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주와 정도전은 고려 말 대표적인 지식인 정치가였다.
- 두 사람은 똑같이 개혁을 추진했지만, 방법론에선 그 방향을 달리했다.
- 체제 내 개혁을 추진한 정몽주는 충(忠)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고, 혁명적 개혁을 꿈꾼 정도전은 조선 왕조의 모든 개혁정책을 주도했다.
역사는 마땅히 개인, 다시 말해 집합적 개인이 만든다. 하지만 역사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집합적 개인 못지않게 구조적 조건 또한 중요하다. 개인의 의지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이 의지를 제한하는 구조적 조건이 강고할 때 그 의지는 제대로 실현되기 어렵다. 이 점에 주목해 사회학은 흔히 구조를 중시하는 시각을 구조주의, 개인을 중시하는 시각을 자원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역사 해석의 틀에 대해 나는 절충적 시각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주목하는 역사 변동의 세 가지 주요 요소는 ‘구조적 강제(structural constraint)’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 그리고 ‘전략적 선택(structural selection)’이다. 먼저 구조적 강제란 말 그대로 구조가 강제하는 힘이다. 제도로서 정착된 구조는 일종의 관성을 갖게 되며, 이러한 관성은 그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집합적 개인의 의지를 제한한다.
한편 경로의존성은 그 제도에 내재된 개별 국가 또는 사회의 역사적 특성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봉건사회라 하더라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으며, 제도에 내재된 이러한 경로의존성은 사회 변동에 일정한 영향을 주게 된다. 동일한 전통사회라 하더라도 중국, 한국, 일본의 경우 그 경로의존성은 유사하면서도 사뭇 다르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 요소가 전략적 선택이다. 전략적 선택이란 위에서 말한 구조적 강제와 경로의존성 아래 집합적 주체가 자기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선택하는 일종의 기획이다.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집합적 의지가 실현될 수도, 좌절될 수도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략적 선택과 구조적 강제, 그리고 경로의존성 간의 관계다. 구조적 강제가 이완되고 경로의존성이 약화될 때 사회 변동의 가능성은 높아지며, 이때 어떤 전략적 선택을 모색할 것인가에 따라 역사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전략적 선택과 시대정신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그 경계가 모호한 직업 중 하나가 지식인과 정치가다. 대다수 지식인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연마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여기에는 학문적 연구와 정치적 실천을 통합하고자 한 유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물론 서경덕이나 조식처럼 재야의 학자로 연구에만 전념한 이도 없지 않았지만, 이황과 이이, 송시열과 허목, 박지원과 정약용처럼 학문과 정치를 병행한 이들이 주류를 이뤘다(이점에 주목해 우리 전통사회의 주요 지식인 다수를 ‘지식인 정치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유교사상에 입각해 사회 개혁을 모색한 것은 멀리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과 고려 초기 최승로의 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성리학자임을 표방한 이들이 본격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동한 시대는 고려 후기였다. 신진 사대부 세력이 바로 그들이며 이제현,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은 그 대표자였다. 이들은 한편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유교사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유교적 질서의 현실적 구현이야말로 이들의 정치적 기획이자 시대정신, 다시 말해 전략적 선택이었다. 고려 후기에 씨가 뿌려지고 조선 개국을 통해 구체화된 이러한 시대정신은 이후 조선시대 500년 내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기획에서 앞으로 다룰 이황과 이이, 송시열과 허목, 박지원과 박제가, 정약용과 김정희는 모두 주자학을 옹호하든 비판하든 이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
시대정신으로서 유교 이념이 갖는 의미는 현재에도 살아 있다. ‘한국적 공동체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개인주의에 맞서는 공동체주의는 여전히 그 영향력이 작지 않은바, 한나라당이 제시하는 ‘공동체 자유주의’나 민주당이 제시하는 ‘기회·정의·공동체’의 뉴민주당 선언 3대 가치는 구체적인 증거다. 공동체 자유주의나 기회·정의·공동체가 유교적 가치의 현대화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시대정신으로서의 공동체와 개인의 조화를 모색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갖는 이른바 후기전통적 사회(post-traditional society)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바로 이 유교사회의 기초를 세운 이들이다. 고려 말기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던 두 사람의 삶은 널리 알려졌듯이 대단히 극적이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노선을 함께했지만, 조선의 개국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정몽주가 고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면, 정도전은 조선을 세우기 위해 개국을 주도했다.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
영욕으로 점철된 정도전의 삶은 오토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의 일생을 떠올리게 한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 통일을 성취하고 후진국 독일을 단시간 안에 유럽의 강자로 등극시켰지만, 빌헬름 2세와의 갈등으로 결국 총리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고려 말 목숨을 내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다음 조선 왕조 개국을 주도했으나 태종(이방원)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결국 목숨까지 잃고만 정도전의 일생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지식인 정치가’의 길을 보여준다. 기록에 따르면 정도전의 집터는 현재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어쩌다 이 부근을 지날 때면 그의 비극적 최후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고, 그가 남긴 현재적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임 향한 일편단심’
정몽주(鄭夢周)는 1337년(충숙왕 복위 6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달가(達加)이며, 호는 포은(圃隱)이다. 정운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60년 문과시험에 합격했으며, 1362년 예문검열·수찬이 되었다. 이후 정몽주는 대내 개혁을 모색하고 대명(對明) 외교를 주도하는 등 고려 후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활동했다.
정몽주의 일생은 위기의 고려를 쇄신하는 데 일관했다. 그는 이성계 세력과 연대해 친원(親元) 권신세력과 맞서서 기울어가는 고려를 바로 세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정도전, 조준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反)이성계 세력의 중심을 이뤘다. 권력 갈등이 예각화되는 과정에서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는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죽었다.
우리 역사에서 정몽주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정몽주의 비극적 최후는 곧 고려의 최후이기도 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살해될 것을 미리 알았으며, 그래서 말을 거꾸로 타고 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비극적 최후 직전에 이방원은 널리 알려진 ‘하여가’로 정몽주를 회유했지만,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했다. ‘단심가’의 메시지는 고려에 대한 ‘임 향한 일편단심’에 집약돼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가를 처음 배운 게 초등학교 시절인데,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고결한 비장함이 가득하다. 정몽주는 유교적 의리 문화의 상징이다. 의리란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다. 전통사회에서 신하가 한 왕조 또는 한 군주를 섬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이익과 권력의 향배에 따라 도리를 저버리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사육신과 생육신은 정몽주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그들은 단종에게 충을 다하기 위해 세조를 거부했다. 당대에는 죽음을 선택했지만, 후대에는 영광을 얻었다. 정몽주의 ‘임 향한 일편단심’은 사육신 성삼문의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과 정확히 짝한다.
도학의 시조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말년에 한 강연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한 바 있다. 신념윤리가 선과 악의 구분에서 도덕적인 선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면, 책임윤리는 선과 악의 구분과 함께 그 결과에 대해 무제한적 책임을 지는 태도를 의미한다. 정몽주의 선택은 책임윤리보다는 신념윤리에 기반을 둔 것이다. 결과를 고려한다기보다는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정치적 선택을 결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정몽주는 우리 역사에서 신념윤리를 대표하는 ‘지식인 정치가’의 자리를 차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죽인 태종 시대에 복권된 정몽주는 유교 질서의 한 축을 이루는 충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정신은 조선 시대 내내 추앙된다. 정몽주는 ‘정몽주→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학의 시조로 자리매김했으며, 조선 후기 성리학의 최대 권위자였던 송시열도 “섬기던 왕조에 충성을 다하다가 천명이 끝나 사직이 바뀜에 그 인륜을 붙들고 천이(天彛)를 세운 공은 진실로 천지에 높고 일월에 빛날 만하다”고 칭송한 바 있다.
누구는 정몽주의 기획이 과연 가능한 것이었는지 물을 수도 있다. 대외적으로 친명(親明)정책을 추진하고 대내적으로 사회·경제구조를 개혁해 고려 왕조를 지속시키는 것이 물론 가능했을 수도 있다. 역사를 결과론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정도전의 기획이 아니라 정몽주의 기획이 성공했을 경우 고려 왕조의 수명은 연장됐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이러한 왕조의 수명 연장이 어디까지 가능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어느 사회 또는 왕조이건 그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피지배층의 자발적 동의를 뜻하는 헤게모니가 필요하다. 헤게모니를 물론 정치적 정당성으로 바꿔 써도 좋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정치적 정당성이 고갈된 체제는 결국 몰락하고 새로운 체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이뤄져야겠지만, 정몽주가 활동했던 시기에 고려 왕조가 갖고 있던 헤게모니는 이미 상당히 고갈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신진 사대부 세력의 등장은 고려 왕조의 쇄신을 가져왔고, 특히 1388년 조준 등이 주도한 토지개혁의 하나로 과전법의 시행은 기득권 세력을 혁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제는 이러한 개혁에도 고려 왕조에 대한 정치적 정당성이 이미 상당히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전통사회에서 왕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군주에 대한 충성이 요구되며, 이러한 충성은 합리적 방식이 아니라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에 의해 재생산된다. 요컨대 군주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피지배층의 자발적 동의는 왕조의 지속을 위한 매우 중요한 사회적 조건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고려 왕조에 대한 피지배층의 동의는 무신 시대 이후 서서히 약화됐으며, 원나라 지배 아래서 그 경향은 더욱 강화됐다. 이 과정에서 왕조의 권위를 뒷받치는 데 기여한 기성 불교 및 유교의 상징적 자원은 고갈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새로운 이념적 대안으로 성리학이 부상했다. 신진 사대부 세력의 핵심 이념적 기반이 된 성리학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한 포괄적인 사회개혁 사상이라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당시에 나타난 구조적 강제의 변화와 이완이다. 대외적으로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세력 교체가 진행되고 대내적으로 기존 왕조의 약화와 성리학의 부상이 가시화되면서 새로운 왕조로의 이행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다. 고려 왕조를 지탱하고 있던 구조적 강제와 경로의존성이 이완되고 약화될 때 왕조 교체라는 새로운 전략적 선택이 실현될 가능성은 커진다.
바로 이런 조건 아래서 정몽주가 선택한 길은 일종의 보수적 기획이었다. 보수라고 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왕조를 유지하되 개혁을 모색했던 것이 당시 보수적 개혁의 과제였으며, 정몽주는 이 기획을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더욱이 이 기획은 성리학이 가르치는 옳고 그름의 신념윤리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정몽주가 남긴 저작은 ‘포은집’이다. ‘포은집’은 세종 때 그의 아들인 종성과 종본이 선친의 시문 등 여러 글을 수집해 편찬한 책이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증보·간행됐다. 정몽주의 문학 및 학문은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당시 고려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데 그 중심이 놓여 있었다. 그는 여전히 영향력이 큰 불교를 비판했으며,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민간 풍속과 의복제도 등을 개혁하고자 했다.
‘포은집’에는 그가 남긴 시편이 여럿 전한다. 그 가운데 내 눈을 잡아끈 시가 ‘경지의 시에 차운하여 삼봉에게(次敬之韻贈三峰)’라는 작품이다.
“국정을 돕고 시폐 바로잡음에 재주 이미 부족하니 / 어릴 때 익힌 것 나이 들어 어지러워짐을 스스로 한탄하네.
삼봉의 은자 누가 닮을 수 있으리 / 처음에 세운 뜻 평생 동안 변하지 않네.”
후배이자 동지였던 정도전에 대한 정몽주의 애정이 듬뿍 담긴 시다. 정도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삼봉집’에는 정도전이 남긴 ‘차운하여 정달가에게 부치다(次韻寄鄭達可)’라는 작품이 실려 있다. 달가는 앞서 말했듯이 정몽주의 자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선배이자 동지였던 정몽주에 대한 정도전의 존경과 우정이 잘 표현돼 있다.
“지란은 불탈수록 향기 더하고 / 좋은 쇠는 갈수록 빛이 더하네.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를 하네.”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적으로 권력은 타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힘이다. 구체적으로 권력이란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점에서 권력은 인간 존재의 그늘을 이룬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이 점에서 권력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은 정치의 본질을 이룬다.
역사를 돌아보면 권력투쟁 앞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오랜 동지의 관계도 무색해지는 경우가 많다. 여말선초(麗末鮮初)라는 격변기 속에서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가 그러했으며, 정몽주와 정도전의 관계도 그러했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서로에게 부치는 시는 평생을 함께한 이들의 깊디깊은 우정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어느 시점에서 함께 걸어온 길은 돌연 갈리고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두 사람이 선택한 엇갈린 길 앞에서 새삼 권력이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은 1342년(공민왕 11년) 충청북도 단양에서 태어났다. 자는 종지(宗之)이고, 호는 삼봉(三峰)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이며, 어머니는 우연의 딸로 알려져 있다. 평생 정도전은 자신의 모계 문제로 곤욕을 치렀는데,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단양 지방에 이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도전의 가계가 간단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도전은 1362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곧이어 충주사록 등을 역임했다. 아버지와 이곡의 교유관계가 인연이 돼 정도전은 이곡의 아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김구용, 박상충, 박의중, 윤소종 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했다. 신진 성리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정도전은 자신의 학문적, 정치적 야망을 서서히 키워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도전의 삶은 세 번에 걸쳐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첫 번째 계기는 1374년 우왕이 즉위하고 이인임 세력이 집권하면서 전남 나주 회진현으로 유배를 간 일이다. 유배와 유랑으로 이어진 이후 10년 동안 정도전은 당시 농촌 현실을 직접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정책 연구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는 1383년 함경도 함주의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막하에 들어간 일이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와 정치적 운명을 함께했다. 고려 말기 정치적 격변을 부른 위화도 회군, 우왕 폐위와 창왕 옹위,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위 등에서 정도전은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전하는 바로는 정도전은 이성계와 자신을 한나라 고조 유방과 그의 군사 장량에 비유했다고 한다.
세 번째는 1392년 이성계를 새로운 조선의 왕으로 옹립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도한 일이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 이어 조선 왕조의 2인자였다. 한영우 교수가 지적했듯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태조 원년), 군사들을 훈련하고(태조 2년), 병권을 장악하며 한양을 설계하고(태조 3년), 궁궐 및 도성문 이름을 짓는(태조 4년) 등 ‘조선의 설계자’였다.
정도전의 삶에서 비극이 잉태하기 시작한 것은 1396년 표전문(외교문서) 사건으로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그가 추진하던 요동 정벌이 좌절되면서부터였다. 결국 그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됐다(1398년 태조 7년). 그의 나이 57세였지만, 돌아보면 참으로 긴 일생이었다.
일관된 개혁노선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 이후 적잖이 이뤄졌다. 정도전 연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학자는 한영우 교수다. 그는 1973년 ‘정도전 사상의 연구’를 출간했는데 여기서 정도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했다. 한 교수는 그때까지 조선의 건국이념을 사대주의, 농본주의, 억불숭유주의로 보던 것에 맞서 민본주의와 민족적 주체성으로 제시했고, 정도전의 사상에서 그 기초를 찾았다.
현재의 기준이 아니라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한 교수의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 왕조의 쇠퇴라는 대내적 상황과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대외적 상황의 변화라는 구조적 강제의 변화 속에서 정도전은 성리학에 입각한 새로운 왕조창업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모색했으며, 이는 조선 시대의 개막으로 귀결됐다.
정도전의 개혁성은 정몽주와 비교할 때 선명해진다. 정몽주가 보수적 개혁을 통한 고려의 쇄신을 자신의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면,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이라는 더 큰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진보적 개혁을 모색한 셈이었다. 비록 권력투쟁에 의해 희생됐지만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 왕조는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됐으며, 그가 제시한 일련의 정치·경제·문화의 원리는 조선사회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했음에도 상대적으로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태종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희생됐다는 사실과 조선 왕조의 유교 사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점에서 삼봉의 민본주의와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한 한영우 교수의 연구는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를 재평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더불어 1998년 TV 드라마로 방영된 ‘용의 눈물’도 정도전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막 개국한 조선의 2인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권력투쟁을 생생히 담은 이 드라마에서 정도전은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나 시대를 고뇌하는 동시에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인물로 그려진다. 역사 속 정도전의 실제 모습은 이 드라마 속의 인물과 매우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몽주가 신념윤리의 지식인 정치가라면, 정도전은 책임윤리의 지식인 정치가다. 토지 문제를 중심으로 한 대내 정책과 대명 외교를 중심으로 한 대외 정책 모두에서 정도전은 성리학에 입각해 일관된 개혁 노선을 견지하고, 그 정책의 결과를 중시했다. 개혁을 위해 당시로는 혁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던, 실제로 ‘역성혁명’이란 표현이 사용됐던 왕조 교체를 감행했다.
사회과학의 시각에서 정도전의 사상을 흥미롭게 조명한 이는 최상룡 교수다. 최 교수는 여말선초에 활동했던 세 명의 정치가(정몽주, 이방원, 정도전)에 대한 유형화를 시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정몽주는 ‘이념형의 정치가’, 이방원은 ‘권력형의 정치가’, 정도전은 이념과 권력의 ‘통합형의 정치가’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몽주가 불사이군이란 신념에 기반을 두고 조선 개국에 반대했다면, 이방원은 정치 이념보다 권력의지에 철저했다. 한편 정도전은 성리학 이념에 기반을 둔 조선 왕조 건설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동시에 이를 위한 권력의지 또한 강력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정치의 본질이 이념과 권력의 상호작용에 있는 한 세 사람 가운데 정도전이 가장 주목할 만한 정치가라고 평가한다.
‘왕권’이냐 ‘신권’이냐
‘삼봉집’은 정도전이 남긴 문집이다. ‘삼봉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우왕 말년으로 추정된다. 조선 개국 후 1397년에 개간됐고, 1465년에 증손자 문형에 의해 중간됐다가 1791년 정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다시 편찬하게 했다.
‘삼봉집’의 내용은 크게 시문과 ‘조선경국전’‘경제문감’‘경제문감별집’‘불씨잡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사회과학적으로 이 가운데 특히 주목을 요하는 저작은 후자의 네 저작이다. 먼저 ‘조선경국전’은 조선 왕조 관제의 대강을 서술해 조선의 통치이념과 조직의 종합적인 체계를 제시한 저작이다. ‘주례(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군력 체제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 군사제도의 정신을 가져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 군현제, 부세제, 서리제의 장점을 수용하고 있다.
한편 ‘경제문감’은 군신의 직능과 관리 선발 방법을 다룬 ‘조선경국전’의 한 부분인 치전(治典)의 내용을 보완한 것이며, ‘경제문감별집’은 군주의 역할을 제시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씨잡변’은 불교의 교리를 비판하고 그 사회적 폐단을 고발한 저작이다.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재상제다. ‘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은 재상이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통치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어 ‘경제문감’에서는 중국과 우리 역사에서 재상 제도의 변천을 살펴봄으로써 재상제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설령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재상이 현명하면 정치가 잘 운영될 수 있다는 견해는 정도전이 얼마나 재상제를 옹호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정도전의 정치적 기획은 재상을 중심으로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 관료 지배체제를 기반으로 하되, 그 통치권이 백성들의 삶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는 민본주의를 추구한 것이었다. 비록 성리학에 입각한 전통적 방식이었지만, 정도전은 백성의 헤게모니 창출을 위한 토지제도를 포함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중시했으며, 이러한 제도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했다. 어떻게 보면 정도전은 행운의 ‘지식인 정치가’라고 할 수도 있다. 구조적, 역사적 조건의 이완이 진행되던 시기에 왕조 교체라는 가히 혁명적인 전략적 선택을 추진했고 또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재상제는 새로운 정치적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영우 교수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정도전이 재상권 강화를 주장한 것은 현실적으로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가지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적 정치질서가 재상 중심 체제를 강조한 것 또한 사실이다.
왕조의 정치를 군주 중심으로 할 것인지, 재상 중심으로 할 것인지는 결국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시할 것인지를 묻는 것으로 전통사회 정치의 최대 문제 가운데 하나다. 조선 전기에 이 문제는 ‘경국대전’에서 재상 중심 체제라는 다소 애매한 형태로 규범화됐지만, 이 이슈를 둘러싼 논쟁은 이후 조선 시대 내내 되풀이됐다. 사회학적으로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변동은 그 권력의 원천이 왕에서 국민으로 이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전통사회에서도 재상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군주와 관료 사이의 경쟁은 대단히 치열했다.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철학에는 자신의 비극적 결말이 배태돼 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보다 신권을 중시한 그의 정치관은 왕권 세력에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정도전은 사병(私兵) 혁파를 주도함으로써 당시 사병을 보유하고 왕권을 대표하던 이방원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정몽주 세력에 맞서 함께 힘을 모았던 이들은 다시 권력을 놓고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이 와중에서 정도전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활동했던 주요 무대는 지금은 갈 수 없는 고려의 수도 개경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후 정도전은 여기 서울에도 적잖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정도전은 한양으로의 천도를 주도하고 궁궐, 도성문, 그리고 방의 이름을 지었다. 서울을 대표하는 궁궐인 경복궁의 네 문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은 이도 정도전이었다.
“때는 양주 고을이여 / 시위에 신도 경승이셨다
(중략)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
덕중하신 강산 좋으매 / 만세 누리소서”
경복궁에서 생각하는 정도전의 기획
1394년 한양 천도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정도전이 지은 ‘신도가’다. 정도전은 조선을 설계한 동시에 서울을 설계했다. 설이 오기 전 지난 1월 말 오후 경복궁을 찾았다. 학교에서 택시를 타고 정부종합청사 앞에 내려 걸어가 광화문 앞에 섰다. 경복궁은 남북이 긴 장방형으로 배치된 궁궐이다. 남쪽의 정문은 광화문, 동문은 건춘문, 서문은 영추문, 북문은 신무문인데, 이 이름들은 사신(四神)을 상징한다. 고종 때 중건된 건물의 배치를 보면, 남북 일직선상에 광화문·홍예문·영제교·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이 이어져 있었다.
외조공간(관청들의 배치 공간)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그리고 건춘문 안과 영추문 안에 배치돼 있었다. 여기에는 승정원·홍문관·예문관·상서원·사옹원·관상대·빈청·오위도총부·수직사·내의원·검서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정무공간(왕이 정치하는 공간)은 근정전과 사정전의 회랑 안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생활공간은 사정전 북쪽으로 침전 공간인데, 여기에는 강녕전·교태전·연길당·경성전·연생전·함원전·인지당·자경전·만세전·흥목전·함화당·집경당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경복궁 안에는 향원지를 포함한 휴식공간과 경회루를 포함한 외교공간 등이 있었다.
조선 왕조를 대표하는 경복궁 안에 대표적인 공간을 꼽으라면 왕이 정사를 보던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을 들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경복궁을 방문했을 때 선생님이 우리를 가장 먼저 데리고 간 곳도 바로 근정전이었다. 국보 223호인 근정전의 이름을 지은 이는 정도전이었다. ‘삼봉집’을 보면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게으르면 황폐되는 것은 필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정사의 큰 것이겠습니까. (중략)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처리하고, 낮에는 어진 이를 방문하고, 저녁에는 조령(朝令)을 만들고, 밤에는 몸을 편히 쉰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인군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국왕의 부지런함을 강조함으로써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의 역할을 계몽하고자 했다. 여기 근정전과 사정전은 임진왜란으로 불타기 전까지 세종을 포함한 왕들이 정사를 논하던 곳이다. 이들뿐이 아니다. 황희와 맹사성, 신숙주와 한명회, 이황과 이이 등이 바로 여기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그뿐 아니다. 고종 시대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권력투쟁을 벌인 곳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곳도, 개화파 김옥균과 양명학자 이건창이 품었던 희망과 좌절이 함께 했던 곳도 바로 경복궁이었다.
근정전 앞뜰에서 조선시대를 돌아보고, 그 흥망성쇠를 반추하고, 무엇보다 구조적 강제와 경로의존성 아래 과감한 전략적 선택을 추구했던 정도전의 일생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새로운 시대의 문은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구조적 조건과 경로의존성을 지혜롭게 헤아리고, 최선의 전략적 선택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중심에는 전통사회든 현대사회든 백성 또는 국민 다수의 물질적, 정신적 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이 놓여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지식인 정치가’ 정도전이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정도전이 서울에 남긴 흔적이 경복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의도에서 발표가 있어 건춘문 앞에서 다시 택시를 탔다. 서대문 사거리를 가로질러 아현동과 공덕동을 지나니 가까이 마포대교가 보였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해인 1398년 정도전이 남긴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의 하나인 ‘서강에 몰려 있는 배들’(西江漕舶)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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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의 배들 서강에 모여들어 / 일만 섬 곡식 용틀임하듯 풀어놓네.
창고에 가득한 저 곡식 보소 / 먹을거리 넉넉해야 바른 정치라네.”
정치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 백성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정치의 답은 너무나도 분명한데, 조선 왕조가 끝난 지 100년이 가까워오건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 답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 역사는 정도전이 꿈꿨던 시대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유난히 추위가 매서웠던 올겨울, 뒤로는 흐릿한 삼각산을, 앞으로는 얼음 조각들이 떠다니는 한강수를 바라보면서 정치의 의미를 나는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몽주는 누구인가 1337년 경북 영천 출생. 1392년 사망. 고려 말기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정치가. 신진 사대부 세력을 이끌었던 그는 이성계 세력에 맞서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음. 사후 도학의 시조이자 만고 충신으로 추앙됨. 주요 저작으로는 ‘포은집’이 있음. 정도전은 누구인가 1342년 충북 단양 출생. 1398년 사망. 고려 말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조선 왕조 창업의 일등 공신. 사후에 평가절하되기도 했지만, 최근 조선 사회의 설계자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음. 주요 저작으로는 ‘조선경국전’ 등을 포함한 ‘삼봉집’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