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호

핸드메이드 슈트의 자존심, 나폴리

  • 남훈│‘란스미어’ 브랜드매니저 alann@naver.com│

    입력2009-07-03 18: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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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자와 휴양지로 이름 높은 나폴리는 세계 남성복의 세계에서 개성 강한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나폴리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돼 흘러들어온 영국 귀족의 복식 전통과 나폴리 장인의 바느질솜씨가 어우러져 세계 최고의 맞춤 슈트가 완성됐다. 나폴리의 고집스러운 슈트 철학은 좋은 슈트의 기준을 제시한다.
    핸드메이드 슈트의 자존심, 나폴리

    나폴리의 슈트 장인들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면서 상당히 섹시한 핸드메이드 슈트를 만든다.

    세계 패션의 흐름을 주도하는 나라는 비교적 명확하다. 여성복을 중심으로 한 럭셔리 패션 분야에서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남성복에서는 역사적 자산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감성이 발달한 이탈리아가 강세다. 유럽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동시에 사치스러웠던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오늘날 프랑스 패션산업의 기반을 닦은 선구자다. 후손들이 오직 선조들의 역사만으로도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남성복의 발상지는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맞춤복 거리 새빌로다. 근대 영국 귀족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한 옷들이 현대적인 남성복의 기준이자 모델이 됐다. 예술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고 일상 속에서 스타일과 엘레강스를 즐기는 이탈리아인들은 남성복의 기초를 세운 영국식 문화에서 진일보해서 전세계 상류사회 남성들을 매료시키는 남성복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탈리아는 본래 여러 도시국가가 독립적으로 존재해온 터라 거기서 비롯된 다양성이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등 도시별로 독자적인 복식을 창조했다. 이 때문에 스타일 선택의 폭도 아주 넓어졌다.

    한국 시장에서는 단순히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의 가치만 두드러져, 이탈리아 브랜드라면 특성을 따지지 않고 선호하는 현상까지 있었다. 그러나 한국 시장도 이제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탈리아가 배출한 다양한 브랜드 각각의 구체적인 콘셉트를 구별하는 안목이 생겼다. 유럽의 도시마다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남성복이 있음도 알게 됐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발상지 피렌체의 남성복 스타일은 중세부터 이어진 귀족문화의 원형을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과거 이탈리아 귀족들이 입었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양식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일관성을 보여준다.

    미국식 문화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던 로마식 남성복은 넉넉하고 편안한 실루엣이 특징이다. 무역업으로 번성한 베니스식 남성복은 정통 테일러링 슈트 제조기법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트렌드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디테일이 항상 변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면서 상당히 섹시한 핸드메이드 슈트를 만드는 곳이다. 나폴리 슈트는 영국적인 전통과 이탈리아 고유의 감성이 멋지게 결합돼 가치가 높다. 모든 종류의 옷을 늘 차려입던 영국의 지적 상류계급이 특별히 손재주가 좋고 경관이 빼어난 나폴리를 사랑했기에, 체사레 아톨리니(Cesare Attolini)나 키톤(Kiton)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성복이 그곳에서 탄생했다.

    슈트, 하나의 예술품



    최고 수준의 고급 슈트를 제작하는 나폴리만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인 나폴리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다. 날씨가 평균 8℃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쾌적한 지중해성 기후로 ‘나폴리를 보지 않고서는 죽지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의 세계적인 휴양도시다. 고급 음식과 의류 문화가 발달했으나 이탈리아 남부에서 흘러들어오는 인구 때문에 사회문제도 상당하다. 한국에서는 나폴리 하면 피자를 우선 떠올린다. 사이즈가 크고 바닥이 두꺼운 미국식 피자에 비해 얇고 가벼운 나폴리 피자는 한국에서 꽤 인기가 높다. 여름 휴가철이 되면 폼페이, 소렌토와 한데 묶여 이탈리아 여행에서 꼭 들러보아야 할 관광코스로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강한 아시아만의 현상이 아니다.

    슈트라는 가장 남성적인 주제로 돌아가 이 도시를 생각해보자. 나폴리는 영국으로부터 이어진 남성복의 유산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거기에 부가가치를 더해 현재의 슈트 문화가 미래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도록 만든 역사적인 도시다. 1990년대 이후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나 지아니 베르사체(Gianni Versace)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여럿 배출한 이탈리아식 화려한 패션 흐름이 남성 브랜드에도 영향을 주면서, 슈트의 퀄리티 자체보다 브랜드네임이나 이슈를 만드는 마케팅에 힘을 쏟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나 나폴리는 슈트가 브랜드나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품질을 기반으로 한 예술품과도 같은 존재이며, 비즈니스에 해가 될 만한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점잖은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최초의 슈트 철학을 일관성 있게 지켜오고 있다.

    핸드메이드 슈트의 자존심, 나폴리

    나폴리 장인들은 바늘을 깊게 넣어 땀을 뜨는 정성스러운 바느질을 통해 수준 높은 슈트를 완성한다.

    나에게 나폴리 슈트에 대한 유쾌한 기억이 있다. 매년 전세계 멋진 남성들이 모이는 ‘피티 워모(Pitti Uomo)’라는 남성복 전시회에서였다. 피렌체에서 열리는 이 유명한 전시회는 이탈리아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지역의 가장 전통있고 유서 깊은 남성복 브랜드들이 새 시즌의 컬렉션을 제시하고, 전세계 바이어들이 상품을 구매하는 비즈니스 공간이기도 하다. 가장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들이 모이기 때문에 이들을 촬영해서 보여주는 블로그가 생겨날 만큼 보는 이의 눈이 즐거워지는 자리다.

    나는 바이어로서 매년 두 차례 꼬박꼬박 참석해 좋은 제품을 선별해 한국의 소비자에게 소개한다. 한번은 전시회 중 에스프레소를 한잔하며 잠시 쉬고 있었다. 이탈리아인으로 보이는 멋진 노신사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그 슈트는 아톨리니입니까?” 아니, 이탈리아인들이 아무리 슈트에 남다른 애정과 눈썰미를 가지고 있다지만, 내 몸에 맞게 제작된 맞춤 슈트의 브랜드를 외관만 보고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라인만 보면 브랜드를 짐작할 수 있다면서 “당신은 얼굴은 동양인인데 몸은 이탈리아인 같다”면서 웃었다.

    내가 입은 맞춤복은 체사레 아톨리니라는 나폴리 브랜드로, 한 벌의 슈트를 만들기 위해 수십 명의 장인이 동원되는 수제복이다. 이런 슈트 브랜드를 가진 이탈리아가 멋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슈트에 대한 남자들의 일반적인 안목 자체가 높다는 점이 더 부럽다. 나폴리 슈트의 어깨 라인은 매우 부드럽거나, 정교한 수작업으로 부드러운 주름을 수놓은 것이 특징이다. 일본 오사카나 부산 등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 특유의 정서가 있듯이, 나폴리 슈트에도 이탈리아 남부 항구도시만의 유쾌한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세계 최초로 ‘길드’ 결성

    나폴리 슈트에 대한 관심은 한국 남성복 시장의 점진적 성숙이라는 시대성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클래식한 콘셉트의 브랜드인지, 트렌드를 따르는 디자이너 브랜드인지 따지지 않고 이탈리아산 브랜드면 무조건 명품이라고 환호했던 반면, 이제는 브랜드의 고유 성격이 자신과 맞는지 따져보는 경향이 생겼다. 남성복의 스펙트럼이 별로 넓지 않은 한국에도 나폴리식이냐 로마식이냐 혹은 클래식이냐 트렌드냐에 관심을 두는 소비자들이 출현하면서 브랜드네임보다 슈트의 퀄리티와 역사적 배경이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정말 품질이 좋은 슈트란 어떤 것인가? 과연 누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만들어낼까?” 하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 시장에 꼭 필요했던 질문으로 이어진다.

    문화적 유산이 풍부하고, 세계적으로 출중한 패션 브랜드를 많이 배출한 국가답게 이탈리아인들은 모든 문화영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중 슈트에 관한 한 나폴리 장인의 자존심은 이탈리아의 그 누구보다 하늘을 찌른다. 지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탈리아 슈트 스타일의 뿌리가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남부 지역 장인들의 손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전세계에서 장인 조합인 길드가 최초로 결성된 곳이 나폴리다. 1351년에 이미 재봉 장인 길드를 위한 기술시험이 실시될 만큼 이 도시엔 장인이 많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수준 높은 클래식 슈트를 제작하는 테일러를 사르토(Sarto)라고 하는데, 이미 19세기부터 이탈리아 전역에서 인정받은 사르토는 모두 나폴리 출신이었다. 1930년대 빈첸초 아톨리니(Vincenzo Attolini)는 영국의 복식 철학을 바탕으로 나폴리 고유의 스타일을 정립한 가장 실력 있는 사르토로 손꼽혔다. 그의 가업을 잇는 아들이 바로 전세계 기성복의 최상위에 랭크된 체사레 아톨리니의 오너이자 나폴리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실력파 장인 체사레 아톨리니(Cesare Attolini)다. 아톨리니 가문이 정립한 나폴리 슈트의 특징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나폴리는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고 유럽의 무역 허브구실을 할 정도의 규모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화는 전 유럽의 신사들에게 수용될 만큼 국제적이다. 나폴리는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답게 역사적으로 그리스, 프랑스, 독일, 스페인, 아랍, 터키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고 이들 타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해 재해석하면서 발달했다. 또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열강의 지배를 받으면서 각국의 복식 전통과 나폴리만의 기술을 혼합한 독특한 나폴리 스타일을 형성해왔다. 그러므로 나폴리 슈트에는 나폴리를 넘어 전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나폴리 스타일은 산업문명의 획기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적인 문화의 핵심이 되는 핸드메이드 정신, 즉 장인의 정교한 수작업으로 획득 가능한 품질에 대한 일관성 있는 지향을 보여준다. 특히 인체의 움직임을 반영해서 제작하는 나폴리 슈트는 어깨와 소매, 허리 등 인체의 입체적인 부분을 정교한 수작업으로 처리함으로써, 착용자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겉으로 드러나는 스타일도 유려하다. 나폴리 슈트의 어깨 라인은 보는 사람이 좀 작아 보이지 않느냐고 걱정할 만큼 몸에 밀착되지만, 정작 슈트를 입은 사람은 전혀 답답함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작업의 비밀은 나폴리 장인의 숙련된 바느질 솜씨다. 소재의 가격에 상관없이 바늘을 깊게 넣어 땀을 뜨는 정성스러운 바느질을 통해 옷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유연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들만의 자신감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

    비싼 소재로 고가의 슈트만을 제작하거나 소재 자체만 강조하는 것은 나폴리 슈트의 본질과 거리가 있다. 나폴리 스타일에서 강조하는 좋은 슈트의 요건은 소재보다 메이킹 기술이다. 특히 겉으로 보기에는 기계 작업보다 아름답지 못할 수 있으나, 입을수록 착용자의 몸에 빈틈없이 맞춰지는 손바느질의 장점이 나폴리 슈트를 완성하는 핵심 노하우다. 이와 달리 기계 작업으로 대량 생산되는 슈트는 좋은 품질과 다양한 사이즈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곡선으로 된 인체에 직선적인 이미지를 입힘으로써 언뜻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는 듯 보이지만 결국 누구에게도 맞지 않게 된다. 나폴리 슈트는 높은 가격이나 브랜드 명성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잘 맞는 스타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남성복의 오랜 전통을 지켜왔다.

    셋째, 나폴리 슈트는 그들만의 디테일을 통해서 남자들도 보수적인 슈트를 어느 정도는 개성적으로 혹은 세련되게 입는 테크닉을 발휘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빈첸초 아톨리니에 의해 확립된 나폴리식 어깨 라인은 어깨에서부터 손목으로 내려오는 소매 라인이 점점 좁아지는 입체적인 형태를 통해서 착용감과 스타일 모두를 만족시킨다. 또한 소매 버튼 간격이 극도로 좁아서 버튼끼리 포개지도록 고안한 리얼버튼홀(Real button hole)을 시도해 많은 남성이 개성에 따라 버튼을 열고 잠그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슈트를 입는 남자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슈트 차림에 장식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셔츠나 타이 컬러를 달리하는 전형적인 기법을 넘어서, 비로소 남자들도 기분에 따라 버튼을 다 잠그거나 몇 개를 동시에 풀어 슈트 차림에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줄 수 있게 됐다.

    바르카(Barca·이탈리아어로 돛단배라는 뜻)라는 나폴리 슈트의 가슴주머니는 직선이 아니라 배 모양처럼 곡선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핸드메이드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포켓스퀘어(Pocket Square·가슴주머니에 꽂는 장식 수건)를 돛 모양이나 입체적인 느낌으로 장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주었다. 나폴리식 디테일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규범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디테일만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조화를 중시하는 클래식 남성복의 전통에 어긋난다. 가능한 한 많은 옵션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재해석하고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패션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슈트의 두 번째 발상지

    오직 나폴리산이 최고라고 하는 나폴리 장인들의 높은 긍지는 학습의 효과라기보다 그들의 몸에 원천적으로 스며든 피와도 같은 것이다. 나폴리인에게 “당신이 슈트를 잘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나폴리 태생이기 때문이다”는 단순한 대답을 들을 뿐이다. 그러나 강대국의 침략이 잦고, 식민지 생활을 오래 한 역사 속에서 일반적인 나폴리인의 삶은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역사는 언제나 아이러니를 수반하지 않던가. 나폴리는 아름다운 기후와 환경을 가진 덕분에 영국의 귀족들이 자주 찾았지만 관광이나 음식, 재봉 이외의 산업이 발달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에 비해 가난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사정 때문에 실력 있는 장인들과 출중한 바느질 솜씨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폴리인의 지나친 자부심은 갈등과 긴장 속에서 다른 국가나 도시와 관계를 맺어온 이 도시의 역사를 은연중에 반영하는 것이다.

    나폴리만의 역사와 개성적인 스타일은 전세계 남성 리더들에게 슈트의 품질을 파악하는 새로운 안목을 제시해주었다. 과거의 뛰어난 유산을 골라내 현재의 클래식 복식 안에 새로운 형태로 소생시키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나폴리는 슈트의 두 번째 발상지로 기록될 만하다. 첫 번째 발상지는 여전히 영국의 새빌로 맞춤복 거리이지만, 이제는 ‘누가 먼저’보다 ‘누가 제일’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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