호텔 초밥부 책임자가 됐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남 보기엔 부러운 자리였지만, 나이는 자꾸 들어가고 식구는 불어나는데 허구한 날 초밥만 만들고 있다가 어머니와 네 식구를 제대로 건사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는 것.
그 무렵 마침 일본 하얏트호텔로 연수를 떠날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난생 처음 ‘외국물’을 먹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호텔에서 ‘종주국’ 초밥 기술을 익히는 한편 쉬는 날이면 아카사카와 긴자의 소문난 일식당들을 무작정 찾아다니며 주방장들을 졸라 요리법을 배우고 자료를 모았다. 그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오기 어렵다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때만 해도 요리사라는 직업을 내려다보고, 요리사 자신도 스스로를 비하하던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 요리사들은 반백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위생복 차림으로 거리며 골프장을 활보하고 있었다. 요리사를 천직으로 알고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남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생각을 180도 바꿨다. 투철한 직업관을 가지고 한 우물만 열심히 파겠다고.
특허받은 초밥식초
일본 연수를 끝낼 무렵 남씨는 초밥식초를 개발하고 4년 뒤 ‘인스턴트 초밥식초 제조법’으로 발명특허를 받았다. 맛있는 초밥을 만드는 비결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초밥초다. 초밥초는 대개 식초, 소금, 설탕을 섞은 배합초를 일컫는데, 그가 특허를 받은 초밥초는 식초, 소금, 백설탕에 술, 다시마, 레몬향을 첨가한 것이다. 초밥초의 재료와 분량은 요리사의 입맛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도 가령 오사카식은 도쿄식보다 단맛이 많이 도는 초밥초를 쓴다.
“초밥초를 만들 때 주의할 점은 소금과 설탕, 식초를 약한 불에서 완전히 녹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쁘다고 차가운 식초에 소금, 설탕을 넣고 대충 몇 번 휘휘 저어 쓰면 간이 제대로 배지 않아 밥에서 신맛만 납니다.”
흔히 초밥이라고 하면 생선의 선도(鮮度)가 전부인 것으로 알지만, 남씨에게 그것은 ‘기본’이다. 그가 생선의 선도 못지 않게 중요시하는 것은 밥이다.
“맛있는 밥을 만들려면 초밥초와 밥을 잘 배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시지도 달지도 짜지도 않죠. 또한 초밥은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일 때 먹어야 가장 맛있습니다. 적당한 온도와 최상의 밥맛을 유지하기 위해 전기밥솥에 나무통을 넣고 그 안에다 밥을 보자기에 싸서 넣어둡니다.”
따뜻하게 보관해둔 밥을 초밥초와 섞을 때도 요령이 필요하다. 우선 나무그릇과 나무주걱을 사용하면 식히기도 좋고 또 나무가 수분을 흡수해서 밥알의 상태를 알맞게 유지해준다.
밥에 초밥초를 넣은 다음에는 나무주걱을 세워 잡고 재빠르게 자르듯 섞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초밥초가 골고루 섞이지 않고 한곳에 뭉쳐 간이 고루 배지 않는다.
제철 재료로 메뉴 다양화
남씨는 생선 일색이던 초밥의 재료를 다양화해 초밥의 개념과 인식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쇠고기·두릅·순채·브로콜리·송이초밥 등 독특한 재료의 초밥을 끊임없이 개발해온 것. 그 중에서도 쇠고기초밥은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남가’ 최고의 인기 메뉴다. 초밥 재료로 쓰이는 쇠고기는 1㎏에 8만5000원을 호가하는 살치살. 소의 어깨와 목 사이 부위인 살치살은 특별주문을 해놓고도 보통 한 달 이상 기다려야 손에 쥘 수 있다.
살치살은 과일 껍질과 셀러리 등 각종 야채를 고아낸 물에 이틀 정도 묻어둔다. 그러면 향이 골고루 배는데, 이때 꺼내서 급속 냉동시킨 다음 한 달 정도 숙성시켜 사용한다. 해동한 살치살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프라이팬에 살짝 구우면 쇠고기 특유의 냄새가 깨끗이 가실 뿐 아니라 입 안에서 살살 녹을 만큼 부드러워진다. 그래서 한번 쇠고기초밥 맛을 본 사람은 평생 그 맛을 못 잊는다고 한다.
“저에겐 손님들이 스승이었습니다. 하얏트호텔에 근무할 때 국내외의 수많은 식도락 손님과 대화를 나누며 얻은 음식 정보가 소중한 노하우가 됐지요. 그중엔 계절마다 신선한 제철 재료로 별미초밥을 만들어달라는 고객도 있었는데, 그때부터 야채 등을 이용한 여러 가지 초밥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훌륭한 요리사가 되려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정신을 갖고 일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가슴 깊이 새겼죠.”
손님의 입맛과 기호가 제각각이기에 요리사의 손에서 탄생하는 요리도 늘 똑같아서는 안 된다는 게 남씨의 요리철학이다. ‘남가’에 메뉴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그는 처음 칼을 잡은 순간부터 “요리사는 손님이 끝까지 편안하도록 손끝에 정성을 담아 대접해야 한다”는 신조를 지켜왔다. 그래서 ‘남가’라는 옥호도 자신의 성(姓)에서 따왔고, 방 이름도 자신의 이름 석자를 따 ‘남실(南室)’ ‘춘실(春室)’ ‘화실(和室)’로 붙였다. 가게를 열 때 평생을 쓰겠다는 각오로 초밥 접시도 전부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다.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해 손님을 모시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다.
[국·수] 강동구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예술 반죽’ 빚어낸다”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서 ‘강동구 칼국수’를 운영하는 강동구(44)씨 집안은 그의 아버지부터 딸까지 3대가 국수와 인연을 맺고 있다. 강씨의 부친은 중세도시에서나 들릴 법한, 말 발굽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낡은 수동식 국수기계와 54년째 씨름중이다.
“전쟁통에 황해도 해주에서 월남한 아버지는 전남 해남에 터를 잡고 국수 공장을 차렸습니다. 그 뒤 인천으로 옮겨 지금까지 건면을 뽑아 팔고 있어요. 슈퍼마켓에 가면 흔해빠진 게 건면이라 장사는 잘 되지 않지만 소일 삼아 하시는 거죠. 저는 태어날 때부터 저 기계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50∼60년대의 인천은 일본에서 밀가루가 들어오던 항구라 국수집과 중국음식점이 즐비했다. 그러나 요리를 해서 내놓는 중국음식점에 비해 건면을 뽑아 파는 국수집은 별로 돈이 되지 못했다. 손수 뽑은 면으로 요리를 만들어 팔면 부가가치가 훨씬 높을 텐데 아버지는 왜 안 그러는지 의아했다. 그래서 “우리도 우동집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씨도 안 먹히고 야단만 맞았다.
아버지에게서 비전을 찾지 못한 그는 고교 졸업 후 제과점에 취직해 제빵기술을 익혔다. 3년 정도 일한 뒤 독립을 고려했으나 번듯한 빵집을 열려면 최소한 1억원이 필요했다. 꿈을 접고 밀가루 공장에 취직해 5년 동안 밀가루와 관련된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인천 숭의동에 ‘본가우동’이란 가게를 열었다.
“국수 면발이 하얗고 매끈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중력분만 사용하던 때였죠. 하지만 저는 식이섬유가 많아 소화도 잘 되고 변비도 없애주는 전립분(밀을 덜 빻아 껍질이 남아 있는 거친 밀가루)을 사용해 면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거무스레한 국수를 처음 본 사람들한테 좀체 먹혀들지 않았어요. 매상이 시원치 않자 ‘쓸데없는 짓 한다’며 또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죠.”
그 일로 ‘장사라는 건 나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후 평범한 면을 뽑아 쓰던 그는 7년 전부터 새로운 면 개발에 재도전했다. 뽕잎, 치자 등의 재료를 밀가루와 섞어 다양한 색상도 낼 수 있고 건강에도 좋은 면을 뽑아보기로 했다.
“당뇨나 고혈압 같은 성인병이 있는 사람에겐 밀가루 음식이 해롭다고 하지만 뽕잎국수는 괜찮습니다. 그래서 건강에 좋은 국수를 만들겠다며 뽕잎국수를 시도했는데, 처음엔 애를 많이 먹었죠. 뽕잎가루를 밀가루와 섞어 반죽하면 점성이 떨어져 면이 잘 끊어지거든요.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면을 뽑기에 앞서 반죽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밀가루에 어떤 재료를 첨가하느냐에 따라 손 반죽과 기계반죽으로 달라지기도 합니다. 가령 야채를 이용할 경우 손으로 한 시간 이상 반죽하면 체온 때문에 상할 수 있죠.”
반죽이 끝난 뒤 숙성시키는 과정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자꾸 치대면 밀가루에도 스트레스가 가해지는데 이를 풀어주는 과정이 숙성이다. 스트레스가 적당히 풀리는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반복되는 실패 끝에 익힌 노하우다. 숙성 과정에서 반죽을 보관하는 온도는 혼합하는 재료에 따라 달라진다. 짧게는 24시간, 길게는 100일이 넘는 숙성기간을 거치기도 한다. 고추장이나 된장을 첨가한 반죽이 가장 오래 걸린다.
이렇듯 하나하나 몸으로 익힌 노하우로 강씨는 각기 재료가 다른 20여가지 면을 뽑아내기에 이르렀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면 한 가지를 개발할 때마다 내다버린 밀가루만 해도 수십 포대다. 그는 “잇달아 실패를 맛보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이번엔 성공이구나’ 하는 느낌이 손끝에 전해져 올 때가 있다”고 한다. 이 쾌감 때문에 그 지긋지긋한 면 개발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
그가 면을 개발할 때 사용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그동안 들인 노력의 결과다. 머릿속으로 수백 종류의 밀가루와 수십 가지 재료를 이리저리 섞어가며 성공확률을 점친 뒤 비로소 작업에 들어간다. 하나의 면을 개발하는 데 이같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수십, 수백 차례 거친다. 초기엔 성공률이 50% 정도였지만 이젠 95%에 달한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강동구 칼국수’는 다채로운 메뉴를 자랑한다. 뽕잎면, 무지개면, 버섯면 등 천연 재료를 섞은 반죽으로 만든 메뉴가 10가지가 넘는다. 뿐만 아니라 계절별로 나는 재료에 따라서도 메뉴가 달라진다. 대표적인 것이 ‘가시리 뽕잎 굴우동’이다.
“가시리 뽕잎 굴우동은 영양가가 높은 재료 3가지를 섞어 만든 것입니다. 가시리는 한류성 바닷물에서 자라는 해초의 일종인데, 황해도 근방의 찬 바닷물에서 많이 나 이북이 고향인 어머니가 즐겨 쓰시던 음식 재료입니다.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했죠. 가시리는 점성이 강해 무척 끈적거리기 때문에 자칫하면 우동 국물이 텁텁해집니다. 끓는 물에 면과 함께 재빨리 집어넣고 짧은 시간 안에 삶아내야 제맛이 납니다. 여기에다 밀가루에 굴려 살짝 튀긴 굴을 고명으로 얹으면 우동 맛이 담백하고 깔끔해지죠.”
강씨는 식초나 기타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고 천연 재료만으로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면을 뽑아내는 기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음식점 주방의 대형 냉장고엔 갖가지 재료를 첨가해 개발한 20여가지의 면 반죽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강씨가 매일 아침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이렇게 저장해둔 반죽을 꺼내 그날 필요한 양만큼의 면을 뽑아내는 것이다. 이곳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다양한 색깔과 독특한 맛의 국수에 매료된 단골손님 중에는 자칭 ‘국수 마니아’도 많다.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강씨의 큰딸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리사의 길을 걷고 있다. 강씨는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가끔 특강을 하기도 한다.
“스파게티, 우동 등 면 종류 음식이 엄청나게 많이 팔리고 있는 데도 면을 특화해서 다루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관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껏 쌓아온 노하우를 체계화해 면 전문가를 배출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해요. 스파게티와 우동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와 일본으로 이를 수출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중·국·요·리] 이향방 “3000가지 요리 가능, 그래도 새 메뉴 개발은 계속된다”
서울 연남동에서 27년째 자리를 지켜온 ‘향원(香苑)’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음식점 중 하나다. 정·재계 고위 인사들을 비롯해 몇몇 전직 대통령도 단골로 드나들 만큼 명성을 일궈낸 이가 바로 이향방(59)씨다.
그는 최근 역삼동에 또 하나의 중국요리 전문점 ‘모리화’를 열고 딸에게 운영을 맡겼다. 화교 2세로 서울에서 태어나 외교관 집안의 며느리가 된 이씨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뒤늦게 요리사의 길로 나섰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하고 결혼 후 의상실을 열었어요. 그런데 기성복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개인 의상실이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결국 제 사업도 망했습니다. 이제 뭘 해서 먹고 사나 고민하다 ‘식당을 하면 망해도 밥은 안 굶겠지’ 하는 생각에 음식점을 차렸습니다.”
곧장 요리사로 뛰어들 엄두를 낸 건 초등학교 때부터 중국요리를 익혀온 덕분. 스승은 외할머니였다. 한국전쟁 무렵부터 중국음식점을 꾸려온 외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뛰어났다.
“학교 갔다 오면 할머니가 주방으로 불러내 만두피도 밀게 하고, 칼국수와 중국전병 만드는 법도 가르쳐주시곤 했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면 그때마다 동전을 쥐어주셨는데 그 재미에 열심히 배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밀가루로 만드는 중국요리의 기본을 익힌 이씨는 중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본격 실습에 나섰다. 날마다 친구를 10여명씩 집으로 끌고 와서 탕수육 같은 것을 만들어줬다. 친구들이 맛있게 먹으니까 신이 나서 더욱 요리에 빠져들었다.
이씨의 이모부도 중식당을 하고 있어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 요리 실습을 했다. 고교 시절까지 그렇게 청나라 요리 등 웬만한 중국요리를 거의 다 익혔다. 결혼 후에는 외교관인 시아버지를 따라 대만에 가서 살았는데, 그곳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본토와는 또 다르게 변형된 중국요리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첫아이 돌잔치에 200여명의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가스레인지가 없던 시절이라 석유풍로를 세 개나 놓고 수십 가지 요리를 만들었죠. 뷔페식으로 상을 차렸는데 전부 새롭게 선보인 중국요리라 이름이 없었습니다. 당시 주중대사가 ‘맛도 기가 막힐 뿐더러 음식에 멋이 담겨 있다’고 칭찬해 시아버님이 뿌듯해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이씨에겐 남다른 인연의 스승이 있다. 인간문화재이자 중국요리 대가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대만의 푸메이 선생이다. 20여년 전 우리 정부가 닭고기와 돼지고기 소비 진작을 위해 푸메이 선생을 초청, 새마을운동본부에서 육류를 재료로 한 다양한 중국요리를 가르쳤는데, 이씨가 보조 요리사로 그를 돕게 됐다.
푸메이 선생은 이씨를 수양딸로 삼을 만큼 마음에 들어했다. 대만으로 돌아간 후에도 이씨를 자주 초청해 자신의 요리비법을 전수했다.
삼선누룽지탕으로 ‘대박’
이씨는 처음 음식점을 열 때부터 자장면은 절대로 안 팔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인이 가장 즐겨찾는 음식이지만 일찍이 전통 중화요리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 자장면을 대체할 색다른 중화요리 메뉴를 찾다가 문득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스물몇 살 땐데, 대만에 갔다가 그곳 호텔 사장으로부터 저녁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때 중국 전통의 토속 요리인 삼선누룽지탕을 처음 먹어봤는데, 맛도 맛이지만 누룽지탕에 소스를 부을 때 나는 독특한 소리에 반했어요.”
삼선누룽지탕은 뜨겁게 튀겨낸 누룽지에 걸쭉한 소스를 부어 먹는 요리로, 소스를 부을 때 나는 특유의 소리가 식욕을 돋운다. ‘향원’에서 국내 최초로 선보인 삼선누룽지탕은 요즘 말로 ‘대박’이 났고, 3년 만에 전국의 중식당으로 퍼져나갔다.
삼선누룽지탕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찹쌀로 만든 누룽지다. 멥쌀로 만든 누룽지는 기름에 튀기면 밥알이 다 풀어지고, 찹쌀과 달리 부드러운 맛이 없다. 찹쌀 누룽지는 대만에서 전량 수입해 쓴다.
“누룽지를 튀길 때도 비법이 있어요. 기름의 온도는 170℃가 적당한데, 여기에다 누룽지를 넣으면 가라앉지 않고 뜹니다. 이때 누룽지를 기름에 완전히 잠기도록 눌러줘야 합니다. 그래야 속까지 고루 튀겨져 아삭아삭해지죠.”
소스는 기름에 데쳐낸 죽순, 표고, 파, 마늘, 건해삼, 새우, 갑오징어에 육수를 붓고 술과 간장을 넣어 끓인 뒤 소금간을 하고 물녹말을 풀어 걸쭉하게 만든다. 완성된 소스에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떨어뜨리면 향긋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난다. 이때 참기름 양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데, 너무 많이 들어가면 맛이 느끼해진다고 한다.
소스에 생물이 아닌 건해삼을 쓰는 것은 생물 해삼을 기름에 볶거나 튀기면 살이 전부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인은 해산물을 날것으로 먹지 않는다.
소스에 사용되는 육수는 닭뼈를 푹 고아 만든다. 서양요리와 달리 중국요리에 사용되는 육수는 대부분 닭뼈를 우려낸 것이다. 쇠고기 등 다른 육재료를 사용한 국물에 비해 닭뼈를 우려낸 육수는 국물이 맑고 맛이 담백해 중국요리와 잘 어울린다고 한다.
삼선누룽지탕은 막 튀겨낸 찹쌀 누룽지에 따끈하게 데운 소스를 즉석에서 부어야 제맛이 난다. 따끈한 소스를 누룽지에 부으면 소스가 누룽지에 스며들면서 ‘칙’ 하는 소리가 나는데 이것이 시각과 청각, 미각을 함께 자극해 음식 맛을 한결 돋운다. 소스가 식었거나 방금 튀긴 누룽지가 아니면 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씨는 “4명의 전직 대통령 등 중요 인사들이 단골손님이라 요리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고 말한다. 늘 같은 메뉴를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수시로 중국을 드나들며 전통요리 비법을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입맛에 맞는 다양한 요리를 개발해왔다.
이씨가 만들 수 있는 중국요리는 3000가지에 이른다. 예전에는 중국에서 요리를 먹으면 10가지 중 5가지가 새로운 요리였지만, 요즘은 200가지 중 1가지가 새로운 요리일 정도로 본토 중화요리를 꿰뚫고 있다. 냄새만 맡고도 맛을 정확히 가늠해 ‘개코’라는 별명이 붙은 이씨는 요즘도 연중 절반은 새로운 요리를 찾아 중국대륙을 누비고 다닌다.
“중국엔 민간요법 차원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요리 비법이 많습니다. 제겐 감춰진 보물이나 다름없죠. 예를 들면 당뇨 환자를 위한 요리 같은 거예요. 요즘 만성 성인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 만큼 조만간 이들을 위한 건강식을 개발해 선보일 계획입니다.”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조리부문 명장’은 요리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다. 그러나 20년 이상의 실무경력에 조리문화와 철학, 경영능력, 사회적 공헌도 등 다방면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기에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난해 국내에서 네 번째로 조리명장에 오른 강현우(47)씨는 1982년 삼성에버랜드 유통사업부에 입사해 현재 삼성SDI 부산사업장(울산 소재) 조리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강씨는 요리 입문 30년 만에 “어떤 분야에서든 노력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몸소 입증했지만, 명장에 오르기까지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해야 했다.
그는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난한 집안을 돕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낮은 학력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고무신 공장, 이발소, 철공소, 식당이 전부였다. 먹고 자는 문제도 해결하고 돈도 벌 수 있다 해서 찾아간 곳이 부산 광복동의 한 일식집.
하지만 돈 벌러 나간 어머니 대신 동생들에게 종종 밥을 지어준 게 그가 요리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그러니 매일 밤 선배 요리사가 벗어던지고 간 위생복을 빨고 새벽같이 일어나 수십 개의 칼을 가는 밑바닥 생활부터 해야 했다.
일본인 주방장 밑에서 새우잠을 자며 3년 동안 갖은 설움과 구박을 견뎌낸 끝에 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곧바로 일자리를 옮긴 곳은 고급 한정식 집. ‘요정’으로 불리던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으며 요리를 배웠다.
요리에 재미를 붙인 그는 일을 제대로 배워볼 욕심에 ‘어느 집 주방장 솜씨가 좋더라’는 소문만 들으면 귀찮아 할 만큼 쫓아다녔다. 삼성에 입사하기 전 네 차례나 식당을 옮긴 것도 좋은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일어와 영어도 익혔다.
조리기능장, 조리기술 지도사에 이어 푸드 서비스 매니저 1급 자격증까지 손에 넣은 것도 요리에 대한 정성과 집념의 산물이었다. 직장에서 요리뿐 아니라 식자재 검수, 조리공정 관리, 식당 관리, 메뉴회의 참석 등 조리와 관련한 제반 업무를 담당하는 그는 내친김에 부산대 산업경영학과 연구과정도 이수했다. 70여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날마다 1만식에 달하는 배식을 해야 하는 그에겐 노무관리 지식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3년 전에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세계적 명성의 요리전문학교 ICIF 최고급 과정을 마쳤다.
“현재 부산사업장에 근무하는 외국인이 100명이나 됩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일 뿐 아니라 업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장만해 따뜻한 한국의 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정교한 독 제거 작업
바닷가 출신답게 그의 전공은 생선요리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신 있는 것은 복어요리.
복어요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독 제거다. 독은 내장과 핏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요리에 앞서 눈과 내장, 아가미를 흠집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내야 한다. 특히 회를 뜰 때는 내장의 분비물이나 피가 살에 묻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복어의 독은 무색무취한 데다 불에 5∼6시간 가열해도 없어지지 않아요. 때문에 복지리를 끓일 때는 가운뎃등뼈 속에 있는 피를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크기에 따라 복어를 서너 토막으로 자른 뒤 물에 깨끗이 씻고 행주에 싸서 등뼈 부위를 두들기면 피가 잘 빠지죠. 여기에 가쓰오부시(가다랑어 말린 것)나 다시마, 또는 생새우를 넣고 우려낸 국물을 부어 끓이는데, 복지리는 불에 장시간 끓이면 살이 뭉그러져 국물이 탁하고 감칠맛도 떨어집니다. 불 세기와 조리시간을 잘 조절해야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납니다.”
복지리는 ‘주당(酒黨)’의 해장국으로 첫손에 꼽히는데, 이는 복어에 많이 들어 있다는 테트로톡신 때문이다. 테트로톡신은 알코올을 중화시키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개운하고 시원한 국물맛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 사시미(회)를 뜰 때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랜 기간에 걸쳐 노하우를 익혀야 해요. 복어 살은 여느 생선살보다 탄력이 높고 질기므로 1∼2mm로 아주 얇게 회를 떠야 합니다. 흔히 습자지 두께 정도가 돼야 한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두꺼우면 씹을 때 감칠맛이 나지 않아요.”
비린내가 전혀 없이 담백하고 숙취에 좋은 참복 사시미를 최고 요리로 꼽는 강씨는 복 사시미를 학, 독수리 등 갖가지 모양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접시 위에 펼쳐보인다.
“일식집에서 일을 배울 때 스승인 일본인 주방장이 생선살로 온갖 형상을 만들어 손님에게 담아내가는 것을 봤는데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땐 칼에 손도 대지 못하던 시절이라 그저 어깨너머로 구경만 했죠. ‘이 다음에 나도 회를 뜰 때 연구해서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음식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요리에 정성과 공을 들인 만큼 맛으로 돌아온다’는 게 강씨의 지론이다. 하지만 요리는 결코 쉽지 않다. 그는 “요리는 불특정 다수에 의해 평가받는다. 누구나 먹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평가자가 되고 누구나 쉽게 판정을 내린다. 따라서 세상 일 중 가장 어려운 게 요리다”고 한다.
37년간 ‘전통 전주비빔밥’ 한 길을 걸어온 박병학(60)씨는 지난해 서울대 외식산업과정 총동문회에서 주관하는 ‘비빔밥 명장’ 칭호를 받았다. 지금까지 그로부터 요리 기술을 전수한 주방장만 100명에 달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전통 전주비빔밥은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던 3대 진상품 가운데 하나로 밥에 얹는 고명만 30여가지에 달한다. 고사리, 표고버섯 등 9가지 나물에 밤, 잣, 호두 등 견과류, 여기에다 황포묵과 육회까지 들어간다.
“비빔밥의 맛은 뭐니뭐니 해도 고명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나물마다 익히고 무치는 방법이 다 달라요. 고사리나 표고버섯처럼 말렸다가 물에 불려 쓰는 나물은 조선간장으로 간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간이 제대로 스며들어요. 반면 호박, 오이, 시금치, 미나리 같은 생나물은 소금으로 간을 하죠. 생나물의 색상을 선명하게 살려내면서 개운한 맛을 내기 위해서입니다.
볶아서 익히는 나물의 경우 그 특성에 따라 기름의 종류를 달리해야 합니다. 들기름 혹은 참기름을 구분해 사용해야 나물 고유의 맛이 살아나거든요. 예를 들면 취나물은 들기름에 볶고, 머우대 나물은 들깨를 넣고 볶아야 합니다. 또 비빔고추장은 찹쌀고추장에 다시마 가루를 넣어 볶아서 씁니다. 이때 찹쌀고추장은 담근 지 3년이 지난 걸 씁니다. 오래 숙성하지 않으면 떫은 맛이 나기 때문이죠.”
비빔밥에 쓰는 밥은 되거나 질어서는 안 되고 약간 고슬고슬한 것이 좋다. 박씨는 고슬고슬한 밥을 지으려고 물 대신 사골국물을 사용한다. 사골국물로 밥을 지으면 윤기가 흐르고 밥맛도 구수하다는 것. 하지만 날이 더울 때는 밥을 지은 후 30∼40분만 지나도 밥에서 뼈 특유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사골국물을 쓰지 않는다.
박씨에 따르면 전주비빔밥이 유명세를 탄 것은 돌그릇에 밥을 담아내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사기나 양은그릇을 썼는데 1960년대 말부터 돌그릇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돌그릇은 사기나 양은에 비해 보온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밥을 따뜻하게 유지시킬 뿐 아니라 맛도 훨씬 구수하게 만들어준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가내수공업 공장을 전전하던 박씨는 동네 어른의 손에 이끌려 식당에 발을 들였다. 기생이 손님을 상대로 가무를 선보이고 시중을 들던 고급 한정식 요정으로, 전주에서 소문난 곳이었다.
“처음 한 일은 대문 앞에 서서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큰 소리로 ‘어서옵쇼’ 해야 되는데 입이 잘 안 떨어져 고생깨나 했지요.”
“요리엔 정답이 없다”
그후 화장실 청소와 연탄 아궁이 담당을 거쳐 방 청소만 1년 넘게 하다 겨우 주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방에서 맨 처음 한 일은 칼 갈기. 솜씨가 서툴러 선배 요리사들로부터 수도 없이 머리를 쥐어박히며 일을 배웠다.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큰맘 먹고 주방장을 찾아가 물었죠. ‘칼은 어떻게 갈아야 합니까’라고. 그랬더니 ‘그냥 쓱쓱 갈아!’ 이러는 겁니다. 답답하고 화도 났지만 갈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붙어 있는 수밖에요.”
요리사가 될 결심을 한 것은 상차림 담당일 때였다. 상에 놓인 48가지 음식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 것이다. 그후 종업원들이 방에 모여 화투를 치는 한가한 틈을 타 빈 주방을 몰래 드나들며 요리 실습을 했다.
욕심을 부려 매달린 끝에 스무 살 때 한식 주방장이 됐고, 전주에 처음 문을 연 전주비빔밥 전문점 ‘한국관’에 취직했다. 한국관에서 꼬박 30년간 전주비빔밥을 요리하다 전주 덕진동에 문을 연 ‘고궁(古宮)’으로 자리를 옮겼다.
“역대 대통령을 비롯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들도 우리 식당을 자주 찾습니다. 그분들이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할 때 보람이 큽니다. 산해진미를 다 즐겨봤을 그분들로부터 진심어린 칭찬을 듣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
박씨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두 사람을 잊을 수 없다. 일제시대 때부터 한식요리 명인으로 이름을 떨친 이학봉과 김영철, 두 스승이다.
“한정식 집에서 인연을 맺었는데, 음식도 음식이지만 사람 됨됨이와 요리사가 지녀야 할 자세를 몸소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한 예로 식당에 처음 일 배우러 가면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험악한 욕설을 많이 듣습니다. 물건을 집어던지는 주방장도 있고요. 그런데 두 분은 저를 항상 ‘박군’이라고 부르면서 따뜻하게 대해줬습니다. 요리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인격에 크게 감복했죠. 그런 훌륭한 스승들을 만난 게 복이었습니다.”
요즘 요리를 배우는 젊은이들 중에 빨리 일을 배워 서둘러 독립하겠다는 이를 보면 박씨는 영 못마땅하다. 음식 맛이란 오랜 경험을 통해 오감으로 터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리에는 ‘정답’이란 게 없거든요. 같은 재료를 써서 똑같은 방법으로 만들어도 요리사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 아닙니까. 좀더 나은 맛을 창조하기 위해선 죽는 날까지 공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30여가지의 화려한 고명이 올라가는 전주비빔밥에는 ‘맛’과 ‘멋’이 깃들여 있다. 박씨에겐 선조의 풍류마저 전해진다.
그에게 음식은 예술이다. 눈으로 먼저 먹고 나면 마음을 당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이 끝이 없는 것처럼 음식에도 끝이 없다”는 것이다.
정권택(49)씨는 열여섯 살 때 고향인 전남 완도를 등지고 서울로 올라와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양식부에 어렵사리 취직했다. 6개월 동안 요리 근처에도 못 가보고 그릇만 죽어라 닦다가 쫓겨났다. 그 무렵 충무로 대연각호텔에 큰불이 났는데, 옥상에서 불구경 하느라 그릇 닦는 걸 깜빡 잊은 것.
어깨너머로 잠깐 들여다본 요리사의 세계지만, 요리사로 크려면 역시 소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똑같이 요리를 배워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반도호텔에서 쫓겨난 뒤 취직한 곳이 지금의 ‘라칸티나’. 국내 최초의 이탈리아요리 전문점이다. 그곳의 이탈리아인 주방장 밑에서 1년간 기초부터 배웠다. 생전 먹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을 만들려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요리법이 설명된 책자는 사장이 번역을 해줬지만, 주방장과 말이 안 통하니 세세한 궁금증을 풀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나마 바닷가가 고향인 덕분에 생선과 해물을 많이 쓰는 이탈리아 요리에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생선 맛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았다. 패류 등 각종 해산물에 관한 지식도 일찍이 경험으로 터득했다. 1년 뒤 주방장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정씨가 주방을 책임지게 된 후 28년이 흘렀다.
“이탈리아 요리는 해산물을 많이 쓰고 양념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한국 음식과 비슷해요. 그래서 다른 양식보다는 한국사람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향신료 중 몇 가지는 향이 너무 강해 거부감을 주기도 합니다. 요리 종류에 따라 섬세하게 양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죠.”
이탈리아 요리에 쓰이는 대표적 향신료는 바질과 오리가노다. 허브의 일종인 바질은 익히면 특유의 향이 없어지기 때문에 샐러드 재료로 이용하거나 요리를 장식할 때 주로 쓴다. 오리가노는 이탈리아 요리의 ‘감초’로 불리는데 피자와 토마토 소스를 만들 때 사용한다. 향이 무척 강해 손님이 한국인이냐 외국인이냐에 따라 양을 달리한다.
정씨는 롯데호텔 개점 초기인 1980년대 초, 이 호텔에 피자 제작 기술을 전수하는 등 우리나라에 이탈리아 음식문화를 개척한 요리사로서 자부심이 크다. 10여년 전만 해도 입소문을 듣고 ‘라칸티나’를 찾아오는 외국 손님이 전체 손님의 70∼80%에 달했기에 귀한 외화벌이를 한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손맛’의 열쇠는 정성
이탈리아 음식을 널리 소개해줬다고 주한 이탈리아대사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대사관저에 근무하던 이탈리아인 요리사를 ‘라칸티나’로 보내 새로운 현지 요리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라칸티나’는 이탈리아 요리사를 정기적으로 초청해 주방 직원들이 새로운 요리법을 익히게 하고 있다.
‘라칸티나’에서 손님들이 즐겨 찾는 메뉴의 하나는 해물 파스타인 ‘페스카토레’다. 조개류를 이용한 페스카토레를 만들 때 국수는 시금치를 갈아넣고 반죽해서 뽑는다. 해물 파스타의 기본 재료인 국수는 손님의 입맛에 따라 삶는 시간을 달리한다. 외국인은 약간 덜 익힌 국수를 좋아하지만 한국인은 부드럽게 씹히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완전히 익혀야 한다. 파스타 소스는 홍합, 백합조개, 새우, 관자 등을 끓여 토마토 소스와 함께 올리브 기름에 볶으면 완성된다.
“냉동 해산물은 맛이 제대로 나지 않아 전부 생물을 씁니다. 조개를 손질할 땐 모래를 깨끗이 제거해야 하는데, 이때 조갯살을 손으로 만지면 신선도가 떨어지므로 칼로 껍데기를 벌리고 흐르는 물에 씻어야 합니다. 소스를 만들 때는 불 세기와 조리시간에도 신경써야 해요. 해산물은 푹 익히면 질겨지거든요. 소스의 농도도 불 조절에 따라 달라집니다. 농도가 적당해야 깊은 단맛이 우러납니다.”
해물 파스타 외에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랍스터 요리다. ‘아라고스타 알 브랜디’는 싱싱한 랍스터를 손질하자마자 브랜디에 적셔 즉석에서 구워낸 것으로 소스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 때문에 랍스터의 순수한 맛과 향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아라고스타 알라 텔미도르’는 치즈에 크림소스를 얹어 구운 것으로 랍스터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대중적인 요리다.
정씨는 랍스터 요리의 재료로 ‘뻘가재’로 불리는 국내산을 주로 쓴다. 몸집과 집게가 큰 외국산 가재는 단가가 비쌀 뿐 아니라 살이 많고 탄력이 좋아 입 안에 들어가면 퍽퍽한 느낌을 준다. 반면 국내산 가재는 살이 부드럽고 달달한 맛이 난다고 한다.
“이탈리아 음식은 대체로 느끼한 편인데 한국 손님들은 대부분 느끼한 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약간 매운 맛이 나도록 양념을 첨가하죠. 반면 일부러 우리 가게를 찾아오는 이탈리아 손님들은 변형된 맛을 싫어하기 때문에 전통 이탈리아 요리의 맛을 그대로 살려 조리합니다. 이처럼 손님의 식성에 따라 같은 요리라도 그때그때 맛을 달리해야 하기 때문에 조리하기가 까다로운 편이죠.”
정씨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손맛’의 핵심이 정성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요리를 하는 동안에는 잡담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불 앞에 꼼짝 않고 붙어 서서 한눈 한번 팔지 않는다.
특급호텔 등에서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스카우트를 제의하기도 했지만, 그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주방까지 찾아와 ‘정말 맛있게 먹었다’며 악수를 건네는 단골손님들을 두고 어떻게 이곳을 떠나냐”는 것이다.
그뿐인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1년간 일을 쉬고 있을 때도 ‘라칸티나’ 사장은 새로 주방장을 들이지 않고 그의 자리를 비워뒀다. 그런 인간적 정리 때문에라도 떠날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