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히 무더운 올 여름 산행은 무리였던 것일까. 마시는 물보다 땀이 더 흘러 탈수증세까지 나타났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폭 은은한 수채화 같은구름 속 산길과 날이 개며 드러난 푸른 하늘과 흰구름,숲속 녹음이 빚어낸 환상적인 조화는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산은 뜨거운 여름마저 넉넉하게 품고 있었다.
덕항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촛대바위
필자는 2004년 7월 마침내 남쪽 백두대간의 귀착지인 강원도로 들어섰다.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볼 때 강원의 관문은 영월과 태백이다. 두 지역은 최근 수 년간 개발론자와 환경론자가 치열하게 맞섰던 곳이다. 동강댐 건설이 중단된 영월에서는 언뜻 환경론자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동강 주변은 개발의 몸살을 혹독하게 앓고 있다. 반면 태백은 석탄산업이 퇴조하면서 급격하게 몰락한 이후 고랭지 관광상품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도약을 힘겹게 모색하는 중이다.
이제 강원도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일단 세계적인 흐름이 개발에서 환경보전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환경과 관련한 각종 국제협약이 발효되고 대규모 국책사업이 곳곳에서 재검토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렇다고 지역개발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지속가능한 개발’이다. 기존의 개발이 일회적이고 환경 파괴적이라면, 지속가능한 개발은 환경과 상생하는 영구적인 개발로 볼 수 있다.
지속가능한 개발의 관점에서 강원도가 처한 현실을 보자면 나름의 해법은 있다. 백두대간 보호라는 법의 목적을 살리되, 지역주민의 생존권이 위협받지 않도록 시행령을 제정하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별다른 제한 없이 백두대간을 파괴해왔다. 백두법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이 법을 시행하기도 전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환경이 국가경쟁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 요즘, 우리나라의 ‘환경대표’라 할 수 있는 강원도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소나무와 한국인의 질긴 인연
7월15일 새벽. 경북 영주시 풍기읍엔 비가 내렸다. 풍기역에서 택시를 타고 고치령으로 가는 길가에 인삼밭이 많이 보였다. 풍기 인삼의 유래는 조선시대의 유학자 주세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지역특산품을 세금으로 바치는 공납제도의 폐해가 심각해졌는데,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산삼의 인공재배를 장려하면서 인삼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타고 고치령에 이르자 산신각이 서 있다. 비운의 삶을 마감한 단종과 금성대군을 기리는 곳이다. 한 등산객이 산신각 앞에 비닐을 치고 비박을 하고 있었다. 백두대간 연속종주자였다. 그와 함께 걷고 싶었으나 그는 이틀 동안 너무 많은 비를 맞은 탓에 푹 쉬고 나서 걷겠다고 했다. 혼자서 비를 맞으며 950m봉과 1096m봉을 넘어서자 춘양목 지대가 드넓게 펼쳐졌다. 춘양목은 소나무 품종의 하나인 금강송의 다른 이름으로 그 옛날 대궐을 지을 때 쓰였던 고급 목재다. 우리나라에서 춘양목이 자라는 지역은 태백산 줄기를 따라 삼척 봉화 울진 영덕 등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생산된 목재가 봉화군 춘양면을 통해 서울로 옮겨진 데서 춘양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각종 설문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단연 소나무다. 한국인과 소나무의 관계는 질기고도 운명적이다. 예로부터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 앞에 솔잎을 달았고, 보릿고개를 만나면 소나무 껍질로 허기를 달랬으며, 세상을 떠나면 묘지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다.
2004년 3월, 한반도 전역의 수많은 소나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춘양의 금강송이 참변을 당했다. 불의의 화재로 무려 1만여 그루가 타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금강송 군락지를 중심으로 넓게 분포하는 송이버섯 생산량도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마구령과 1057m봉을 넘자 짧은 암릉지대가 나오고 934m봉을 거쳐 영주와 봉화의 경계지점인 갈곶산(966m)에 이르자 대간은 왼쪽으로 90도 휘어져 뻗어나간다. 갈곶산에서 10여분 정도 급하게 내려서면 텐트를 치고 쉬어갈 만한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소백산국립공원이 끝나는 늦은목이다. 백두대간 연속종주자들은 이곳에서 숨을 고르고 도중에 지친 사람들은 좌우로 나 있는 비상탈출로를 타고 민가로 내려간다. 늦은목이에서 강원 영월과 경북 봉화의 도계가 시작되는 선달산(1236m)까지는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두세 차례 숨을 고르고 내쳐야 한다.
선달산 중턱에서 하늘은 아주 잠깐 푸른 모습을 드러냈다. 필자가 사진기를 꺼내기도 전에 다시 비구름이 몰려들었지만 하늘(靑)과 구름(白)과 숲(綠)이 빚어낸 환상적인 순간의 조화에 가슴이 설레었다.
구름 낀 태백산 정상 천제단에서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필자는 발을 떼지 못한 채 스틱으로 옆의 나무를 툭툭 쳤다. 근처에 또 다른 짐승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반경 10m 부근의 풀이 일제히 일렁이더니 멧돼지 새끼 20여마리가 머리와 등을 드러냈다. 필자가 스틱으로 소리를 낼 때마다 새끼멧돼지가 두세 마리씩 달아났다. 하지만 두 마리는 스틱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인간이 짐승의 속내를 알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아마도 빗속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멧돼지의 충격 탓일까. 필자는 우거진 숲만 나오면 겁이 나 걸음을 멈췄다. 스틱으로 풀을 헤치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빠르게 벗어났다. 멧돼지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먼저 상처를 입거나 새끼가 위험에 처한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필자는 백두대간을 걷다가 멧돼지에게 공격당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어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거의 집중호우 수준이다. 빗방울이 머리를 때릴 때마다 두피의 울림이 느껴졌다. 이럴 때는 앞만 보며 빠르게 걷는 게 제일이다. 다행히 길이 좋았다.
이따금씩 필자의 앞으로 토끼, 꿩, 날다람쥐 등이 지나갔다. 아마도 멧돼지처럼 먹이를 구하고 있는 듯했다. 빗줄기와 싸우며 1시간쯤 걸었을까. 눈앞에 넓은 공터가 보였다. 박달령이었다. 이곳에서 백두대간은 잠시 경북 봉화땅으로 들어선다. 이곳에는 잠시나마 비를 피할 수 있는 산신각이 있다. 필자는 산신각 처마 밑에서 비상식량으로 허기를 달랬다.
박달령에서 1시간쯤 오르면 옥돌봉(1242m)이다. 날씨가 좋을 땐 봉화지역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지만 빗줄기 때문에 가만히 서 있기도 힘이 들었다. 옥돌봉부터는 줄곧 내리막. 1시간가량 다리품을 팔면 봉화와 영월을 연결하는 88번 도로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도래기재로 한국전쟁 당시 부근 신기마을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제 백두대간은 경북의 끄트머리를 지나 강원도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간다.
난데없는 비행기 굉음과 포연
7월20일 새벽, 춘양에서 택시를 타고 도래기재로 향했다. 장마가 물러간 숲에 여명이 비쳤다. 도래기재부터 구룡산(1345m)까지는 긴 오르막이지만 알맞게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구룡산 정상에 서니 흐린 날씨 때문에 제대로 굽어볼 수 없었던 백두대간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왔다. 좋은 경치를 벗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난데없이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비행기 한 대가 태백산 자락을 가로지르며 굉음을 내더니 어느 순간 산골짜기에서 포연이 자욱하게 솟아올랐던 것. 이곳이 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월군 상동읍의 필승사격장이었다.
필승사격장은 1981년 한국이 부지를 주고 미국이 장비와 기술을 제공해 건설했다. 행정구역상으로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와 태백시 혈동,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등 3개 지역 1800만평에 걸쳐 있다. 이 필승사격장이 세인의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 건 얼마 전 전국적인 반미시위의 불씨가 됐던 매향리 폭격장이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소문이 나돌면서부터다. 매향리 폭격장 이전설은 태백과 영월지역 주민들에게 날벼락이나 다름없었고 반대투쟁이 오래 이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폭격장 이전계획이 백지화되는 분위기지만 미군과 국방부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불신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구룡산에서 사격장 주위를 크게 돌아서 흘러간다. 이곳에서 필자는 또 한번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쉴새없이 날아다니는 비행기 소음은 그런대로 참을 만했지만 마구 파헤쳐진 등산로를 바라보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주목을 비롯한 태백산 자락의 희귀식물들이 누군가에 의해 불법으로 캐내진 뒤 뒷정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태백산의 헝클어진 구간은 무려 2km가 넘게 이어졌다.
구룡산에서 1시간쯤 걸으면 평평한 고갯마루가 하나 나오는데 이곳이 옛 지도에 곰넘이재로 표기돼 있는 참새골 어귀다. 여기서부터 백두대간은 넓은 길을 편하게 오르다가 신선봉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을 튼다. 신선봉에서는 표지판이 나무에 가려져 있어 길을 잃기 쉽다. ‘처사경주손씨영호지묘’라고 쓰인 묘 앞에서 우회전해야 헛걸음을 피할 수 있다.
신선봉에서 차돌배기(1141m)까지는 산죽을 헤치며 1시간 가까이 내리막을 통과해야 한다. 차돌배기에서부터 본격적인 태백산 줄기다.
차돌배기를 지나자 또다시 구름이 밀려왔다. 바람 따라 구름이 산을 덮었다가도 어느새 산이 구름을 벗어던지는 묘한 날씨다. 구름 속 산길은 한 폭의 은은한 수채화 같다. 그래서 분위기에 쉽게 취하고, 그 취기를 빌려 가파른 오르막도 가볍게 오를 수 있다. 강원 영월과 태백의 분기점인 깃대배기봉을 지나 백두대간에서 경북의 끝점이라 할 수 있는 부소봉(1546m)에 이르기까지 필자는 계속 취해 있었다.
대간은 부소봉에서 왼편으로 꺾인다. 하지만 시간이 넉넉하다면 오른편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문수봉(1517m)에 들러볼 것을 권한다. 이 코스는 특히 흐린 날 걷는 게 좋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들이 구름 속에 버티고 있어 태백산의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문수봉 정상은 날씨가 기이하기로도 유명한데, 필자는 5월 초에 이곳에서 눈발이 휘날리는 장면을 감상한 적도 있다.
태백산 정상(1566m)과 천제단(1560m) 주변은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천제단은 조상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천왕단 장군단 하단의 3개 제단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중 천왕단이 가장 유명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때부터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해마다 1월1일이면 저마다 새해 소망을 가슴에 품은 수많은 사람이 태백산을 찾는다. 천제단에서는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자시(밤 11시30분~01시30분)에 기도하는 사람을 1년 내내 볼 수 있다.
천제단 아래에서 숨을 고르며 일망무제의 장관을 즐기는데 구름 속에서 기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호흡을 조절하는 그들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한 젊은이의 곁에 다가가 백두대간 종주자라고 밝히자, 옛 도인들의 산행법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름하여 ‘경공법(輕空法)’. 그는 수련을 통해 경공법을 몸에 익히면 산길이라도 하루에 60~70km를 달릴 수 있다고 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그는 짧은 강의를 마치고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납시다”라는 말을 남긴 뒤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산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천제단 바로 밑에는 단종비각이 있다. 여기에도 애틋한 사연이 깃들여 있다. 단종은 세조반정으로 영월땅에 유배됐는데 당시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이 태백산의 머루와 다래를 따서 단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어느 날 추익한의 꿈속에 곤룡포를 입은 단종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에 나타났는데, 바로 그날 단종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후 이 지역에서는 단종이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고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9월3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비각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지어진 것으로 한국불교의 선승 중 한 명인 탄허 스님이 직접 비문과 현판 글씨를 썼다.
단종비각 앞쪽의 망경사는 천제단에서 장기간 기도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산꾼들에게는 망경사 내에 위치한 용정(龍井, 1470m)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인 용정의 물은 신라시대부터 천제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썼다고 하며, 샘의 물줄기가 용궁과 통해 부정한 이가 마시면 물이 혼탁해진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화전에서 광산으로 그리고…
7월21일 새벽이다. 자시와 인시(03시30분~05시30분)에 맞춰 수십 명의 기도자가 천제단을 오르내리느라 망경사의 밤은 부산했다. 5시가 가까워지자 법당에서 예불 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사의 아침은 그렇게 밝아왔다. 절간의 새벽풍경에 대해서는 아마도 가수 정태춘이 부른 ‘탁발승의 새벽노래’가 단연 압권이 아닐까 싶다.
‘주지스님의 마른기침 소리에 새벽 옅은 잠 깨어라 하니, 만리 길 너머 파도소리처럼 꿈은 밀려나고, 속세로 달아났던 쇠북소리도 여기 산사에 울려 퍼지니, 생로병사의 깊은 번뇌가 다시 찾아온다. 잠을 씻으려 약수를 뜨니 그릇 속에는 아이 얼굴, 아저씨 하고 부를 듯하여 얼른 마시고 돌아서면, 뒷전에 있던 동자승이 눈 비비며 인사하고, 합장해 주는 내 손끝 멀리 햇살 떠올라 오는데…’
새벽 5시30분, 아침을 먹고 배낭을 꾸린 뒤 망경사를 떠났다. 천제단에서 유일사로 이어지는 길은 긴 내리막이라 다소 지루할 것도 같지만 산 중턱에서 주목을 바라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유일사에서 화방재로 가려면 1174m봉을 넘어야 한다. 화방재는 31번 국도가 지나는 길목으로 봄철이면 꽃들이 만발하는 명소다.
화방재에서 수리봉(1214m)과 창옥봉(1238m)을 지나면 만항재가 나오는데, 이 길에서 필자는 수백 마리의 잠자리 떼가 몰려다니는 장관을 목격했다. 만항재에 이르기 직전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국가시설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야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날 수 있는데, 필자가 가까이 다가서자 미군병사 한 명이 경계의 눈빛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필자의 눈에 반갑지 않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방사능 유출 위험’.
만항재부터는 함백산(1572m) 줄기다. 함백산은 인근 태백산의 유명세에 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지만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태백산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서 한적하게 걷고 싶다면 태백산보다 함백산을 택하는 것이 좋다. 함백산을 오르다 보면 좌우로 초목지대가 자주 보이는데 오래 전 이곳에 화전민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또 이 지역은 연탄이 주연료로 쓰이던 시절, 전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탄광지대 중 하나였다.
강원도 전통가옥인 너와집.
은대봉에서 30분 정도 내려서면 38번 국도가 지나는 두문동재(싸리재)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38번 국도와 인연이 깊다. 필자의 고향이 경기도 안성이고 처가가 강원도 태백인데, 38번 국도는 두 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싸리재는 본래 구불구불 돌아 넘는 산길이었지만 요즘은 터널이 뚫려서 산꾼들이나 가끔씩 들러가는 쉼터로 변했다.
매봉산 고랭지 배추의 두 얼굴
싸리재에서 금대봉(1418m)으로 가려면 넓은 길을 따르다 산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금대봉에서 비단봉(1279m)으로 향하다 보면 좌우로 표지판이 보이는데, 왼쪽은 한강발원지인 검룡소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석회암동굴지대인 용연골로 가는 길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하천 발원지 가운데 검룡소는 가장 신비로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검룡소의 물은 한여름 폭염에도 찬 온도를 유지해 최근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검룡소에서는 해마다 8월 초가 되면 이색적인 이벤트가 벌어지는데, 바로 전국에서 물을 가장 많이 마시는 사람과 가장 빨리 마시는 사람을 선발하는 대회다. 필자는 수년 전 이 대회에 참가했다가 당시 두 종목을 2년째 석권한 ‘전국 물먹기 챔피언’의 차에 동승한 일이 있다. 1ℓ의 물을 10초 만에 마셔버리는 그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참으로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에 물을 많이 먹었어요.”
비단봉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20여분 가면 어느 순간 산길이 그치고 광활한 배추밭 지대가 나온다. 이곳이 그 유명한 매봉산(1303m) 고랭지 채소밭이다. 서울 가락동시장에서 매봉산 배추의 인기는 대단하다. 트럭의 거적을 들어올렸을 때 찬바람이 나오면 매봉산 배추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여기서부터 백두대간은 밭고랑을 따라 달린다. 길이 밭이요, 밭이 길이다. 배추밭을 자세히 살피니 온통 돌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싱싱한 배추가 자랄 수 있을까. 또 이 많은 배추가 벌레 한 마리 없이 자라는 비결은 무엇일까. 밭고랑에 차고 넘치는 비료와 고개 너머 한 농부가 농약을 쏟아붓는 모습에서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농약에 물을 타는 농부에게 다가가 약 냄새가 독하다고 하니 농부가 땀을 닦으며 특유의 강원도 사투리로 말한다. “서울사람들이요, 깨끗한 것만 좋아한대요. 우리는 서울사람들 좋아하는 대로 하는 거래요.” 하긴 배추를 수확하기도 전에 도매상들이 밭떼기로 거래하고, 값이 안 맞으면 그대로 썩혀버리는 세상이니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밥상의 먹을거리가 각종 농약과 살충제로 인해 크게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매봉산 배추밭에서는 배추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북을 돋우는 아낙네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여름철 들일을 하는 사람에게 머릿수건은 그야말로 다목적 필수품이다. 자리가 마땅치 앉으면 깔개로, 음식이나 열매를 싸는 보자기로, 평상시에는 햇볕을 막아주는 가리개로…. 배추밭 지대를 지나 피재에 다다를 무렵 품일을 마친 아낙네들을 실은 봉고차와 트럭이 연이어 내려왔다. 한낮의 더위에 지친 그들은 머릿수건을 풀어 땀을 닦거나 물에 적신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아찔했던 폭염 속의 산행
7월22일, 태백 시내의 처가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백두대간으로 붙었다. 삼복더위에 길을 나서는 필자에게 장모님은 “이게 무슨 미련한 짓이냐”며 당장 그만둘 것을 권했지만 젊은 시절 산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잘 탔던 장인께선 “몸조심하라”며 노잣돈까지 쥐어주셨다. 오전 9시. 출발지인 피재에 이르자 벌써부터 후끈거렸다. 해발 920m가 이 정도라면 서울의 날씨는 어떨까 싶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한마디로 살인적인 폭염이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대서였다.
피재는 삼수령으로 불리기도 한다. 삼수령의 삼수는 한강과 낙동강, 오십천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 세 줄기의 물길이 갈라진다는 뜻이다.
삼수령에서 노루메기와 새목이를 거쳐 건의령에 이르는 길은 큰 봉우리가 없는 완만한 산길이다. 그러나 굴곡이 심하고 잡목이 많아 의외로 힘이 들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다 보니 갈증이 심해졌고, 물을 자주 마시다 보니 땀이 더 많이 흐르는 탈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건의령을 넘어서면서 백두대간은 태백을 벗어나 삼척으로 진입한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고도가 높아져 푯대봉(1009m)을 시작으로 1000m가 넘는 봉우리를 수없이 지나야 한다. 자연 체력은 거의 바닥났고 무릎과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구부시령(1007m)에서 비상탈출로를 타고 하장 방면으로 내려설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내치기로 했다. 여기서 하산하면 다음 코스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덕항산(1070m)을 넘어 자암재에 이르렀을 무렵 해가 산줄기에 걸렸다. 여기서는 탈출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암재에서 산 아래쪽으로 100m쯤 내려서자 약수터가 보였다. 이곳에서 시원한 물로 세수를 하자 다시 원기가 솟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자 덕항산의 산세도 새롭게 보였다. 특히 설패바위와 촛대바위를 굽어볼 수 있는 두 개의 전망대가 압권이었다. 경사도 60도가 넘는 철계단을 타고 다시 바위 동굴을 통과해 물소리를 들으며 내려서는 코스에서 필자는 석양과 기암절벽의 아름다운 조화를 만끽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 돼서야 민박촌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강원도의 전통적인 굴핏집 단지로 유명하다. 소나무와 전나무 널빤지로 지붕을 얹은 굴핏집은 통풍이 잘 되고 난방효과도 뛰어나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널리 유행했었다. 식당을 겸하는 민박집에서 도토리묵을 안주 삼아 동동주를 마시며 굴핏집의 유래를 물으니, 집주인은 11대 선조가 병자호란 때 피난 와서 정착했다고 일러주었다. 그에 따르면 옛날에는 널빤지만으로 지붕을 꾸몄지만 지금은 슬레이트를 깔고 그 위에 널빤지를 올린다고 한다.
전설 속의 동굴, 환선굴
7월23일. 산골마을에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집주인은 새벽부터 청소를 하느라 바쁘다. 필자는 일찌감치 아침을 챙겨먹고 길을 나섰다. 한여름 산행인 만큼 탈수 증세에 대비하기 위해 이온음료 4병을 따로 챙겼다. 민박촌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10여분 올라서면 삼척의 명물이자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환선굴이 나온다. 환선굴은 길이 6.9km, 높이 30m에 이르는 동양 최대 규모로 동굴 안쪽에는 최대 3000명까지 모일 수 있다.
환선굴의 유래에 얽힌 전설도 흥미롭다. 옛날 아름다운 여인이 미역을 감았는데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쫓아가자 천둥번개와 함께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쏟아지고 여인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그 여인을 환생한 선녀라 믿고 바위가 쏟아진 곳을 환선굴이라 이름 지었으며, 굴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선녀폭포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번 내려선 길을 다시 오르자니 여간 고단한 게 아니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밧줄에 의지해 바위동굴로 들어서자 찬바람이 불어왔다. 덕항산은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의 날씨가 전혀 다르다. 어제 올라섰던 철계단을 이번에는 내려서야 했다. 발밑을 바라보니 아찔한 벼랑이다. 전망대의 풍경은 어제와는 또 다른 묘미를 보여주었다. 이래서 같은 산도 언제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다르다고 하는 모양이다.
자암재에서 1036m봉을 넘어서니 매봉산 배추밭에 버금가는 거대한 고랭지 채소단지가 나타났다. 대간 마루금 표지는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지도와 나침반에 의존해 배추밭 사이를 가로질렀다. 배추밭이 끝나는 지점에 임도가 하나 있는데 이곳이 큰재다. 여기서부터는 기나긴 잡목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길이라기보다는 숲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풀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통에 목덜미에 벌레가 앉고 팔과 얼굴에 상처가 났다. 틈틈이 이온음료를 마신 덕분에 다행히 탈수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큰재에서 2시간쯤 걸어가니 황장산(1059m)이다. 황장산에서 멀리 424번 도로를 바라보니 아슬아슬한 절벽이다. 그 위를 지나는 자동차들이 마치 낭떠러지 위에서 기어가는 듯 위태로워 보인다. 고갯마루에서 긴 숨을 고르고 20여분쯤 내려서자 이번 산행의 도착지인 댓재가 나타났다. 앞을 바라보니 또 하나의 명산 두타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