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백조의 호수(Swan Lake)’를 떠올린다. 그리고 ‘백조의 호수’ 1막 2장에서 지그프리드 왕자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는 백조들을 보는 장면과 이 장면에 맞추어 흐르는 테마 멜로디를 떠올린다.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백조의 호수’란 제목은 ‘호수의 백조’가 되어야 본래의 의미에 부합한다. 일본에서 이 작품을 번역할 때 생긴 오류를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백조의 호수’라는 제목으로 굳은 것이다. 아마 소설이나 희곡 제목이었으면 잘못된 번역 사례로 지적되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발레의 명칭이기 때문에 ‘백조의 호수’라는 제목보다는 작품의 테마 멜로디나 발레리나의 춤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애국가도 마찬가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여 부르기 시작한 것을, 1936년에 작곡가 안익태가 곡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런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가사는 한국어 문법을 고려할 때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도록’이 더 분명한 표현이겠지만, 과거의 가사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애국가에 이성적인 방식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접근하며 정확한 문법적 표현보다는 정서적 느낌에 더 관심을 쏟는다. 이처럼 음악은 대중의 합리적 사고보다는 감성적인 감동으로 이끈다. 이것이 바로 음악의 힘이다.
차이코프스키는 풍부한 관현악적 색채와 체계화된 화성, 동작의 변화를 고려한 다양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발레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음악만 들어도 어디선가 토슈즈를 신고 튜튜를 입은 가냘픈 발레리나가 등장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작곡한, 발레사의 명곡으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1876)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호두까기 인형’(1892) 등은 러시아 발레의 기술적인 토대를 만들어줄 본질을 제시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작곡 활동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작곡한 ‘백조의 호수’가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관객의 반응은 너무나 싸늘했다. 차이코프스키가 프랑스 극음악의 여러 요소를 의욕적으로 흡수해 러시아 음악에 스며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프랑스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의 음악, 그중 특히 관현악법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또 프랑스 작곡가인 카미유 생상스(1835~1921)와도 돈독한 친분을 쌓으면서 우아하고 감미로운 프랑스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다. 무엇보다 차이코프스키의 극음악은 1876년에 파리로 가서 오페라 ‘카르멘’ 등 많은 작품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이 그 출발의 계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초연은 실패했다. 오데트 역을 맡은 발레리나가 환갑 나이의 노장이었다는 것과, 안무와 무대장치가 부실했다는 것도 실패의 한 원인이었지만 그것보다 당시 러시아 관객들의 수준에 비해 그의 음악이 지나치게 뛰어났다는 사실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시 러시아 발레공연에서는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리 음악의 비중은 낮았다. 러시아 발레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테크닉이었으며, 음악은 단지 병풍과 같은 존재로, 은은하게 나왔다가 관객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사라져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러시아적 환경에서 관객들은 극을 이끌며 안무를 선도하고 더구나 인물묘사까지 하는, 차이코프스키의 생소한 음악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이 관객들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레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발라레(Ballare·‘춤추다’는 뜻)이다.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발레는 르네상스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시작된 발레는, 그러나 여러 고증에 따르면 몸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행진 수준이었다. 많은 이탈리아 문화예술이 그랬던 것처럼 발레는 카트린 드 메디치(카타리나 메디치)와 앙리 4세의 결혼식 때 카트린이 지참금 명목으로 가지고 간 수많은 재산과 영지 목록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 평민 출신의 메디치 가문이 프랑스 왕가와 정략적인 계약결혼을 하면서 가지고 간 선물 중에는 요리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그리고 발레가 들어 있었다. 이후 발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예술로 자리 잡았다.

‘백조의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