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호

“‘케데헌’ 즐길 수 있는 건 군인들의 희생 덕분”

[백승주 칼럼] 용산 전쟁기념관 찾은 리처드 테일러

  •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 전 국회의원

    입력2025-11-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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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킹콩’ ‘반지의 제왕’ 만든 영화계의 거장

    • 젊은 세대 마음 바꾸려면 디자인 중심이어야

    • 희생 모르는 15~26세 겨냥해야 전투 전시 성공

    • 디자이너의 흥미 유발, 역사학자의 진정성 협업

    • 사회통합 위해 ‘케데헌’ 연합작전 벤치마킹해야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이하 ‘케데헌’)’는 6월 30일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로, 뮤지컬과 판타지와 코미디를 절묘하게 버무린 것이 특징이다. 한국계 캐나다인인 매기 강(Maggie Kang) 감독이 기획과 공동 연출을 맡았다. 매기 강이 K-문화를 소재로 구상한 스토리가 뼈대가 됐고, 다국적 예술가들이 협업해 작품을 완성했다. 제작은 소니픽처스 영화사가 했다. 소니픽처스는 일본 기업 소니가 1987년 미국에 설립한 다국적 미디어 지주회사다. 

    ‘닮은꼴’ 케데헌과 인천상륙작전

    한국 문화, 미국 자본, 캐나다 감독, 일본계 회사 등 작품에 투입된 요소의 국적을 고려하면 ‘케데헌’ 제작은 거의 유엔의 서방국가들로 구성된 다국적군이 기획한 연합작전을 연상시킨다. 이들의 연합 제작 작전은 성공했다. 6·25 전쟁 당시 다국적군이 펼친 인천상륙작전처럼 말이다. ‘케데헌’이 문화 분야에서 핵폭탄급 위력을 보이고 있다. 정말 뜨겁다. 넷플릭스 영화부문 최장 TOP 10을 기록 중이고, 중요 음원은 미국 등 전 세계에서 1위를 질주하고 있다. 케데헌 연합작전에 참여한 국가 중 가장 우뚝 선 리더는 단연 K-문화, 대한민국이다. 격하게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케더헌’ 열기 속에 리처드 테일러(Richard Taylor) 뉴질랜드 웨타 워크숍 대표가 9월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뉴질랜드 출신 영화감독인 테일러 대표는 영화 ‘킹콩’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특수효과·특수분장·의상 제작을 맡아 아카데미상을 5차례 수상한 영화계의 거장이다. 현재 특수효과 및 소품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웨타 워크숍과 리처드 테일러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뉴질랜드 정부 요청으로 뉴질랜드 국립박물관에서 ‘갈리폴리 전투 특별전’을 11년째 열고 있다. 갈리폴리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1915년 4월 25일부터 1916년 1월까지 오스만제국의 갈리폴리 반도에서 영국·프랑스·호주·뉴질랜드 등 연합군이 오스만제국에 맞서 벌인 대규모 상륙작전이다. 뉴질랜드 국민 500만 중 470만 명이 이 전시를 관람했다고 한다. 

    필자도 올해 뉴질랜드를 방문해 관람했기에 ‘반지의 제왕’ 제작팀의 전시임을 익히 알고 있었고, 언젠가 ‘반지의 제왕’ 감독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 망상 같은 꿈이 현실이 됐다. 짧은 시간 동안 나눈 대화였지만 그에게 길게 음미할 만한 얘기를 들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군사적 진실보다 ‘인간’에 초점

    2024년 뉴질랜드 웰링턴 전쟁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갈리폴리 전투 디오라마(diorama)가 연대순으로 매우 정교하게 재현돼 있어 누가 만든 것인지 물어봤다. ‘반지의 제왕’을 제작한 리처드 테일러 감독이 프로젝트 매니저로 참여해 기획부터 제작까지 총괄했다고 알려줬다. 예술가가 전쟁 콘텐츠를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내게 큰 영감을 줬다. 어떻게 그런 작업을 하게 됐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 

    “나를 만났을 때 갈리폴리 전투 전시를 화제 삼아 대화를 시작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다. 뉴질랜드 정부가 제안했을 때 나는 두 가지를 조건으로 걸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첫 번째 조건은 박물관 디자인팀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에서는 보통 전문 학예사가 전시를 주도하고, 디자인은 그다음이다. 그런데 저는 오늘날 젊은 세대의 마음과 생각, 삶을 바꾸려면 디자인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근본적으로 믿었다. 학예사, 군사 역사학자가 주도하는 방식으로는 오늘날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콘텐츠를 만들기 어렵다. 오늘날 아이들은 그들의 마음, 생각, 삶과 연결된 정교한 디자인에 반응한다. 두 번째 조건은 전시의 초점을 군사적 진실보다 ‘인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스토리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군대, 전투, 전략 등을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 일기를 꼼꼼하게 읽고 또 읽었다.”

    전쟁박물관 콘텐츠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할 사항이 인간이라는 데 동의한다. 전쟁박물관을 운영하는 가장 큰 소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휴대전화 하나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고, ‘‘케데헌’으로도 충분히 재밌는데 왜 내가 60년 전에 싸웠던 군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지?’ 하는 것이 지금 젊은 세대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영화와 게임을 즐기면 된다.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과거 이야기에 왜 신경을 써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자유와 풍요는 과거의 병사들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 덕분이라는 사실을 기성세대가 일깨워 줘야 한다. 전쟁기념관의 존재 가치는 과거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가 과거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돕는 데 있다. 왜 이런 역사적 사실이 지금 우리 삶에 왜 중요하고, 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어른들이 짊어진 소명이다. 집에서 우리가 ‘케데헌’을 편하게 볼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장에서 군인들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려고 목숨 바쳐 싸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뉴질랜드 출신 영화제작자 리처드 테일러(맨 왼쪽)는 9월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필자와 환담을 했다. 전쟁기념사업회

    뉴질랜드 출신 영화제작자 리처드 테일러(맨 왼쪽)는 9월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필자와 환담을 했다. 전쟁기념사업회

    16~25세가 마케팅 타깃

    6·25전쟁에서 유엔군 3만6000여 명을 포함해 수많은 국군이 전사했다. 이들 전사자의 당시 나이는 17~19세. 정말 어린 청년들이었다. 지금 청소년들은 그들의 희생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청소년들이 조금 이른 나이에 희생의 참 의미를 깨닫도록 전시를 설계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전시를 기획할 때 어떤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4세에서 15세 정도 아이들은 보통 학교에서 견학 차원으로 박물관에 온다. 그리고 26세에서 90세까지는 이 주제 자체에 흥미를 느끼거나, 또 그 시대를 직접 겪은 세대라서 존경심을 가지고 박물관을 찾는다. 그런데 그 중간, 16세에서 25세는 어떨까. 우리는 이 연령대를 겨냥해 전시를 기획해야 한다. 이들이 관심 갖도록 하면, 다른 연령층도 함께 따라온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성공적 전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집단(16~25세) 이외의 집단을 기준으로 전시를 만들면 젊은 세대는 전시에 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지 않을 것이다.”

    16세에서 25세 사이를 전시의 전략 연령층으로 설정했는데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과학적으로 입증된 주장이 아니다. 대중을 상대로 일하는 전문가로서 주관적으로 진단한 사회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정 연령대만을 위해 전시를 기획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흥미를 끄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다.”

    갈리폴리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1915년 4월 25일부터 1916년 1월까지 오스만제국의 갈리폴리 반도에서 영국·프랑스·호주·뉴질랜드 등 연합군이 오스만제국에 맞서 벌인 대규모 상륙작전이다. Gettyimage

    갈리폴리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1915년 4월 25일부터 1916년 1월까지 오스만제국의 갈리폴리 반도에서 영국·프랑스·호주·뉴질랜드 등 연합군이 오스만제국에 맞서 벌인 대규모 상륙작전이다. Gettyimage

    군사 지식과 팩트를 어떻게 담아내야 흥미를 끌 수 있나.

    “갈리폴리 전투 전시를 기억해 보라. 철편(shrapnel)은 전장 중 정말 현실적 부분이다. 폭탄 파편은 우리 살점을 뜯겨나가게 한다. 그 파편을 단순히 글자로 적는 대신 실제 파편에 의해 육신이 찢겨나가는 모습을 그림문자(pictogram) 형태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16세에서 25세 된 청소년이 전시장을 그냥 휙 뛰어다니면서 제대로 안 본다 해도, 사실 우리는 픽토그램(어떤 수치 따위를 알아보기 쉽도록 그림으로 나타낸 그래프)이나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같은 패널, 커다란 인물 조형 같은 걸로 이미 무의식적으로 정보를 줄 것이다. 전시장을 고작 5분 보고 나가더라도, 전시 주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머릿속에 남고, 최소한 뭔가 하나는 가져가게 된다. 전쟁 콘텐츠를 만드는 데 군사 역사학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군사 역사학자는 진정성, 학문적 정교성, 지식 기반을 다지는 데 핵심 역할을 해야 한다. 군사 지식 없이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또 그걸 독창적 방식으로 풀어내는 디자이너가 없으면,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앞으로 K-문화와 협업할 계획은 없나.

    “한국 영화사와 두 차례 협업해 영화 두 편을 제작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한 영화사와 아카데미를 만들고 있다. 한국과 협업할 때 우리가 가장 큰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은 갈리폴리 전투 전시에서 확인했듯이 지역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체험형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국 전쟁기념관이나 한국의 창작자들과 함께 한국전 참전용사를 기리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역사와 주제도 조명할 수 있는 사업을 하고 싶다.”

    우리 정치도 ‘케더헌’ 연합작전처럼 

    가까이서 지켜본 리처드 테일러는 예술·전쟁·역사·국가·교육을 융합한 사상가로 느껴졌다. 그는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성숙하려면 ‘케더헌’의 예술 연합작전을 밴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사회를 통합하고 융합하려는 사상이 강물처럼 흐르고, 그 위에 불침 항모(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를 띄우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화계 거장 리처드 테일러와 대화하고 싶었던 소년의 꿈이 현실이 됐듯이 ‘통합의 큰 정치를 보고 싶다’는 바람도 머지않아 현실이 되길 고대한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국민대 석좌교수, 한중안보평화포럼 회장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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