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스턴 처칠이 생전에 즐겨 마셨던 폴 로저 샴페인.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필력
그러나 전후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처칠의 보수당은 패배하고 만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처칠이 전쟁 영웅이었지만 국민은 전후 평화적인 국가 재건에는 처칠의 보수당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6년 동안 야당 지도자로 일한 처칠은 1951년 보수당이 다시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총리로 재집권한다. 처칠의 두 번째 총리직은 1955년 4월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식민지의 독립 등 영국의 국제 위상이 예전과 달라지면서 고전하게 되고, 개인적으로도 뇌졸중 증상으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말년에는 휠체어를 타고 국회에 등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65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조의를 표했다.
이처럼 처칠은 세계적인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 뛰어난 웅변가라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와는 사뭇 다른 면모들도 있다.
첫째는 그림과 문학에 대한 재능이다. 그는 뛰어난 화가였다. 실제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 상당한 작품이 남아 있다. 그의 그림은 유화 작품으로 주로 경치를 그린 것이었다. 처칠은 그림 그리기를 통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 증세를 극복하려고 애썼다는 얘기도 있다.
처칠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글쓰기 재능도 빼놓을 수 없다. 처칠은 일생 동안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여주었는데 앞서 말한 수많은 신문 기고문 이외에도 한 권의 소설, 두 권의 전기(傳記), 회고록, 그리고 여러 편의 역사물을 집필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이러한 열정적인 집필 활동 배경에는 경제적인 동기도 있었다. 그는 상류층인 집안 배경과 높은 사회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사치스러운 편이어서 늘 돈이 아쉬웠다. 게다가 처칠의 활동 당시 영국에서는 하원의원이라 하더라도 1946년까지는 아주 적은 명목상 보수만 받았기 때문에(1911년 이전까지는 명목상 보수도 없었다), 처칠뿐만 아니라 많은 의원이 다른 직업을 통해 수입을 충당했다. 아무튼 처칠은 이런 글쓰기를 통해 더욱 명성을 얻어, 마침내 1953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총 6권의 ‘제2차 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 등을 포함한 저작 활동을 높이 평가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런 문학과 예술적 측면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덜 알려진 것이 그의 술에 대한 사랑과 에피소드다. 처칠은 사적이나 공적인 자리를 가리지 않고 거의 매일 술을 마시다시피 했는데, 점심에는 주로 맥주를 마시고 저녁에는 차에 위스키를 타서 마시거나 샴페인 등 다양한 술을 즐겨 마셨다. 당연히 술도 센 편이어서 취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술에 관한 관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을 남겼다. 바로 “나는 알코올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코올로부터 얻었다”(I have taken more from alcohol than it has taken from me)였다. 이는 세계대전이라는 척박한 현실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의 개인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가히 ‘위대한 술꾼’의 반열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는 표현이라 하겠다.

영국 런던에 있는 ‘처질 박물관 겸 전시 내각 방’(Churchill Museum and Cabinet War Rooms) 내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