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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부의 포스코인가 박태준의 포스코인가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유상부의 포스코인가 박태준의 포스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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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유회장과 TJ 사이에 쉽게 해소하기 힘든 ‘불화’가 존재하며, 그 연원 또한 생각보다 깊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궁금증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를 직접 만나 물어보는 것. 지난 5월31일,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본가(本家)에 머물고 있는 TJ를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비행기에 올랐다.

애써 집을 찾았으나 관리인은 “총재님은 지금 안 계신다”며 “집안에 기자를 들였다간 사단이 나니 돌아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실랑이 끝에 어찌어찌하여 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잔디가 깔린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울타리 안에는 TJ 일가가 머무는 본채와 고용인들을 위한 별채, 창고와 차고가 있었다.

TJ는 정말 집에 없었다. 무조건 기다리겠다며 별채로 들어가 보니 먼저 찾아온 손님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포스코 OB(퇴직자)들이었다. “포항에서 버스 대절해 온다더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포스코 사람들의 출입이 매우 잦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집에는 고용인들이 많았다. 얼른 헤아려 봐도 대여섯 명은 됐다. 손님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것이었다. 비서에게 TJ의 요즘 생활에 대해 물었다.

일단 건강은 매우 좋다고 했다. TJ는 지난해 7월 미국에서 폐 아랫부분에 자리잡은 물혹 제거 수술을 받았다. 한동안은 그 후유증 때문에 힘들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라고 했다.



“정치적인 것들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신문도 정치면은 건너뛰고 보실 정도예요. 텔레비전도 축구나 뭐 그런 쪽으로만 시청하고요. 서울 논현동에도 집이 있지만 여기 머무는 건 번거로움을 피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TJ의 공항 발언으로 인해 포스코 쪽이 많이 불편해하는 것 같다, 지나친 간섭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고 하자 “그건 그 사람들이 잘못 하는 거다. 자식은 아버지를 버릴 수 있어도 아버지는 그럴 수 없는 것 아니냐. TJ는 포스코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자식이 잘못돼 가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가만히 있느냐”고 반문했다.

TJ 집에 머무는 반나절 동안 여러 사람으로부터 이 ‘아버지론’을 되풀이해 들을 수 있었다. TJ가 포스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었다.

모래바람 부는 허허벌판에서 오늘의 포스코를 탄생시킨 장본인인 만큼, 그에 대한 TJ의 애착은 혈연에 대한 애정 이상으로 뜨겁고 확고하다는 것이 주변의 설명이었다. 어쩌면 서울이 아닌 기장 집에 머무는 것도 골치 아픈 정치인사들과의 만남은 줄이는 대신 포스코의 옛 동지들이 편히 찾아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넘치는 청탁이 둘 사이 갈라놓아”

세 시간 가까이 기다렸지만 TJ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없었다. 오후5시가 다 돼서야 비서로부터 “벌써 도착하셨다. 기자가 서울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한번 만나시는 게 어떠냐고 여쭸지만 ‘자네가 날 그렇게 몰라, 쉬고 있는 사람이 기자를 왜 만나냐’는 꾸지람만 들었다. 잠깐 인사하는 것도 안 된다고 하시니 그냥 돌아가 달라”고 했다.

간신히 TJ 부인 장옥자 씨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눈길조차 변변히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지금 인터뷰는 안된다”며 돌아서는 그에게 “건강은 정말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정씨는 몸을 돌리며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아주 좋으시다”고 답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기서 잠시 TJ와 유회장 간의 30년 인연을 되짚어 보자. 유회장은 1970년 포스코에 입사했다. TJ는 명석하고 성실하며 배짱 두둑한 유회장을 신임했다. 고속 승진을 거듭한 유회장은 ‘TJ 4인방(황경로 박득표 이대공 유상부)’의 일원으로 불리게 됐다.

1993년 유회장은 김영삼 정부가 포스코에서 TJ사단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희생양이 돼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가 출옥하자 현대그룹과 삼성그룹 사이에 치열한 스카우트전이 벌어졌다. 1994년 삼성중공업 고문이 된 유회장은 이후 삼성중공업 사장, 일본 삼성 사장, 삼성그룹 일본본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이건희 회장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일본에 근무하는 동안 유회장은 그곳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TJ 부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TJ가 큰 고마움을 느꼈음은 물론이다.

1998년 3월 유회장은 TJ의 추천에 힘입어 포스코 회장 자리에 오른다. 유회장은 취임 초기부터 투명경영, 디지털경영의 기치를 내걸고 강도 높은 개혁 작업을 진행했다. TJ는 유회장이 소신껏 회사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외풍을 막는 바람막이 역할을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속사정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유회장 취임 얼마 후부터 두 사람 사이의 갈등설이 밖으로 솔솔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발단은 포철 내부의 물갈이 방식을 둘러싼 의견 차이였다. 유회장 취임 직후 단행된 인사에서 TJ는 과감한 물갈이를 주문한 반면 유회장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 결국 유회장은 TJ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마무리지었다.

또 한 가지는 정·관계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청탁에 대한 유회장의 단호한 태도였다. 민원이 통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TJ를 찾아가 불만을 터뜨렸다. TJ의 한 측근은 “유회장은 TJ가 직접 연락하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청탁을 거절했다. 어떤 때는 TJ가 사람들 앞에서 유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부탁해놓고는 다시 연락을 취해 ‘신경 쓰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그러느라 TJ도 많이 지쳤다. 섭섭한 마음이 조금씩 쌓여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회장의 고집과 ‘다시는 감옥에 가지 않겠다’는 결의는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한 검찰 조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유회장은 두 차례 조사를 받는 동안 “나는 죄가 없다”며 끝까지 조서 작성을 거부했다. 검찰이 유회장에 대한 불구속 기소 방침을 정해 놓고도 바로 실행해 옮기지 못한 데는 그 같은 속사정이 있다.

정치권의 청탁은 2000년 9월 포스코가 민영화된 뒤에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포스코의 한 임원은 “그게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유회장 취임 후 ‘청탁은 안된다’는 방침에 따라 철저히 차단하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임을 느낄 때가 많았다. 오죽하면 임원들이 나서서 ‘밖에 말들이 너무 많다. 작은 것은 좀 들어주는 게 어떠냐’는 건의까지 했겠느냐”고 말했다.

외부 입김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건 포스코뿐 아니라 민영화한 공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이다. 포스코만 해도 순수 투자지분인 외국인 몫과 자사주를 제외할 때, 경영권을 좌우할 수 있는 15.88%는 연기금·시중은행·투자신탁 등 사실상 정부 영향력 하에 있는 주주들 손에 쥐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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