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YMCA는 설문조사를 통해 ‘한국인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끼친 가수’ 1위로 양희은을 선정한 바 있다. 1971년 ‘아침이슬’이 실린 첫 앨범이 나온 지 22년, 그가 미국으로 떠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본인이 한국에 있건 없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건, 한국인의 곁에는 언제나 양희은의 노래가 함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상당 부분은 곡조와 노랫말을 주조해낸 김민기에게 돌아가겠지만, 이를 낭랑한 목소리로 전달해준 양희은이 없었더라면 ‘아침이슬’은 결코 국민가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김민기가 ‘금관의 예수’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으로 대중의 뇌에 울림을 만들어냈다면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진 사람은 바로 양희은이었다.
팬들이 창조자 이상으로 ‘전달자’ 양희은을 좋아했다는 것은 양희은이 김민기 아닌 다른 작곡자와 만들어 부른 노래들도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이 말해준다. 이주원의 곡인 ‘내 님의 사랑은’ ‘들길 따라서’ ‘한 사람’, 김희갑 곡인 ‘하얀 목련’, 하덕규의 ‘한계령’, 이병우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등도 양희은이 불렀기에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곡들이다. 김민기가 쓴 곡과 마찬가지로 이 곡들 또한 TV 인기차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오래도록 되새김질되었다.
남자가수들이 장악하고 있던 한국 포크음악 판에 그는 거의 유일한 ‘우먼파워’였다. 그 영향력과 대중적 흡수력은 보브 딜런 시대에 맹활약한 미국 포크 여가수 존 바에즈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70~80년대 포크음악 시대를 대표하는 여가수가 양희은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통기타를 메고 홀연히 가요계에 등장한 지 어언 30년, 나이도 올해로 만 쉰 살이다. 이제 그를 ‘인기가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무대에 올라서 기염을 토하는 그는 여전히 위풍당당하다. 특히 그의 공연은 ‘아줌마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새 그는 ‘포크의 대변자’에서 ‘아줌마 문화의 기수’로 변해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아줌마
인터뷰를 위해 일산 자택에서 만난 그는 음식 관련 TV 프로그램의 녹화를 막 마친 뒤였다. “녹화하면서 만든 거예요. 1년이면 300날 손님 맞이하면서 터득한 음식 솜씨지” 하며 약과를 내놓는 모습이며, 인터뷰 중간중간 차와 과일을 대접한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곤 하는 모양이 영락없는 아줌마다.
“때로는 노래만 아니라면 뭐든지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노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운명이 돼버렸다”는 게 인터뷰의 첫마디였다. 방송을 통해 그의 당당한 언변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지나간 30년 음악인생을 회상하는 그의 눈가에는 간혹 이슬이 맺혀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여장부’ 양희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언젠가 어느 기사에서 양희은씨를 수줍은 성격으로 묘사한 게 기억납니다.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다는 이야긴데요. 왜 그런 차이가 생긴 걸까요?
“저는 제가 봐도 낯을 잘 가리고, 수줍음 많고, 쉽게 속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하셨던 그늘이 상처가 된 탓도 있을 것 같고, 어쩌면 열린 직업이 갖는 의외의 폐쇄성 탓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더러 생각 밖으로 여리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양희은씨 공연은 언제나 흥행이 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후배가수들도 공연이 성공하는 선배가수로 양희은씨를 첫 손에 꼽습니다. 왜 공연에 사람들이 몰린다고 보십니까?
“제 공연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줌마들이 많아요. 처음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는 공연장에 들어오지 못해 화난 아줌마들로부터 공연관계자가 뺨을 맞는 해프닝도 있었지요. 공연기획사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하더군요. 1994년 귀국했을 때 체중이 20㎏이나 늘어난 살찐 아줌마가 되어 나타나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전 ‘여자가 좋아하는 여자’인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다수인 공연장이 얼마나 각별한지 아세요? 여자들만 치는 박수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무엇이 있습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제 공연에는 아줌마를 상대로 한 ‘얘기’가 많습니다. 노래가 아니라 그 얘기를 들으러 오는 아줌마들도 있으니까요.”
양희은의 공연장에서는 가수와 객석이 주고받는 흥겨운 대화를 들을 수 있다. 그가 사설을 펴면 객석 이곳저곳에서 질문이 날아든다. 한 아줌마의 엉뚱한 질문. “양희은씨는 옷을 어떻게 마련합니까?” 양희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큰 목소리로 응수한다. “아니, 연예인이라고 특별하게 옷을 입는 줄 아세요? 저요, 남자 옷 입어요. 지금 이 옷 말이죠, 투엑스 라지예요.” 한바탕 폭소가 터진다.
웃음 못지않은 비장함도 있다. 겨울 공연 때면 그는 가끔 캐럴의 고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른다. “생전에 아버지가 잘 부르시던 곡이에요. 그렇게 죽도록 미워한 아버진데, 지금은 저도 나이가 들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 할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간절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고 양희은도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만다.
-공연에 온 중년 여성들이 양희은씨 얘기에 공감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 아줌마가 갖는 보편적인 정서를 확인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 정서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학창시절에 돈이 없어서 등록금을 못 내고 학교를 다녔어요. 당시 교실에는 지독하게 가난하거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말하자면 ‘거름’이었던 학생들이 꼭 있었어요. 제 얘기를 통해 아줌마들은 그 시절 ‘경제성장기의 고통’을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반에서 잘나가지 못하던 아이들을 가리키던 ‘깍뚜기’나 ‘버스회수권’ 같은 그때 용어들이 제 입에서 마구 튀어나오니 반갑지 않겠어요?”
-조금 도식적인 구분일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경기여중, 경기여고, 서강대 사학과라는 학력을 비롯해 양희은씨가 갖고 있는 조건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아줌마와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일각에서는 ‘기획상품이 아니냐’는 지적도 들립니다. 공식 홈페이지를 보니 아예 ‘아줌마게시판’ 코너가 있더군요.
“아줌마 느낌을 가진 인물도 아닌데 일부러 아줌마의 이미지로 몰아가는 게 아니냐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요. 친구들이 더러 그렇게 이야기하면 전 한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날 봐, 아줌마잖아? 내가 아줌만데 뭘 그래.’ 기획이나 컨셉트가 어디 있습니까? 전 무엇이든 억지로는 못하는 체질입니다.”
송창식, 김민기와의 만남
양희은은 서울 종로 가회동에서 1952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아버지 양정길씨와 어머니 윤순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유학을 다녀온 클래식광(狂)이었던 아버지와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불렀던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재질을 물려받은 그는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는다. 1960년대 당시의 이혼이란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의 일이다.
1969년 여고시절에는 디자이너로 겨우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의 가게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우환이 잇따랐다. 당장 홀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꾸리고 두 여동생(바로 밑이 방송인 양희경씨)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그에게 학업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몰락한 집안의 장녀요 소녀가장’이었다. 유독 부잣집이 많은 가회동 한가운데 사는 동안 집안 형편이 기울어진 것을 두고 그는 “그때 우리 집이 가회동 물을 흐렸다”고 이야기한다.
졸업과 동시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양재학원에 다니려고 생각했던 그를 뜯어말린 것은 동창생들이었다. 학교에서 응원단장으로 인기를 누릴 만큼 친구들과 사이가 좋았던 그는 결국 여고시절의 우수한 성적과 영어웅변대회 최우수상 수상자라는 프리미엄으로 서강대에 입학한다. 일단 학교에는 들어갔지만 길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것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트윈폴리오의 송창식을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송창식과는 고교 2학년 때 속해 있던 영어회화클럽을 통해 당시 포크의 메카였던 YWCA의 ‘청개구리’에서 얼굴을 알게 된 사이였다. 당시 통기타무대 ‘금수강산’에 출연중이던 그에게 양희은은 대뜸 ‘노래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포크는 물론 가요를 전혀 몰랐던 양희은은 그 곳에서 동요 ‘따오기’와 서양민요 ‘클레멘타인’을 부르고는 ‘오늘 노래한 것을 가불로 달라’고 송창식을 졸랐다. 신문기자나 방송PD가 꿈이었던 대학 초년생은 이 엉뚱하기 그지없는 사건을 계기로 뜻하지 않은 가수의 길을 가게 된다. 그에게 필생의 음악 동반자로 남아 있는 ‘포크의 기린아’ 김민기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양희은과 김민기의 만남은 한국 포크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김민기씨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 겁니까? 미리부터 알고 있었나요?
“김민기씨도 YWCA의 청개구리에서 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 그는 도비두(도깨비 두 사람)라는 이름의 듀엣으로 활동하고 있었죠. 언젠가 무대에서 미국 포크그룹 피터 폴 앤 메리의 ‘난 로큰롤 음악이 좋아(I dig rock and roll music)’를 부르는 걸 봤는데 기타를 굉장히 잘 친다고 생각했어요.
그를 직접 찾아간 것은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사은 리사이틀’을 준비하던 때였어요. 기타 반주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죠. 물어물어 공연장 무대 뒤로 찾아갔더니 직감적으로 절 알아보더군요. 대뜸 얼굴을 쳐다보면서 ‘너 아버지 없지?’ 하고 묻는 거예요. 아무튼 별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저와 김민기 김윤태 임문일이 4인방이 되어 늘 붙어 쏘다녔지요.”
1970년대 초반 김민기(왼쪽)와 함께 활동하던 시절의 양희은
“김민기씨는 처음부터 ‘아침이슬’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연습이 끝나고 악보를 버렸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가 처음 부르던 순간 그 노래에 끌리듯 빠져버렸어요. 그가 버린 악보 종이를 주워 연습했고 언젠가 꼭 녹음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작자보다 먼저 ‘아침이슬’을 취입하게 된 거죠. 4개 방송사 PD들이 뜻을 모아 당시 킹레코드사 박성배 사장에게 소개해준 덕분에 어렵사리 레코딩이 이뤄졌습니다.”
-김민기씨와는 1971년 첫 앨범과 이듬해 앨범, 1978년의 앨범까지 모두 세 차례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희은씨 노래인생 전체를 보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하나로 묶인 ‘역사적 동체(同體)’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음악적 측면에서 양희은씨는 김민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김민기씨는 양희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민기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를 천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와의 작업은 제 음악인생의 처음인 동시에 절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감수성은 당시 기준에서 볼 때 너무도 맑았으니까요. 다른 음악가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서정성은 지금도 놀라울 정도지요.
‘아침이슬’을 비롯한 그의 곡들이 시대상황 덕분에 이름을 얻게 된 부분도 있겠지만, 노래가 오래가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손을 보면서) 노래도 사람의 손금처럼 생명선이 있다고 전 믿어요. 1년짜리가 있는가 하면, 10년짜리 노래도 있고 50년 가는 노래가 있는 법이죠. 오래 가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뛰어난 인물입니다. 물론 그는 저에 대해 ‘희은이는 노래를 못해. 그게 노래냐?’ 하고 말하곤 하죠. 그 사람 맘에 드는 게 세상에 뭐 있나요?”
-사실 양희은씨는 그의 음악을 충실히 전달한 이른바 ‘김민기의 페르소나’로 기억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침이슬’이 그런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겠지요. 하나의 인상이 강렬하면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건 저나 김민기씨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김민기는 사석에서 좋게는 ‘양희은이란 큰 우산이 있어서 나는 뒤에 숨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아침이슬이 양희은의 첫 곡이 된 건 슬픈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발 ‘아침이슬’말고 ‘상록수’를 부르라고 주문하기도 하지요.
저에게도 ‘아침이슬’이 주는 부담은 엄청난 것이었어요. 그건 벌써 그 곡이 맘에 드느냐 안 드느냐를 떠난 문제지요. 한 곡의 노래로 캐릭터가 규정되는 것을 좋아할 음악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랑밖에 할 얘기가 없나
양희은은 대통령선거로 뜨겁던 1971년 ‘아침이슬’이 수록된 첫 앨범과 함께 홀연히 등장했다.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지배하던, 포크음악도 ‘낭만’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시절이었다. 포크 본연의 ‘비판성’을 전면에 내세운 그의 노래가 순식간에 시대와 세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무 살 여대생의 꾸밈없이 낭랑한 보이스 톤은 여가수를 낮추어보던 일반의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리며 시대를 흔들었다.
1974년 김민기에서 이주원으로 음악 파트너를 바꿨지만, 그래도 그의 위풍당당하고 결연함을 잃지 않은 노래 행진은 계속되었다. 이 시절 그가 발표한 ‘내 님의 사랑은’ ‘들길 따라서’ ‘한 사람’ 등의 노래가 김민기 시절의 ‘아침이슬’ ‘금관의 예수’ ‘백구’에 비해 로맨틱한 경향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상투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중에게 강한 소구력을 갖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여가수와 달리 양희은은 좀처럼 사랑과 이별타령의 늪에 젖어들지 않았다. 설령 가사에 사랑을 표현하더라도 통속적 허위가 아닌 단호함의 요소가 배어 있었다. 맹렬히 활동하던 시기에 사랑노래를 의도적으로 꺼린 것은 ‘도대체 노래로 사랑밖에 할 얘기가 없냐’는 확고한 자의식 때문이었다는 회고다. 달콤한 사랑노래를 불러달라는 주위의 요청이 계속됐지만 그는 대중가요의 일반 틀에 동승하기를 거부했다.
양희은의 음악이 후배가수나 팬들의 생각과 삶에 깊은 자국을 남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서슬 퍼런 유신시절 긴급조치 9호로 포크음악에 족쇄가 채워지면서 그의 활동에도 제약이 가해졌지만, ‘고립된 섬’ 같은 그의 존재는 음악대중들의 지원사격을 통해 도리어 빛을 발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양희은은 1981년 돌연 유럽 배낭여행의 길을 떠나면서 잠시 음악계에서 사라진다. 이듬해 여름 한국에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두 번에 걸쳐 암 수술을 받는 중대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를 일그러진 시대의 대항마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팬들에 의해 ‘하얀 목련’은 1984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1985년 단 한번의 녹음으로 취입했다는 하덕규 작곡의 ‘한계령’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5년이 흐른 1990년 전국민의 가요로 사랑을 받기에 이른다. 그의 노래 생명선은 그렇게 질기고도 길었다.
-1981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한창 가수와 방송활동을 병행하던 시기에 외국으로 떠나기는 힘들었을 텐데요. 시기적으로는 신군부의 권력장악이나 5공화국 출범과 맞물리는데 그런 상황과 연관이 있었던가요?
“직접적으로는 아닙니다. 물론 당시 상황에 심정이 답답해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1970년대 중반 포크의 흐름이 막혀버린 상황이었고, 라디오 DJ를 하는 순간에도 방송국에는 정보부 요원이 2인1조로 배치되어 절 감시하곤 했으니까요. 가끔 ‘김민기 언제 봤어?’ ‘그 친구 어디 있는지 모르나?’ 하고 묻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게 아니어도 전 저대로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썩은 나이’ 서른이 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어요. 타성에 젖는 게 싫어서 가수를 그만두고 전업을 고려했습니다. 마침 그 무렵 아는 분의 도움으로 보세의류회사 의류기획실장으로 적을 두고 있었고, 덕분에 여권을 얻을 수 있었어요.”
-14개월 뒤 유럽에서 돌아온 것은 병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에요. 병은 한국에 돌아와서 알았어요. 잘 알던 여고선배 의사를 우연히 만났는데 진단하기도 전에 제 얼굴만 보고는 ‘말기 암 환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는 거예요. 몸에 세 군데나 종양이 있었죠.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스트레스와 가난’이 누적됐기 때문일 겁니다. (빙그레 웃으며) 남자를 모르고 산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두 번에 걸쳐 수술을 받은 것은 첫 수술 후 제가 몸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이에요. 그때 제 병을 알지 못했다면 오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가난이라면 전성기에도 전혀 돈을 벌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양희은씨 음반은 상당히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까?
“전성기라…. 저한테 과연 전성기가 있었던가요? 전 한번도 인기가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음반 판매고는 상당했다지만, 그 시절은 레코드사가 돈을 벌었지 가수는 돈을 구경도 못하던 때였어요. 방송 DJ로 그나마 수입을 채웠을 뿐입니다. 자매 셋이 대학을 다니니 등록금 대기가 쉽지 않았죠. 제가 대학을 7년 만에 졸업했으니 말 다했죠. 전 ‘돈 없는 가수’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1987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사업가 조중문씨와 결혼한 양희은은 남편이 사업을 하고 있는 미국으로 떠나 새 삶을 꾸리게 된다. 하지만 7년이 지난 1993년 남편의 사업장이 한국으로 옮겨오고, 또한 ‘늙어서는 서울 가서 살고 싶다’는 남편의 희망에 따라 양희은은 귀국길에 오른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노래를 위해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돌아왔으니 그냥 다시 노래하게 됐을 따름이었다.
-30년 기념 라이브 앨범 속지를 보니 ‘나의 원래 꿈은 가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30년 넘게 노래를 하고 있다’고 쓰셨더군요. 다른 가수들은 노래를 목숨으로 여기는 데 비해,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좀 이상해 보입니다. 현재도 노래보다 라디오 진행에 더 에너지를 쏟는 듯하고요.
“그래서 음악을 계속하려고 하는 겁니다. 속지의 다음 문장을 보세요. 꾸준히 노래를 했지만 목숨 걸고 노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깨끗이 노래를 그만둘 수 없는 겁니다. 뭔가 목숨을 걸고 보란 듯이 해놓고 나서야 그만둘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노래를 그만두기 위해 노래를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생각보다 미련하고 우직한 성격입니다. (껄껄 웃으며) 그래서 별명도 ‘양미련 여사’ 아닙니까? 라디오 진행은 제가 욕심이 많기 때문에, 노래하면서도 같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게 전부는 절대로 아닙니다.”
양희은이 발표한 앨범들. (왼쪽부터 1971, 1974, 1996년)
“앨범으로는 스물한 장이고 찬송가를 포함하면 스물여덟 장일 겁니다. 곡으로는 400여 곡 될 거구요. 좋아하는 곡은 아무래도 김민기씨 작품인 ‘백구’ ‘금관의 예수’ ‘늙은 군인의 노래’고요, 후반기 곡으로는 김의철의 곡인 ‘나 떠난 후에라도’가 맘에 듭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침이슬’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양희은씨는 노래도 노래지만 작곡자 선택에 대단한 안목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민기부터 이주원 하덕규 이병우 그리고 최근의 김의철씨까지 같이 작업한 사람들은 양희은의 음악에 품격과 새로움을 불어넣었습니다. 작곡자를 고른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골랐다기보다는 모두 새 앨범제작을 앞두고 주변에서 소개받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주원씨는 서로 속속들이 알면서 동고동락하던 사이였고, 하덕규는 조동진 선배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어떤 날’이란 듀엣으로 활동한 이병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눈여겨봤던 후배였어요. 그리고 6년에 걸쳐 저의 발성을 개발하는 데 힘써준 기타 연주자 김의철씨는 이제 저의 음악스승이지요. 살면서 만난 음악선생 가운데 으뜸은 김의철씨가 아닌가 합니다.”
30년에 걸친 긴 음악 여정에서 양희은이 가장 흡족해하는 것은 귀국 이후 공연으로 새로운 위상을 개척해냈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됐어도 꾸준히 공연장을 찾아와준다는 것은 가수에겐 견줄 수 없는 기쁨이다.
게다가 그는 대형무대나 고액의 출연료를 받는 이벤트 행사장에 서는 다른 고참 가수들과는 달리 대학로의 소규모 라이브 무대를 고집한다. 1994년 대학로에 ‘라이브 극장’이 생겼을 때, 그는 생애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단 콘서트를 열면서 가요사에 드문 ‘노장 콘서트가수’로 부활했다. “1990년대 들어 물결을 이룬 라이브 문화의 실질적 기폭제는 양희은”이라고 말하는 가요 관계자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추억으로 퇴화하지 않고 여전히 무게를 갖는 것 또한 콘서트문화의 개척자라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요즘 젊은 가수들은 과거에 비해 수명이 짧습니다. 신세대 가수 중에서 양희은씨처럼 30년을 견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고요. 선배로서 그들에게 어떤 얘기를 들려주고 싶습니까?
“전 돈을 버리고 ‘롱런’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수와 돈의 관계는 기묘해서 노래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이미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수는 인기든 위세든 내려갈 때 돈이 벌린다는 거예요.
또한 제가 오래갈 수 있었던 것은 ‘보여주는 게’ 뜸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게 TV는 언제나 낯선 물건이었습니다. 뭐든 그렇지만 많이 보여주면 나중에는 보고 싶지 않은 법이죠.”
그는 또한 “가수는 메시지의 전달자라는 것을 잊지 말고 반드시 ‘자기 얘기’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획이 판치는 근래 음악계 풍토에서 가수는 남 얘기를 충실하게 전하기만 하는 존재가 돼버렸는데, 그래서는 유통기한에 쫓기는 상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일침이다.
“양희은의 음악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했다고 보느냐”며 마지막 질문을 꺼내들었다. 인터뷰 내내 유려하게 대답해나가던 그가 잠시 입을 닫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낮은 톤으로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마도 제 노래는 동시대를 살아간 같은 연배 사람들의 가슴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성장의 고단함과 가혹한 군사독재에 신음하며 살던 제 또래 사람들에게는 무언지 모를 응어리가 가슴에 맺혀 있었지요. 김민기를 비롯한 작곡자들의 메시지를 제가 대신 전달하면서 그 쓰라린 마음을 일정 부분 해소해주었다고 봅니다. 또한 팬들이 제 노래와 목소리에서 틀에서 벗어나는 싱그러움을 느꼈다면 다행이겠지요. 한마디로 타성에 젖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 때문이었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 노래할 거야!”
그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중장년과 아이들을 위한 노래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후반에는 그간 꼭 만들고 싶었다는 동요음반도 출시할 계획이다. 고민이 있다면 신곡을 계속 내놓고 있는데도 관객들은 여전히 30년 전의 감수성에 머물러 있다는 것. 그 이야기를 꺼내며 “팬들이 신곡을 싫어해도 신곡을 내놓는 게 옳은 것일까” 자문(自問)하던 그는 이내 단호한 어조로 “그래도 해야 돼!” 하고 자답(自答)했다.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바로 ‘타성’ ‘신곡’ ‘공연’ 같은 어휘들이었다.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단단한 결심이었다.
“과거를 복제하는 것은 가수로서 끝이죠. 타성에 젖지 않으려면 공연에 매진하고 줄기차게 신곡을 발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필자를 문 밖까지 배웅하면서 양희은은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나, 죽을 때까지 노래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