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10월 북측 근로자 첫 사망
- 손가락 절단사고 7건 중 북한 근로자 5건
- 남한 기업, 北 근로자 산재대책 월 임금 15% 사회보험료가 전부
- 탈북자, “北 산재 근로자 생계유지 곤란”
파노라마로 촬영한 개성공단 전경.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냄비세트가 출고된 지 하루 만에 서울의 백화점에 진열돼 단 몇 시간 만에 매진되는 등 남측에서 남북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가 한창 부풀어오르던 때였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개성공단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며 공단 내 추가사고 예방을 위한 안전대책 및 응급치료 체계 구축의 필요성을 일제히 제기했다.
하지만 왕씨는 개성공단의 첫 번째 사망자가 아니라 두 번째 사망자였다. 통일부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 홍준표 의원(한나라당)에게 제출한 ‘개성공단 남북 인력 산업재해 현황 및 처리결과’ 자료에 따르면 왕씨 사건보다 2개월 앞선 지난해 10월17일 북측 근로자 한 명이 공사현장에서 추락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2004년 5월부터 올해 8월까지 남측 근로자 10건(사망 1건), 북측 근로자 10건(사망 1건) 등 모두 20건의 산재사고가 개성공단에서 발생한 사실도 확인됐다.
시기별로 보면 남측 근로자 사고는 2004년 4건, 2005년 6건으로 집계됐고, 북측 근로자 사고는 2004년 10월 사망사고 1건을 제외한 9건 모두 2005년에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개성공단에 입주한 남한 기업체가 지난해 12월부터 정상 가동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남측 근로자는 ‘사다리에서 추락’ ‘20kg 물체를 들다 허리부상’ ‘운전 중 지장물과 충돌’ ‘바닥 도장작업 중 넘어져 머리부상’ 등 공단 조성작업 과정에 비교적 경미한 부상을 당한 경우가 많다. 손가락 절단 등 근로자가 중상을 입은 건수는 2건. 올해 4월 이후 8월19일 현재까지 신고된 산재 건수는 없다.
반면 북측 근로자는 부상사고 9건 가운데 ‘프레스에 손가락 절단’ 등 손가락 절단사고 5건, ‘버스 쇼바 스프링 교체 중 부상’ ‘사출작업 중 손등 화상’ 등 공장 내에서 작업하다 중상을 입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북측 근로자의 손가락 절단사고는 올해 1월11일과 14일, 24일 등 1월 한 달에만 3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통일부는 2004년 2건의 사망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다가 손가락 절단사고가 빈발하자 뒤늦게 대책마련에 나섰다.
南 기업, 北 근로자 사망해도 책임 없어
통일부는 개성공단 산재사고와 관련해 “올해 2월 관리위원회로 하여금 한국산업안전공단의 기술지원을 받아 개성공단의 산업안전에 대한 현장 점검을 실시하고 개선, 시정토록 기업에 권고했다”고 밝혔다. 또한 “4월부터 개성 현지 관리위원회에 산업안전보건 전문가를 파견, 상시적인 점검과 개선체계를 구축했다”고 덧붙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늑장대처의 전형을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통일부의 이러한 대책이 개성공단 근로자에게, 특히 북측 근로자에게 얼마나 실효를 거뒀는지는 의문이다. 현지에 산업안전보건 전문가가 파견돼 상시 점검체계가 구축됐다는 올해 4월 이후에도 북측 근로자의 산재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6월과 7월에 각 1건에 이어 8월에만 3건의 사고가 발생했고, 그 중 2건은 손가락 절단 사고였다.
이처럼 북측 근로자에게 산재사고가 집중되는 데는 기업의 안일한 사고방식도 한몫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북측 근로자의 산재사고에 대비해 부담하는 비용은 개성공업지구 노동규정에 따라 북측 근로자 1명당 월 노임 총액의 15%에 해당하는 사회보험료를 내는 것이 전부다. 사회보험료의 용도는 무상치료와 사회보험, 사회보장 등. 북측 근로자가 사망하는 등 어떠한 산재사고가 발생해도 기업의 추가 부담은 없다.
그러나 통일부는 북측 근로자의 잦은 산재 발생 원인을 북측 근로자에게 떠넘기고 있다. 다음은 통일부가 국회에 제출한 개성공단 산재와 관련된 답변자료 중 일부다.
“개성공단 내 산재사고는 사업 초기 단계에서 남측의 기계·설비에 익숙하지 않은 북측 근로자들이 남측 관리자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서 또는 안전의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작업에 임하거나 임의로 기계를 작동하다 발생한 사고가 많았다.”
홍준표 의원실 관계자는 이에 대해 “말이 안 되는 얘기”라며 “개성공단이 1970~80년대 산업화시대의 유물인 노동집약적 산업구조로 조성된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고, 충분한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나몰라라 하는 정부도 문제다. 이러다 남한에 대한 북측 근로자들의 반감이 커질 경우 개성공단 사업은 통일을 앞당기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우려했다.
2004년 12월부터 정상 가동 중인 개성공단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들.
더 심각한 문제는, 산재를 당한 북측 근로자에 대한 보상이나 재활치료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전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개성공단에서 의료지원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YMCA 그린닥터스 소속 김원덕 전문의(동아대학병원 가정의학과)는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측 근로자가 산재를 당했을 때는 주로 그린닥터스에서 운영하는 개성병원에서 응급조치하고, 북측 의사가 곧바로 개성시내 병원으로 환자를 후송해갔다. 그뒤 경과에 대해서는 북측에서 아무런 통보도 해주지 않아 우리 쪽에서는 알 수 없다”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그런데 최근 탈북자들에 따르면 개성공단에서 산재를 당해 노동력을 상실한 북측 근로자들이 생계유지가 곤란할 정도로 피폐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한 경우에는 가정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전언이다.
원인은 북한사회의 특수성 때문이다. 북한사회에는 사회보험 제도가 아예 없다. 한 탈북자의 설명이다.
“사회보험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북한에도 산재 보상이 있긴 하지만 남한처럼 돈을 주지는 않는다. 산재를 당해 노동력을 상실한 경우 병원에서 사회보장 감정을 받아 ‘사회보장등록’이라는 것을 한다. 그러면 놀면서도 배급은 탈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그런데 요즘에는 배급이 안 나오니 까딱하면 굶어죽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 안 나가고 장사를 하기 위해 의사에게 돈을 주고 사회보장환자로 등록하는 경우가 있는데, 걸리면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
결국 개성공단 입주기업이 북한 정부에 납부하는 사회보험료가 남북간에 합의된 무상치료와 사회보험, 사회보장 등을 위해 제대로 사용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개성공단 산재 환자에 대한 재활치료 등 후속조치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통일부는 개성공단 산재와 관련, “향후 안전사고 예방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도록 가칭 산업안전보건원칙(안)을 마련해 북측과 협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