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업 겨냥 새로운 스펙으로 각광
- 가족 이름으로 지원금 타내고, 운영비로 전공 책 구입
- 맞춤형 교육, 전문 멘토, 인큐베이팅 강화 절실
건국대 벤처창업동아리 ‘KIB’회원들이 동아리방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부는 올 초 예년보다 강화된 2012년 청년창업지원 대책을 발표하면서 창업동아리를 청년 CEO의 꿈을 일구는 창업의 산실로 키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냈다.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된 대학가에도 창업동아리가 속속 늘고 있다. 창업동아리는 대학생에게 창업마인드를 확산시키고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고취해 창의성과 개척정신을 갖춘 미래 기업가를 양성하고자, 전국 각 대학총장(학장)이 승인한 대학 내의 창업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동아리를 말한다.
정부에서는 신규 창업동아리 지원(700만 원 이내), 창업아이템 개발지원 (500만 원 이내) 외에도 지방중소기업청의 추천과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선진 벤처기업 연수와 국내 벤처기업 현장견학 등을 지원한다. 정부와 뜻을 같이한 지방자치단체와 대학에서도 실제 창업을 준비 중인 동아리를 대상으로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다. 실습과 체험 중심의 창업 강좌를 지원해온 중소기업청 산하 창업진흥원 관계자는 “지난해 지원한 창업동아리는 540곳인데 올해는 700곳으로 늘어났다”며 “지자체와 대학, 민간 차원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해 실제로는 더 많은 창업동아리가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학가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은 창업동아리 열풍, 그 속살을 들여다보자.
공모전 전문 헌터 활개
1995년 벤처창업 붐을 타고 생겨나기 시작한 창업동아리는 단순 창업 관련 정보를 교환하고 실전 노하우를 배우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최근에는 대외적으로 창업 역량을 검증받을 수 있는 창업경진대회나 공모전에 적극 참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창업경진대회나 공모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 될 뿐 아니라 수상 후에는 상금과 각종 지원 혜택을 토대로 청년창업의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업동아리 활동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도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요즘은 스펙보다 스토리가 대세예요. 토익 점수와 자격증은 필수고 해외연수도 일반화돼서 그런 걸로는 경쟁력이 없으니까 자신의 산 경험을 스토리로 만들려고 창업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가 많아요. 창업스토리 활동을 새로운 스펙으로 보는 거죠. 창업경진대회 같은 데 나가 운 좋게 상까지 받으면 기업에서도 더 관심을 보이거든요.”
6월 29일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만난 대학생 김민지(22) 씨의 얘기는 다소 뜻밖이었다. 그가 창업경진대회와 창조캠퍼스 아이디어 어워드 등에서 세 번이나 상을 받은 창업동아리 출신이라서 더 그랬다. 그는 지난 4월까지 F팀의 일원이었다. F팀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한 학생 2명과 다른 학교 학생 3명이 연합해 만든 팀이었다. 그는 “이미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을 아이템으로 창업경진대회에 출전해서 더 유리했다”며 “한번 상을 받으니 다른 대회에서도 출전해보라고 권유했고 그때마다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회에서 받은 상금이 문제였다.
“공모전 수상과 스펙 쌓기를 목적으로 우리 팀을 만든 경영학과 학생이 상금을 투명하게 관리하지 않아 내분이 생겼어요. 전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어서 그전에 나왔는데 결국 상금을 골고루 배분하지 않고 그 학생이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한 친구들은 국내 최고의 대기업에서 데려갔어요. 그것도 분열의 한 원인이 됐어요. 한 팀에서 두 사람만 러브콜을 받았으니 다른 팀원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 거죠.”
결국 F팀에는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2명만 남았다. 이들은 현재 직장생활과 원래 하던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김씨는 “우리 팀은 그래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같은 대회에 출전해 큰 상을 받은 어떤 팀은 상금 나눠 갖고 바로 해체했다”며 씁쓸해했다. 그의 다음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창업엔 관심도 없으면서 상금 타려고 공모전만 쫓아다니는 공모전 헌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팀에 있던 경영학과 학생도 그런 부류라고 할 수 있죠. 다른 팀원들은 향후 5년, 10년 계획을 세워 단계적으로 회사를 키워나가자고 했지만 그 학생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거든요. 경영학을 전공해서인지 사업계획서를 쓰는 역량은 탁월했어요. 창업을 지원하는 교육프로그램이나 경진대회에 나가려면 아이디어도 좋아야 하지만 사업계획서 같은 서류를 잘 만들어야 해요. 사실 창업지원을 제대로 하려면 아이템을 현실화할 수 있는지, 창업에 정말 뜻이 있는지를 살펴 옥석을 가려야 하는데 대부분의 지원기관이 실체를 가늠하기 힘든 서류만 가지고 평가한다는 자체가 난센스이죠.”
“다양한 지원책 환영하지만…”
주먹밥을 아이템으로 창업에 성공한 분식점체인업체 ‘짬밥’. 창업 초창기에는 노점에서 장사했다.
지난해 실전 벤처 창업리그에서 은상을 수상한 17년 전통의 건국대 벤처창업동아리 ‘KIB’의 정효식(26·산업디자인과 4학년) 회장은 까다로운 공모전 지원 절차와 함께 수상 경력이 있는 동아리에 유리한 지원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창업 아이템을 발굴하는 것보다 공모전에 낼 사업계획서 쓰는 게 더 힘들다”며 “서류 만드는 데 도통한 공모전 헌터들이 예비 창업자의 소중한 기회를 앗아가지 않도록 정부의 세심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고 일침을 놓았다. 또 “한번 상을 받으면 다른 지원기관에서도 호감을 갖고 지원해 창업동아리 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부나 지자체, 대학의 도움으로 창업의 꿈을 이룬 청년 CEO들의 생각은 어떨까. 이들도 앞서 제기된 문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울산의 명물인 고래 캐릭터를 개발해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김지혜 (23·울산대 국제교류학과 4학년) 크리스티앙 대표. 2011년 교내 벤처창업 아이템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그는 그해 10월 중소기업청 창업진흥원이 주최한 사업 프로모션 전략발표 워크숍에서도 우수상을 차지해 창업의 발판을 다졌다. 캐릭터 사업과 지역문화 홍보에 힘써온 그는 “다채로운 창업 지원으로 지난해엔 5개이던 교내 창업동아리가 올해는 15~20개로 늘어났다”고 전했다. 그러나 “최근엔 공모전 수상과 상금을 목적으로 창업동아리를 만드는 일이 많아 창업으로 연결되기는커녕 1년을 못 가 없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정부에서 창업을 지원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창업 분야를 좀 더 세분화해 보다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며 “실제 창업에 뜻이 있는지를 판가름해 예비 창업자가 실패를 겪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뜻을 이룰 수 있게 지속적인 관리와 후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같은 학교 산업디자인과 출신인 주민규(29) 짬밥 대표는 일대일 맞춤형 멘토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울산시 청년창업지원센터 1기 출신인 그는 “창업지원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며 창업에 열의가 생겨 짬밥이라는 주먹밥 체인점 사업을 하게 됐지만 멘토링 지원이 많이 아쉬웠다”고 밝혔다.
“창업 분야는 굉장히 다양한데 좀 성공했다고 멘토로 세워 두루뭉술한 성공담을 듣게 하는 걸 멘토링 지원이라고 하더라고요. 창업 지원이 실제로 창업으로 연결되게 하려면 각 분야에 적합한 전문가의 일대일 멘토링이 가장 효과적일 거예요.”
주 대표는 “이미 창업한 사람이 지원금 받아내려고 가족 이름으로 신청하기도 했다”며 “예비 창업자에게 돌아갈 기회를 꼼수를 부려 빼앗는 양심불량자에 대한 규제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또“학업과 창업을 병행하는 학생에게는 대학 차원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학점 관리에 대한 학교 차원의 배려가 절실해요. 어렵게 투자해 창업한 회사를 학점 때문에 나 몰라라 할 순 없잖아요. 회사 운영으로 수업을 불가피하게 빠진 경우에는 카이스트처럼 학점을 일부 인정해줘야 해요. 이런 창업휴학제도를 모든 대학에서 도입하면 창업자들의 휴학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거예요.”
친환경 아기신발을 제작하는‘슈 에코’의 국태화(22·숙명여대 앙트러프러너십학과 3학년) 대표도 동감을 표하면서 “창업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어도 학점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많은데 창업 준비생들이 수업에 빠지더라도 학교에서 배려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명의 창업동아리로 출발해 한 회사의 오너가 된 그는 “창업하기까지 학교와 정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교내 앙트러프러너십센터에서 창업 경험이 없는 것을 알고 일대일 멘토링을 해줬고 밥슨칼리지의 단기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다 넓은 세상에서 창업의 비전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줬다”고 고마움을 나타냈다.
국 대표는 “청년창업 지원으로 단기간에 창업을 활성화하지는 못한다”며 “창업 저변 확대와 환경 개선이 절실한 만큼 정부에서도 조급해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 CEO들은 창업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예비 창업자를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창업 동아리 ‘토이캣’을 동명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제작업체로 키운 오영빈(25·남서울대 시각정보디자인과 4학년) 대표는 “창업교육을 통해 실전노하우를 터득했더라도 막상 창업을 하면 돌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며 “실패 위험을 줄이려면 창업 전에 관련 분야의 회사에 취업해 실무경험을 쌓을 것”을 주문했다. 수출입 마케팅 서비스를 전문으로 하는 비즈메이트의 김성하(25·남서울대 국제유통학과 4학년) 대표는 “창업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다”며 “단기간의 성공에 연연하지 말고 실패와 좌절을 즐기라”고 조언했다. 선배 창업자는“포기하지 말고 계속 도전하라. 그리고 비전에 투자하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 가르침을 새기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설익은 창업자 양산할라
창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대학 내에 창업 관련학과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숙명여대 앙트러프러너십학과, 숭실대 벤처창업학과, 열린사이버대의 창업학과 등이 대표적이다. 창업동아리에서 활동하거나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이들 학과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가정신이다. 진정한 기업가정신은 창업으로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해 사업 성공은 물론 사회의 지속가능한 동반 성장을 유도한다는 점에서다. 김규동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앙트러프러너십 전공 교수의 부연설명은 이렇다.
“창업자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를 볼 줄 아는 눈입니다. 문제를 창업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중요해요. 단순히 돈을 얼마 벌겠다는 것이 아닌, 어떤 가치에 목적을 두고 창업을 하느냐가 관건이에요.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창업은 결국 대중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죠.”
김 교수는 창업동아리 열풍에 대해 “창업에 대한 간접경험을 통해 실패 요인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창업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생태계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 설익은 창업자를 대거 양산할 우려도 있다”며 “아이디어를 갖고 창업을 시작하기에는 좋은 환경이지만 창업한 이들을 제대로 지원할 시스템과 역량 있는 전문 인력을 더 많이 배출해 인큐베이팅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에서도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청년창업이 보다 쉽고, 안전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보완책을 마련해 개선해가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창업지원사업의 실효성을 높이는 일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이는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창의성 교육으로 전환하려는 교육 일선의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창의성은 21세기의 화두지만 교육환경은 지금도 20세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창업 없는 지원’의 근본 원인이 교육이라는 점은 우리 모두 깊이 반성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