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은 전셋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2009년 글로벌 외환위기 이후 치솟기 시작한 전셋값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주택 시장에는 새로운 풍속도가 나타나고 있다. 부족한 돈으로 살 만한 집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서민들의 모습을 취재했다.
#1. 4000여만원의 여유자금에 대출 1억원 계획하고 부동산투어 시작. 성남시 수정구 빌라촌의 투룸 전세 찾았는데 단지 내 90% 이상이 법정 가압류 처분 상태라 전세자금 대출이 안 되는 관계로 통과. 계획한 돈에 맞춰 수서동의 20년 된 아파트를 봤다가 너무 낡아서 기겁. 야탑동 주공아파트 1층에 나온 집을 보러 갔더니 부동산 사장님 왈 “오늘 아침 계약했는데요.” 오피스텔 쪽은 전세자금 대출 안 돼 포기. 다음 주에 여자친구와 둘 다 회사에 휴가 내고 좀 더 본격적으로 부동산 투어에 나설 예정.
#2. ‘반월세’로 방향 선회. 일주일간 오피스텔 10여 곳 둘러본 뒤 비로소 맘에 드는 집 발견. 예비 장모님과 계약하러 가는 도중 중개소로부터 “이미 다른 사람과 계약했다”는 문자 받음. 서둘러 다른 집 계약하기 위해 장소 이동. 지하철역으로 픽업 나온 중개소 직원이 보자마자 씩씩 열을 냄. 30분 전에 내가 계약하려던 집을 바로 옆 부동산에서 채갔다고. 신혼집 구한다고 칼퇴근하는 것도 회사 눈치 보이고, 결혼식 날짜는 다가오는데 완전히 아노미 상태.
#3. 마지막 희망이던 투룸 오피스텔이 이틀 사이 다른 신혼부부에게 넘어감. 맥 빠진 출근길 지하철에서 중개소 직원의 전화 받음. 신혼부부가 방금 계약 취소했다고. 토요일 오후에 집 보러 가기로 했는데 그전에 누가 채갈까봐 금요일 하루 종일 안절부절. 마침내 계약서에 도장 찍고 중개소 사장님께 “감사합니다” 연발.
보름 동안 분당과 강남 일대를 누비며 수십 채의 집을 둘러본 김씨는 그 사이 계약을 중간에 가로채이는, 일명 “싸다구를 맞는” 경험을 세 번이나 했다.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인 방 2칸짜리 신혼집을 구하기까지 겪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그는 “결혼식을 두 달 넘게 남겨두고 집을 보러 다녔기 때문에 처음엔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전세대란을 처절하게 겪으면서, 나중엔 자칫하면 집도 없이 결혼하게 될까봐 엄청 초조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전월세 전쟁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매달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는 전세금 때문에 국민 10명 중 4명이 ‘전월세 전쟁’을 치르고 있다. 부동산포털 닥터아파트에 따르면 올 초부터 9월 중순까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아파트 전세가 상승률은 8.06%다. 지난 한 해 변동률 7.75%를 이미 넘어선 수치다. 국민주택기금으로 지원하는 전세자금 대출액은 1월 말 3677억원에서 8월말 7636억원으로 훌쩍 뛰었다. 시중은행의 전세자금 대출 잔액도 10월 말 기준으로 2년 전에 비해 5배 급증했다.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선 정부가 올 초부터 8월까지 연이어 전월세 대책을 내놓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백약이 무효인 ‘전세대란’ 시대를 맞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 사이에서 최근 좋은 집을 구하기 위한 새로운 풍속도가 펼쳐지고 있다.
30대 후반의 주부 김성아씨는 몇 달 전부터 8가구가 세 들어 사는 다가구주택의 ‘관리인’을 자처한다. 세입자 처지에 자발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건 집주인이 집을 비우라고 하거나 전세금을 수천만원 올려달라고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김씨는 세입자 가구를 돌면서 입주자를 설득해 매달 1만원씩 걷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출입구와 계단을 청소할 사람을 구해 쓰기 위한 돈”이다. 이 외에도 공동주택의 쓰레기 분리수거를 도맡아 하고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의 ‘연락원’ 노릇도 한다. 김씨는 “전세 만료 기간이 한 달이 채 안 남았는데 그동안 집주인한테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몸으로 때우기’는 돈 없는 세입자들이 흔히 구사하는 ‘전법’이다. 12평(약39㎡) 옥탑방에 사는 30대 중반의 싱글 이재진씨도 그렇다. 손재주가 좋아 평소에도 웬만한 물건이 고장 나면 스스로 고치는 편인 그는 최근 욕실 공사를 스스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욕실 수도 파이프가 고장 났는데 집주인한테 얘기하면 수리비를 핑계로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되더라고요. 또 ‘여기저기 고장 났다며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아예 방을 빼라고 하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요. 집주인과 얼굴 맞댈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싶어 직접 바닥 뜯고 배관을 고친 뒤 타일까지 새로 발랐습니다. 그 뒤에 싱크대 하수구가 막힌 것도 직접 고쳤고요.”
노후로 인한 전셋집 보수공사는 집주인이 수리비용을 내거나 입주자와 절충해 부담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는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했다.
짐 둘 곳을 찾아라
가구·짐 보관업체 ‘셀프스토리지’의 창고에 짐 보관 컨네이너가 가득 차 있다.
“옮겨갈 집을 구하지 못해 한 달 정도 짐을 맡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엔 한 달을 예약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두세 달 계속 기간을 넘기다 길게 1년까지 짐을 보관하는 경우도 있고요. 심지어 아예 짐을 가져가지 않고 잠적하는 고객도 봤지요.”
이 대리의 말이다.
1~2인 가구가 늘면서 소형주택 선호도가 높아진데다 전세대란 여파까지 겹쳐 짐 보관 전문업의 사업 전망은 매우 밝은 편이다. 최근 2~3년 사이 새롭게 문을 여는 업체가 속속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리는 “우리 회사가 문을 연 4년 전에는 사람들이 보관 전문업체를 잘 몰랐고 당연히 이용자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규모를 갖춘 업체가 우리를 포함해 다섯 곳으로 늘었다. 외국계 회사도 한 곳 생겼는데, 앞으로 미국과 호주 쪽에서 2개 업체가 더 들어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회사도 창고 형식의 짐 보관 공간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때 집을 구하지 못해 당장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늘자 이들을 겨냥한 ‘단기임대’도 성행한다. 원룸 또는 풀옵션 오피스텔을 월 단위로 임대하는 것인데, 보증금이 없고 1~3개월의 짧은 기간으로 계약하는 단기임대는 월세가 비쌀 수밖에 없다. 수요가 많은 강남의 경우 26.4㎡ 크기의 풀옵션 원룸 한 달 월세가 110만원을 호가한다.
하우스메이트 구하기
전세대란은 건설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파트 안에 독립된 주거공간을 설계해 임대 수입을 올릴 수 있게 지은 부분 임대형 아파트가 늘고 있고, 입주자가 좁은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철 지난 살림살이를 따로 보관하는 ‘계절창고’를 만든 오피스텔도 건설 중이다. 현대산업개발의 신축 오피스텔 시행사인 IN쿤스 김진수 대리는 “살림집을 오피스텔에 마련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오피스텔의 수납공간 부족 문제에 대한 해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구마다 공간을 확보하는 건 어려워서 공동공간에 창고를 100여 개 만들기로 했다. 전체 814가구에 비해 창고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11월 입주 예정으로 건설 중인 이 오피스텔은 현재 일부 저층만 남은 상태로, 90%가량 분양됐다. 김 대리에 따르면 분양자 중 젊은 예비부부 등 실거주 목적의 투자자가 20~30% 다.
통계청의 ‘2010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총 가구 수는 1757만4000가구다. 이 가운데 자가 주택에 거주하는 비율은 54.2%로 2005년에 비해 1.4% 감소했다. 전세가구는 21.7%로 2005년보다 0.7% 감소세를 보였다. 반면 사글세를 포함한 월세가구는 21.4%로 같은 기간 2.4% 증가했다.
여윳돈이 없고 전세대출마저 여의치 않은 대학생과 미혼 직장인 사이에서는 ‘하우스메이트(하메) 구하기’가 유행하고 있다. 회원 수 120만명이 넘는 인기 부동산 직거래 사이트에는 “다세대주택 지하 방 한 칸 따로 여자 하메 구함. 중화동 보증금 200에 월세 12만원. 욕실과 주방 및 세탁기, 다이어트 사우나 사용 가능. 몸만 들어오시면 됩니다.” “이수역에서 10분 거리. 방 3칸짜리 빌라. 현재 남자 두 명 거주 중. 무보증 월세 25만원에 하메 구합니다” 등의 글이 하루 20여 건씩 올라온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관련 카페만 320여 개가 있다. 이 중에는 회원 수가 4만5000명에 달하는 곳도 있다.
문제는 모르는 사람과 한지붕 아래 동거하는 사례가 늘면서 분쟁도 늘고 있다는 점. 지난해에는 하우스메이트로 들어온 여성이 “방을 빼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버티자 원래 전세를 살던 여성이 분을 참지 못하고 무단으로 상대의 짐을 뺀 것이 빌미가 돼 두 사람이 법정에 서는 일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하우스메이트 관련 카페에는 ‘악성 하메 대처법’에 대한 정보도 많다. 이들을 가장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동거인의 연락 두절이나 행방불명으로 마음대로 집을 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 이에 대비해 경험자들은 “하메의 짐을 임의로 치울 수 있도록 사전에 무단 처분해도 좋다는 각서를 받아라. 문제발생 시 손해배상을 책임진다는 조항까지 챙기라”고 조언한다.
전세 난민
부동산포털 닥터아파트 분석에 따르면 올 7월 초 기준으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1억원 이하 전세가구는 85만1205가구다. 2009년 1월과 비교할 때 33만3850가구가 감소했다. 줄어든 전세만큼 월세는 늘었다. 강선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 8월 발표한 전세난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 공급물량이 보증부월세로 인해 점차 줄어들었고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2007년 전체 주거 점유 형태의 10.7%였던 보증부월세 비중은 2010년 18.2%로 7.5%포인트 늘었다. 같은 기간 전세 비중은 6.5%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품귀 등 전세대란 사태가 수년째 이어지면서 신조어도 속속 생겨나는 중이다. 집이 매매되면 전세계약이 자동으로 해지되는 ‘매매조건부전세’, 전세금 상승분을 월세로 전환하는 ‘반전세’ 외에도 전세금만큼 높은 보증금이 있는 월세를 일컫는 ‘반월세’, 집도 보지 않고 일단 계약부터 하는 ‘묻지마 계약’, 법적으로 2년인 전세계약 기간을 1년으로 줄여 계약하는 ‘반토막전세’, 높은 전세금으로 인한 대출이자 부담이 늘어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전세푸어족’ 등이다.
한편 은행권에서 전세 대출을 받기 힘들거나 오른 전세금만큼 월세로 대체할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은 싼 집을 찾아 서울 도심에서 외곽으로 밀려나거나 짐 보관업체에 살림살이를 맡기고 부모·친척·친구 집을 전전하는 ‘전세난민’으로 표류 중이다. 이에 따라 아파트는 물론이고 빌라, 다가구주택 전세 물량까지 동나는 ‘전세 도미노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형편이 다소 나은 사람들은 “계속 이렇게 고생하느니 이 기회에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에 부동산 경매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서울서부지법 경매 담당 집행관은 “경매장에 오는 사람이 1년 전보다 많아졌다”고 했다.
부동산 경매업체 지지옥션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전용면적 85㎡ 이하 소형 아파트의 낙찰가율은 1월부터 10월까지 84.6~88.9% 사이로 높은 수준이다. 반면 전용면적 85㎡를 초과하는 대형 아파트의 경우 낙찰가율이 6월 이후 계속 80%를 밑돌고 있다. 남승표 지지옥션 선임연구원은 “올해 서울 아파트 경매 상황만 놓고 보면 소형이든 대형이든 전체적으로 낙찰경쟁률이 크게 하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형 아파트 낙찰가율이 80%대 중반 이상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건 그만큼 소형 중심으로 실수요자들이 경매시장으로 몰리고 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전세대란의 원인은 집값 하락과 저금리, 수요에 따른 공급 부족으로 요약된다. 이종인 여의도연구소 정책개발실 연구위원은 “현 시점에서 전월세 급등 문제를 잠재울 확실한 정책대안이 없다”면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소형 주택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집주인이 전세를 월세로 전환해도 임대수익 증가 효과가 크지 않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매매 수요 확대를 통해 단기적으로 전월세 수요를 억제하고, 중장기적으로 보증부월세 또는 월세 증가에 대응하는 대책도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