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선포 며칠 후 ‘계엄하느라 고생했다’며 신 사장이 술을 한잔 사는 자리에서, ‘충신이라면 각하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물러나시라 진언해야 하지 않는가.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윤 장군과 나밖에 없다’고 했는데, 나중에 수사 결과를 보니 신 사장이 한 말이 전부 내가 한 걸로 돼 있더라.”(‘청와대비서실’, 1992)
그러나 강창성의 증언은 엇갈린다.
“‘이후락 차기 대통령’ 발언에 대해 계속 부인하는 윤필용에게 ‘신 사장과 대질하겠다’고 하자 윤필용은 ‘모든 걸 일임하겠으니 선처해달라’고 했다.”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사건은 1972년 10월 유신으로 1인 장기집권 기반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이 서서히 ‘2인자’ 정리 작업에 들어갈 무렵 발생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군신지정(君臣之情)’이라는 의리보다는 권력자의 단호함을 보여야 할 때였고, 이런 관점에서 중앙정보부장과 수경사령관이라는 두 세도가의 회합은 권력자와 추종자들의 경계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윤필용에게는 분명 모함으로 인한 불행이었지만, 권력 내부에서 예리하게 벼리던 칼끝을 살피지 못한 그의 불찰도 있다. 육사 11기 선두주자이던 손영길이 된서리를 맞은 통일정사 사건도 음모와 암투 그 연장선에 있다. 다음은 김충립 씨의 증언.
“윤필용이 서빙고에 연행된 1973년 3월 8일 손영길은 전두환에게 만나자고 했지만 전두환은 거절하고 노태우 집으로 갔다. 같은 날 김복동은 세검정 최성택의 집에 있는 걸 12시가 넘은 시각에 내가 목격했다. 이 사태가 어떻게 흐를지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세간에는 이 사건이, 박 대통령이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원칙에 따라 권력을 나누고 신변에 위협을 느껴 윤필용과 손영길을 제거한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당시 청와대 주변 권력자들이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비겁한 음모를 숨기려는 ‘물타기 전략’이었다. 박 대통령은 진종채의 진언을 듣고는 이 사건이 모함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고 그 자리에서 강창성을 해임했다. 생각해보라. 지관 손석우를 몇 개월씩 구금하면서 왜 입막음을 하려 했겠나. 쿠데타 음모 관련자로 조사하면 될 것을….”
사건 관계자 “손영길 말이 맞다”
그러나 당시 현장의 목격자들은 사건을 복기(復棋)하려 하지 않았다. ‘전두환의 함구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손영길이 통일정사 건축 허가와 관련해 박종규를 만날 때 동행한 이종구 30대대장(노태우 정부 때 국방장관)은 ‘신동아’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통일정사 사건과 고철 판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법정에서 ‘고철판매 사건에 대해 함구했느냐’는 질문에는 “윤필용·손영길 사건은 파워게임 속에서 일어난 일이지, 내용은 자세히 모른다”면서 “전화 올 곳이 있다”며 전화를 끊었다.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고, 전역 후 국회의원을 지낸 한 육사 출신 인사는 ‘신동아’의 확인 요청에 어렵에 입을 땠다.
“사건 당시 관련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는 만큼 그 문제는 아주 민감하다. 당시 나는 정보를 담당했고, 40년도 넘은 일이라 고철 판매에 대해선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강창성과 윤필용은 사이가 나빴고, 이를 이용해 박종규가 ‘윤필용을 다뤄보라’고 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락과 동향인 손영길은 이들 사이에 끼여 있다가 박종규 눈 밖에 난 게 문제였다. 이 사건과 관련해선 여러 얘기가 있지만 손영길이 당사자이고 피해자여서 진실을 다 알 것이다. 그 사람 말이 맞을 것이다.”
손영길은 “그 절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 청와대 경내에 건축물 짓는 건 경호실장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박종규와 강창성의 음모에 밑줄을 그었지만 ‘이젠 과거 일’이라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1963년 취중에 ‘각하’에게 불경한 행동으로 내쳐진 자신을 구명한 손영길에게 박종규는 자신의 금도금 ‘롤렉스’ 시계를 벗어 주고 손영길의 ‘라도’ 손목시계와 바꿔 찼다고 한다. 손영길은 지금도 이 시계를 보관하고 있다. 그는 박종규의 롤렉스 금시계를 찬 지 꼭 10년 뒤 박종규에 의해 ‘은팔찌’(수갑)를 찼고, 그 10년 뒤 박종규의 사과를 받았으니 인생무상이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