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미국 공상과학영화 속 ‘제국주의 향수’

  • 노광우 │영화 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입력2013-06-19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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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상과학영화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차원으로 양분할 수 있다.

    시간이 관건이 되는 대표적인 공상과학영화는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시간여행물이다. ‘백 투 더 퓨쳐’(1985), ‘타임머신’(2002)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과거를 직접 본다는 것, 과거의 사건을 바꿔 현재의 상태를 바꾼다는 것은 인간이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다. 시간여행물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이러한 일들을 가상으로 경험하게 한다. 그렇지만 시간과 운명에 대한 관점은 영화마다 조금씩 다르다.

    ‘백 투 더 퓨쳐’에서 주인공은 과거로 여행해 현재의 운명을 바꾸는 것으로 그려진다. 반면 ‘타임머신’에서 주인공은 사고로 죽은 약혼녀를 살려내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사고를 막아내지만 다른 사건에 의해 약혼녀는 예정된 죽음을 맞는다. 시간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식, 철학적 신념이 영화인마다 서로 다르고 이러한 가치관이 영화 내용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원주민 모습의 외계인

    시간에 관한 공상과학영화의 또 다른 유형으로는 미래사회물을 들 수 있다. 공상과학영화가 그리는 미래는 유토피아(utopia·이상사회)라기보다는 통제된 디스토피아(dystopia·암울한 미래사회)에 더 가깝다. ‘공각기동대’(2011), ‘토탈 리콜’(2012), ‘가타카’(1997)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영화들에 따르면 과학기술은 현실 정치인과 과학자의 장밋빛 전망과는 달리 인간에게 물질적·정신적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억압체제 속으로 밀어넣고 만다.



    시간여행물과 미래사회물을 혼합한 유형도 있다. ‘터미네이터’(1984) 시리즈가 이에 해당한다. 이 영화도 대체로 인간의 과학기술, 이성, 도덕성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시간에 관한 영화가 아닌 다른 공상과학영화들은 공간이 관건이 되는 공상과학영화라고 할 수 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2), ‘아바타’(2009), ‘화성침공’(1996)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공간에 관한 공상과학영화는 상대적으로 시간보다는 공간을 더 중요한 모티프로 삼는다. 예를 들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경우 사건이 전개되는 시점은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로 별 특이점이 없다. 반면 공간 차원에선 실험실의 원숭이들이 대도시를 점령하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공간에 관한 공상과학영화는 주로 강력한 타자와의 조우(遭遇) 같은 모티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필자가 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스타 트렉: 인투 다크니스’(Star Trek: Into Darkness, 2013, J J 에이브럼스 연출)도 공간에 관한 공상과학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시리즈물을 영화화한 동명의 시리즈 중 최신판이다. 이번 다크니스 편까지 넥스트 제너레이션 편, 엔터프라이즈 편, 보이저 편 등 총 12편이 제작됐다. ‘스타 트렉’의 팬 활동을 다룬 ‘트레키스’(Trekkies, 1997)라는 다큐멘터리도 나왔고 스타 트렉의 텔레비전 시리즈와 영화 시리즈 간의 상호관계를 패러디한 코미디 영화 ‘갤럭시 퀘스트’Galazy Quest, 1999)도 상영된 바 있다. ‘스타 트렉’ 시리즈가 미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인기를 끌어온 공상과학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현대판 일리아스·오디세이 신화

    ‘스타 트렉’ 시리즈는 서기 23세기 행성연합(United Federation of Planets) 소속 선원들이 탐사우주선 엔터프라이즈 호를 타고 미지의 우주로 탐험을 떠나는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선장은 대개 백인 남성이 맡는데 ‘보이저’ 편에서는 최초로 백인 여성이 선장으로 등장한다. 선원들은 여행 과정에서 다른 지적 생명체들을 만나게 되며 행성연합에 대적하는 클링온 제국과의 분쟁에 휘말린다.

    스타 트렉 시리즈는 주인공이 신비한 여행을 체험한다는 점에서 ‘일리아스’ ‘오디세이’와 같은 고대 신화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헤라클레스의 영웅담은 신의 명령에 의해 다양한 모험을 하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집단이 모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로는 콜키스의 황금양털을 구하러 가는 아르고호 원정대 이야기가 있다. 이들은 여행 중 다양한 인물, 괴물과 조우한다. ‘스타 트렉’ 시리즈는 신화의 등장인물들을 외계인으로 바꿔놓는다.

    미국 공상과학영화 속 ‘제국주의 향수’

    2006년 8월 2일 영국 크리스티 경매사 직원이 경매 출시 예정인 ‘스타트렉’ TV시리즈 우주선 모델을 보고있다.



    공간이 관건이 되는 공상과학 영화들은 영화사에서 기원이 꽤 오래됐다. 최초의 공상과학 영화인 ‘월세계 여행’(1902, 프랑스)에서 프랑스 원정대는 달을 향해 포탄을 쏜다. 이어 원정대는 달에 도착해 외계인들과 일전을 치르고 귀환한다.

    이때 영화에서 프랑스 원정대가 만난 달의 외계인들은 당시의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프랑스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상대했던 원주민들이 공상과학영화에선 외계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공상과학영화가 보여주는 가상세계는 완전히 창작된 가상이 아니라 상당부분 현실을 투영하는 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 트렉: 인투 다크니스’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인 커크 선장과 본즈 부선장이 미지의 행성에서 외계인들에게 쫓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의 외계인들도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에서 볼 법한 미개한 인종으로 그려진다. 반면 본즈 부선장은 화산의 분화를 멈춤으로써 이 행성을 구해주는 구세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월세계 여행’이 나온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서구 열강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제3세계를 점령하고 분할하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해저 2만리’ ‘80일간 세계일주’ ‘어둠의 심연’과 같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백인 남성 모험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들이 주로 등장했다. 미국에선 서부지역의 토착민들을 복속시키고 백인들이 이주하는 서부개척이 완료되던 시기였다. 이때의 많은 이야기가 훗날 서부극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됐다.

    서구 대 비서구, 문명 대 야만의 이분법이 여행영화, 민속지학영화, 서부영화를 거쳐 공상과학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 트렉’ 시리즈에서 엔터프라이즈 호 대원들이 마주치는 클링온 제국의 군대는 사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향유하는 다른 인종이 치환된 형태다. 서구에서 제작한 공상과학영화 속 우주여행 모험담에는 19세기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鄕愁)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론 ‘스타 트렉’ 시리즈는 냉전의 산물이기도 하다. 1950~60년대 미국과 소련은 우주탐사 경쟁을 본격화했는데 스타 트렉 시리즈는 196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로 처음 제작됐다. 이를 반영하듯 행성연합은 유엔 또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을 닮아 있다. 엔터프라이즈 호의 선원들은 유엔군이나 다국적 군대와 유사하다. 커크 선장이 이들을 지휘하는 것은 미국인 장성이 유엔군이나 다국적군의 총사령관을 맡는 것과 같다. 커크 선장의 조력자인 미스터 스포크는 벌컨 행성인과 지구인의 혼혈인이다. 미스터 스포크의 정체성은 서부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백인 주인공에게 협조하는 인디언’과 거의 유사하다. 행성연합에 맞서는 클링온 제국은 부분적으로 소련과 공산주의 진영을 상징하기도 한다.

    1950년대 미국의 공상과학영화들은 소련과 핵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드러낸다. 이들 영화가 그려내는 외계인은 지능이 발달했지만 그에 걸맞은 인성을 갖추지 못한 존재다. 소련인과 공산주의자를 외계인으로 자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 트렉’과 미국적 세계관

    ‘스타 트렉: 인투 다크니스’는 제국주의, 냉전에 이어 테러와의 전쟁까지 담아낸다. 런던 문서보관소에 대한 테러는 여러 면에서 9·11 테러를 연상시킨다. 연합함대 본부가 급습당하는 장면은 9·11 때 미국 국방부(펜타곤)가 공격받는 모습,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영국 정보부가 폭파되는 모습과 비슷하다.

    미국 공상과학영화 속 ‘제국주의 향수’
    노광우

    1969년 서울 출생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 :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


    미국인들이 ‘스타 트렉’ 시리즈에 열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중 텍스트는 단순 오락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맞는 설정과 상황의 암시를 담아냄으로써 대중의 가치관을 끊임없이 반영한다. ‘스타 트렉’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미국인이 어떠한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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