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면의 은신처에서 절제된 편안함을 즐기는 정현종 시인. 형형한 눈동자와 백발의 노시인은 하얀 호랑이, 정신 깊은 사찰 초입에 서 있는 사천왕상을 닮았다. 그가 일군 이력은 바위덩어리처럼 묵직하지만 시 한 편 한 편은 날개를 달고 있어 가볍게 우리에게 날아온다.
그 친구 역시 수십 년을 형제처럼 지내온 선배가 있었다. 그는 내 친구 인생의 멘토였고 직장 상사였으며 어려운 시절 1년 남짓 자신의 집에서 머물게 해줬으니, 친구에게는 그 선배가 가족과 같았다. 바로 그 선배가 암 투병을 할 때 친구는 매주 토요일 오후면 선배를 찾았다. 내 기억에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친구와 놀고 싶어 나와 있자고 했다. 그런데 친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선배에게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가끔 안 갈 수도 있지,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이유가 뭐냐고. 친구는 말했다.
“내가 오갈 데 없을 때, 1년 넘도록 매일 저녁밥을 집에서 먹여준 선배다.”
춥고 헐벗은 시절에 선배의 식구들과 저녁밥을 같이 먹었다, 라는 말은 시다. 그 말의 울림에서 나는 잠시 벗어나지 못했다. 선배와 그의 아름다운 부인, 그리고 자식들까지.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 후로도 친구는 어김없이 토요일 오후면 그 선배를 찾아갔다. 가서 그동안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과 세상 이야기를 전했고, 간혹 산책도 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며칠 전에 친구의 그 선배가 작고했다. 친구는 사흘 내내 상가를 지키느라 몸이 지쳤고, 마음은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낙담한 친구를 위해 명동 지하상가 레코드 가게에서 LP판을 사주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뜨거운 칼국수를 같이 먹었다. 그리고 소공동 지하상가에서 시청을 거쳐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그 친구는 직장으로, 나는 내 갈 길로 갔다.
그리고 정현종(鄭玄宗·69) 선생을 만났다. 한 달 전 통화할 때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전날에 선생이 그냥 당신이 대학 퇴임 후 연구실로 쓰는 동부이촌동의 아파트로 오라고 하셨다. 그냥 편하게 몇 마디 나누면 되리라. 선생을 찾아가는 강변북로는 출근시간이 지나선지 한가했고, 초행길이었지만 동부이촌동을 조금 아는 터라 가는 길이 편했다. 가는 도중에 왜 나는 선배를 잃은 친구의 모습을 떠올렸고, 선생의 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를 중얼거렸을까. 모를 일이다. 무슨 상관이 있다고.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전문
아마도, 나는 그 친구와 선배의 아슬아슬한 관계의 거미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나 보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리고 누군가가 미워질 때 나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중얼거리곤 한다. 그래서 친구와 칼국수를 훌훌 먹는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친구의 외투에서 자라고 있는 오리와 거위의 털을 나는 보았다. 그 따뜻함은 오리와 거위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친구의 선배는 이제 그 오리털처럼 친구 마음의 외투에 자리 잡았다. 겨울 외투에 숨어 있는 오리와 거위털은 한겨울에 그냥 있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막 자란다.
하얀 호랑이
선생은 연구실 거실에서 맞아줬다. 거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역광을 받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정신 깊은 사찰 초입에 서 있는 사천왕상과 흡사하다. 간혹 술자리 말석에서 선생의 빈 술잔을 채우던 내가 독대를 한다니 우선 기분이 좋았다. 인터뷰를 별로 내켜 하지 않는 선생이 다정하게 이야기 자리를 허락해줬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선생을 마주했다. 약간 비스듬히 선 자세로 나를 자세히 보는 것 같았다. 형형한 눈동자와 백발의 노시인은 하얀 호랑이처럼 나를 보았다. 순간, 이제부터 뭘 물어보나 하는 생각에 아득했다.
나의 주특기인 ‘신변잡기 이야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텅 비었다. 이제 어떡하나. 몇 가지 물어볼 요량으로 적어온 노트는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새로 준비한 하얀 노트를 펼쳤다.
선생과의 이야기를 정리하기 전에 우선 2005년 모교인 연세대 국문과를 정년퇴임하기까지의 이력을 살펴보자. 많이 알려진 분들의 이력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의 시에 함몰되어 정년퇴임한 것까지 잊곤 한다. 아직도 연세대 교정에 가면 선생이 걸어가실 것 같은 기분이다.
선생은 1939년 12월17일 아버지 정재도씨와 어머니 방은련씨의 3남1녀 중 셋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화전(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 시절에 당연히 시인으로서 몸과 마음이 다듬어졌을 것이다. 선생은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젠 너무 아득한 것인가.
개인적으로 선생은 필자의 대광고교 대선배다. 선생의 산문과 기사에 자주 등장한 레퍼토리이기도 한 중·고교시절 문학과 음악, 철학, 발레에 대한 심취는 유명한 이야기다. 인간의 정신과 춤이라는 육체에 대한 발견은 소년을 예술가로 성장시켰다.
1959년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한 선생은 대학 시절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박두진 시인의 맘에 들어 1964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이후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만들어 절차탁마의 시기를 거친다. ‘사계’ 동인은 우리 문학의 별자리이기도 하다. 이름만으로도 울림이 깊고 넓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태양사, 동서춘추, 서울신문사 문화부,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1974년 미국 아이오와 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이때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한 모양이다.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아이오와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경험이 참 좋았다’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이 여행을 기점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는데 모두 시와 시인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시인의 눈빛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1982년부터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시인과 문화계의 걸물들을 길러냈다. 기형도, 성석제, 원재길을 비롯한 우리 문단 중진 상당수가 선생의 제자들이다.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얇은 슬픔이니’ 외 6편으로 연암문학상을, 1992년 ‘한 꽃송이’로 이산문학상을,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현대문학상을,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대산문학상을,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초대 미당문학상을, 이외에도 한국문학작가상, 네루다상, 경암학술상 예술 부문을 수상했다.
이런 이력은 빙산의 일각이면서 나무의 씨앗일 것이다. 모든 것이 이 안에 다 들어 있지만, 꽃도 줄기도 뿌리도 없다. 시도 아니다, 그저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일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하고도 무거운가. 이러한 이력을 종이에 쓴다면 무거워 들기 힘들다. 하지만 선생의 시 한 편 한 편은 날개를 달고 있어 가볍게 우리에게 날아온다. 선생의 가볍고 환한 시는 이처럼 육중한 바위덩어리와 같은 이력을 통해 나오는 샘물 같은 것이다. 어둠 속의 별인 것이다.
기계를 만들기 전에 설계도를 그리듯 이러한 사실 확인을 꼼꼼히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이력을 중심으로 선생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선생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이런 이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다. 부모에 대해서도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그간 지면이나 인터뷰를 통해 많이 했기 때문이다.
대신 최근에 낸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를 한 권 건넸다. 이 책을 3분의 2쯤 읽다가 잃어버렸다. 주로 집필실과 광화문 사무실에서 독서를 하는데, 두 군데 다 없었다. 혹시 집에 뒀나 싶어서 찾고 있는데, 밥을 짓고 있던 아내가 내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그 책 어디론가 날아갔나 봐요, 그만 찾아요.”
정년퇴임 후 선생은 자택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이 공간에서 주로 책읽기를 하면서 보낸다고 했다.
“퇴임하니 내 시간이 많아져서 좋아요. 사람들에겐 자기 시간이 중요하지요. 남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그러하지만, 자기 시간이 없으면 안 돼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문지’ 모임에 간혹 나가고, 더러 찾아오는 후배들과 제자들을 만난다고 했다. 이것이 선생이 남하고 어울리는 시간이다. 그간 어울려 마신 술자리에 속은 헐었고, 자기 시간은 비좁았다. 그러한 비좁음이 정년퇴임과 함께 환하게 넓어졌으니 삶의 여유를 즐기는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책 읽고, 음악 듣고, 그리고 걷고 있다고 했다. 쓴다는 말씀은 굳이 안 했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절제된 편안함이다.
오히려 그간 남과 어울리느라 읽지 못했던 책을 읽어 얼굴의 날은 더욱 섰으며, 눈빛은 더욱 형형하다. 저 눈빛. 시인이라는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별과 같은 눈이었다. 선생은 여전히 ‘별 아저씨’다.
선생의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득히 멀리 선생이 있는 것 같다. 선생의 얼굴에는 글 안 쓰는 자의 편안함이 새털만큼도 묻어 있지 않다. 그 긴장감은 아마도 집필과 더불어 치열한 책읽기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있나 싶었다.
“허허, 이제 늙어가다 보니 관심이 그리로 가요. 왜 있잖아, 늙음에 대한 고전들. 키케로의 ‘노년에 대해서’, 세네카의 ‘인생은 왜 짧은가’와 같은 책들을 흥미롭게 읽고 있어요.”
내부의 은신처
잠시 젊은 시절의 독서와 늙어서의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젊어서는 책 읽는 시간보다 책을 찾아서 책방 헤매는 시간이 더 많았어요.”
출판 볼륨이 얼마 안 되던 시절, 고교시절에는 청계천이나 북아현동의 헌책방을 들개처럼 찾아다녔고, 외국어에 눈을 뜬 대학시절에는 수입서적 서점인 범한서적이나 동아일보사 앞에 있던 동아서점을 주로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책방 다니는 시간보다는 당연히 책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엄청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선생은 고전을 읽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예로 들었다. 선생의 말씀을 받아 적으면서 나는 명상록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이건 선생의 여러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 옮겨본다.
‘사람들은 시골이나 바닷가, 또는 산속에서 은거할 곳을 찾는다. 당신도 그러한 은신처를 갈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꿈은 철학자에겐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내부에서 은신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보다 더 조용하고 안락한 은신처는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자, 이제 당신 내부에 있는 작은 장소에 은거하라. 우선 마음의 갈등과 긴장에서 벗어나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되라. 그리하여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하나의 유한한 생명체로서 삶을 바라보라. 많은 진리 중에서도 당신이 가장 자주 상기해야 할 진리가 두 가지 있다.
첫째, 외부의 사물들은 당신의 영혼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외부에 조용히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오직 당신 내부의 생각뿐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당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은 순식간에 변하고 사라져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당신 자신도 그 변화의 일부로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음을 늘 명심하라. 우주는 곧 변화이며, 인생은 그것에 대해 이해하는 자의 것이다.’
‘명상록’은 선생이 젊어서 읽은 책인데, 다시 읽으니 새롭게 다가온다고 했다. 선생은 ‘명상록’을 이야기하면서, 명상이라는 말의 함정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물론 예외적으로 타고난 명상적 인간도 있지만, 젊어서는 명상할 시간이 없다. 젊음은 호기심, 욕망, 의욕이 팽팽하게 타오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타오르는 에너지가 응집되어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하고, 명분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하기도 하고, 생명과도 같은 자유를 지키기도 한다. 젊어서는 명상하기보다는 움직여야 하고, 그 움직임 가운데서 자기 자신만의 자리를, 은신처를 찾으라는 말씀으로 나는 들었다.
말하는 방식
선생은 철인 황제라는 아우렐리우스를 다시 읽어보니, 우선 되풀이되는 내용이 많아 뒤로 갈수록 재미가 없다며 웃었다. 하긴 나도 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심스럽다. 선생 나이쯤 되어 다시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선생은 이런 말도 했다. 어려운 책의 경우 하고자 하는 말이 관념적으로 치우쳐 책 읽는 재미를 놓치기 쉬운데, 고대 철학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
“키케로, 세네카, 아우렐리우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에게 배울 게 있어요. 바로 ‘말하는 방식’입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른바 수사학의 대가들이고 전인적인 인격체들입니다. 우리가 뻔히 아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이게 중요해요. 같은 내용이라도 오는 게 다르지요. 그래요. 우주, 조화, 이성, 자연과 같은 키워드는 예나 지금이나 영원한 주제예요. 그런데 이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어 보면 뭔가 다르게 생각하게 하지요. 이런 걸 확인하는 게 아주 즐거운 일이에요.”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상투적인 짓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어떤 시인은 그저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무척 다른 이야기를 한다. 어떤 시인은 아주 그럴 듯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상투적이다. 뭐가 좋은가.
선생은 말씀 중에 잠시 쉼표를 찍고 나서 ‘하여간’이라고 하곤 했다. ‘이러저러해서 저런데, 하여간’ 이런 식으로 말에 리듬을 살렸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음악소리 같다. 하여간.
“문학도 그래요. 소재는 다 그런 거예요. 인생이지요. 영원한 주젭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거기인 것 같은 인생을 가지고 어떻게 그걸 말하느냐에 따라 너무 달라요, 하여간.”
대가와 소인배의 차이이기도 하다.
천하 명시
선생은 중국 시에 대한 말을 꺼냈다. ‘도연명 전집’ ‘소동파 시선’과 같은 작품을 읽고 나니 시에 대한 생각, 시와 번역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시선(詩仙)’이라 일컫는 이백의 시를 번역해놓은 걸 보면 뭐 이런 작품이 천하 명작이라는 소리를 듣나 싶을 때가 있다. 중국 시를 읽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당시 4만8900여 수 중에서 단연 최고인 시선 이백의 칠언절구 한 편을 보자.
향로봉에 햇빛 비치니 보랏빛 안개가 일고
저 멀리 보이는 폭포 긴 시내처럼 걸려 있다
나는 듯 곧추 떨어지는 물줄기는 삼천 자
은하수가 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듯하다.
-시 ‘望廬山瀑布(여산의 폭포를 바라보며)’ 전문
이게 명시인 이유가 뭘까. 천하 절경인 여산의 봉우리에 햇빛 비치고, 폭포 떨어지는 풍경이다. 나도 이 정도는 쓰겠다, 라는 오만함을 갖게 한다. 그래서 선생은 중국 시 번역하는 이에게 물었다고 한다. 도대체 번역해놓은 시를 보면 천하 명시라 느낄 수 없는데, 이백을 비롯한 중국 명시는 왜 명시인가.
그때 번역하는 이가 바로 ‘소리’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운율법이 엄격한 중국 시는 소리 내어 읽으면 도저히 번역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러한 답변은 내 가슴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는 것이다. 김소월이나 백석을 어찌 한자나 영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인가, 하여간.
“비단 중국 시뿐만이 아니에요. 모든 나라의 시들도 번역을 하면 소리가 없어지죠. 시가 번역 불가한 이유지요.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좋은 게 있긴 하지요. 그런 시가 좋은 이유는 대체로 품격이 있고 매인 데가 없는 특징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혹시 선생은 이백의 ‘산중문답’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싶었는데, 특별히 질문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백의 산중문답을 ‘소리’가 없어도 좋아한다. 품격이 있고, 매인 데가 없기 때문일까.
그대는 어찌하여 이 푸른 산속에서 사는가라고 물으니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는 내 마음은 한가롭기만 하네
도화꽃 떨어져도 아득히 흘러가는 이곳은
별천지일 뿐, 인간이 사는 곳은 아니다.
-시 ‘산중문답’ 전문
선생은 중국 시 이야기를 길게 했다. 그리고 말했다.
“하여간, 시를 이야기할 때 소리는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이지요. 그리고 이백과 소동파 같은 시인들이 술 마시고 노는 모습은 좋아요.”
잠시 이야기를 쉬는 사이 선생은 이제 할 일이 없어지면 점집을 차려야 되겠다는 유머를 던졌다. 동양철학이나 주역에 통달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이만큼 살아보니 그런 것 없이도 사람의 운명 같은 걸 짐작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몇 마디를 나눠 보고, 표정을 보면 대충 보여요. 심지어 걸음걸이를 보면 그게 보이기도 한답니다. 점집을 차려놓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슬며시 운명 이야기를 해주면 되지 않을까? 허허, 하여간.”
선생은 매우 민감한 시인이다. 그래서인지 진짜냐 아니냐에 대한 민감함이 있다. 진실되냐, 참되냐. 이건 시를 떠나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류에 휩쓸리는 유의 사람을 멀리하고, 부화뇌동하지 않는 진솔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편이다. 시끄러운 것에 휩쓸리기 싫고, 대중적인 유행도 탐탁지 않다. 사상, 철학도 유행과는 잠시 거리를 뒀다가 조용히 만나는 것이다.
어쩌다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5년 전에 나온 김훈의 ‘칼의 노래’를 작년에 읽었다고 했다. 책이 나왔을 때 언론이 지나치게 집중조명해서 부화뇌동하기 싫어서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당신은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김훈의 소설은 아주 좋았다고 했다. 언제 김훈을 한번 만나 술 한잔 사 주고 싶다는 말씀도 했다.
침묵의 깊이와 넓이
이것 역시 선생의 특징이다. 선생은 작품만을 본다. 시인의 몸은 바로 시이고, 시인의 꿈틀거림은 시의 꿈틀거림이다. 선생이 고교 시절 발레를 보고 법열을 느낀 그 느낌 그대로 작품에 투영된다. 좋은 시를 보고 좋아하는 선생의 모습이 시인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호랑이가 호랑이를 알아보듯이 말이다.
“작품이 좋으면 난 꼼짝 못해요. 너무 좋으면 꼼짝 못하는 거지. 그냥 좋은 거지요.”
선생은 소설과 같은 장르보다는 대담, 좌담 같은 글이 좋다고 했다.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이다.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걸 대화를 통해 알려주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인터뷰도 뛰어난 시인이 했더라면 더 좋은 글이 나왔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못하고 선생이 하는 말씀을 받아 적기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강의를 듣는 학생이 돼가고 있었다.
어떤 완벽주의 작가는 말로 하는 인터뷰는 절대 하지 않고, 서면 인터뷰만 한다고 했다. 그런 유의 인간은 빈틈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선생은 빈틈이 있는 게 좋은 거라고 일러줬다.
“완벽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빈틈이지요. 그러나 그런 완벽한 태도는 좋은 것입니다. 이런 대화는 빈틈이 많아요. 그게 우리 생각과 말의 운명이지요.”
시에 대해서 선생은 완벽주의자다.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때 유명했던 승려시인 두 분이 시를 들고 찾아온 적이 있다고 했다.
“하여간, 봐달라고 해서 봤는데…근본적으로 문학 언어는 세속적인 언어입니다.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 거기서 나오는 살아 있는 언어로 작품을 써야 하는데, 모든 것에 초연하고 초탈하면 글쎄…물론 우리나라 선시집에 나오는 시처럼 예외가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불교의 가르침을 운문으로 바꾼다고 해서 시가 되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그러한 불교적 세계관에서 시인들은 ‘언어 침묵의 깊이와 넓이’를 배워야 한다고, 울림이 많은 시가 좋은 시라고 했다. 불가의 가르침은 불립문자의 세상이다. 세상의 모든 언어를 속으로 들이고 녹이고 갈고 닦은 금강석 같은 한마디다. 즉 해탈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불립문자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을 다 집어삼킨 최고의 경지를 가리킨다. 하지만 시인은 때론 무서운 언어로, 때론 허망한 언어로 그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울리는 범종과 같은 존재다. 범종에 새겨진 연꽃 문양을 향해 승려들은 타종을 한다. 그 연꽃 문양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찌들고 병들고 죽어가는 세속의 모든 사람에게 스민다. 시인의 언어는 그러한 경지로 올라가야 하는 것인가.
당의정을 입힌 시
선생은 중학생 때 처음으로 시집을 읽었다고 했다. 당시 열악한 출판 환경으로 인해 지금 같은 양질의 책이 아니었다. 누런 재생 종이에 번역시집, 바이런 하이네와 같은 외국 시인들의 시집들을 읽었다. 송영택 선생의 릴케 번역 시집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리고 교지 편집을 하면서 우리 현대문학의 시들을 접했다. 그러나 중·고교 시절은 온통 잿빛 기억들이다. 선생은 모교의 이미지를 대학에 두고 있었다. 어둡고 좁고 암울하던 회색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나와 신록과 녹음이 우거진 대학 교정은 선생에게 따뜻한 양수가 가득한 자궁이고 모성이었다.
“가난에 찌든 중·고교 시절, 사춘기 시절에 겪어야 하는 터무니없는 심각함의 터널을 지나고 나서 첫발을 디딘, 깊고 푸른 숲이 있는 대학은 정말 좋았어요. 하루 종일 교정의 숲 속에 머물기도 했지요.”
선생은 이런저런 직장을 거쳐, 모교인 연세대에서 시와 제자들과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정년을 맞았으니 행복하신 분이다. 선생의 그 형형한 눈빛은 모교의 깊은 숲 속의 정기가 어려서일까. 이러한 선생의 심경을 산문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에서 이렇게 묘사하신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를 낳으시고, 이 이상하게 찬란한 발전을 있게 하신 위대한 모태 중의 하나인 우리들의 권태-조직화되고 집단적이며 머리도 심장도 없이 쇳덩어리처럼 강력한 그 권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나는 어느 날 신었던 구두를 벗어놓고 맨발로 흙을 밟았다.
걸어가면서도 풀을 밟았다. 나는 느꼈다. 흙과 풀은 제 살을 베어먹이듯 나를 맞이했고, 은밀히 나를 껴안았고, 나를 높은 데로 탕탕 밀어 올렸다. (영원히 여성성이 우리를 높은 데로!)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는 떠올랐다.
가벼운 에테르처럼 날아올라 바람처럼 높이 솟으면서, 그리고 흙과 풀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춤추듯 하나씩 옷을 벗었다. 손에 들고 있던 책 ‘짜라투스트라’도 ‘파리의 우울’도 모두 날개를 허용하는 저 깊은 천공의 푸른 공기의 흔들리는 선반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이제 벌거숭이의 투명함이 내뿜는 빛에 싸여, 상승과 비상의 이미지인 육체인 듯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선생은 말했다.
“니체는 우리의 삶을 견디게 하기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고 했지요. 이런 식으로 자기 삶을 견디면서 남의 삶을 견디게 하면 좋습니다. 하여간, 아주 사적인 체험과 감정, 생각이 동기가 되어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은 시이고 반대의 경우는 나쁜 거라고나 할까. 이건 재능의 차이겠지요. 그래요. 김소월, 한용운과 같은 좋은 시는 많지 않습니다.”
선생은 나쁜 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제일 나쁜 시는 조미료를 친 시다. 쓴 약을 아이에게 먹이기 위해 당의정을 입힌 것이다. 그것이 대중의 입맛에 맞아 잠시 인기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 시를 위해서는 이러한 현상을 경계하는 비평가들의 날카로운 안목이 필요하다. 비판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당의정 시들은 유행가 가사보다 못하다. 예를 들어 ‘봄날은 간다’와 같은 노래의 가사는 얼마나 절절한가. 이 정도 수준에 오르지도 못하는 조미료의 시들은 구역질나게 한다.
날카로운 메스로 환부를 잘라내는, 가슴에서 피가 흐르면서 아리고 저리는 노시인의 욕심 없는 무서운 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프카와 같은 작가는 순수한 예술가의 전형이 아닐까. 선생은 카프카 이야기를 하면서 ‘카프카는 성자이지 소설가가 아니’라고 했다. 정말 좋은 책을 보면 꼼짝 못하는 선생의 마음이 보였다.
“‘카프카와의 대화’라는 책이 있어요. 작년 겨울에 번역되어 나온 걸 봤는데 무척 기뻤어요. 그 책은 1974년 미국 아이오와에 갔을 때 서점에서 사서 읽었는데 읽는 동안 밑줄을 많이 그었지요. 꼭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성자 카프카를 알아본 구스타프 야누흐 역시 대단하고 집요한 사람이지요.”
無의 상태
저자 구스타프 야누흐가 1920년 열일곱 살에 아버지와 함께 당시 프라하 노동자 재해보험공사 법률관으로 근무하던 서른일곱의 카프카를 만나, 1924년 카프카가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4년여 동안 그와 나눈 대화와 정신적 교류를 기록한 책이다. 선생은 이 책에 카프카라는 사람의 됨됨이가 보인다고 했다. 카프카의 이러한 태도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생래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비상하고 참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무(無)의 상태로 비워뒀어요. 텅 빈 상태에서 모든 걸 보고 말하는 거지요. 자기가 없다는 것,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자기가 좋은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참되게 몰입하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런 계산이 없어요. 이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렇다. 선생은 카프카를 빌려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선생의 텅 빈 몸과 마음에 이렇게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지나갔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시 ‘견딜 수 없네’ 전문
관심이 오로지 자기탐욕에만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시를 보내고 싶다.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덜어내고 비우고 ‘흐르고 변하는 것’과 ‘아프고 아픈 것’들을 자기 몸으로 느끼기를 기원한다.
마음속 타자들
더불어 선생은 랭보의 편지 이야기를 했다. 이미 열아홉 살에 시인으로서 무의 경지에 올라선 랭보는 스승인 이잠바르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난 내 자신이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또한 조금도 내 탓은 아니다. 난 생각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사람들이 날 생각한다, 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타인이다.’
‘나는 한 사람의 타자’라는 편지의 한 구절이 선생의 말을 극명하게 정리한다. 비단 시인의 마음뿐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 내 마음속에 ‘아집’과 ‘아상’이 꽉 차 있으면 뭐가 들어올 수 있고, 뭐가 나갈 수 있을까. 선생은 한 인간의 마음속이 타자들로 꽉 차 있어 우글거린다면 큰 글쟁이라고 했다. 이러한 시인이 한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궁금해 하기도 한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한국 시 100주년 기념으로 100편의 시를 뽑기도 하고, 10명의 최고 시인을 간추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벤트에는 독자를 위해 주석을 붙여야 한다고 선생은 말한다. 예술작품은 순위를 매길 수 없다는 것, 투표에서 많은 표를 얻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 소수 독자만 있어도 좋은 시는 좋다는 것.
좋은 시를 이야기하면서 예술가가 유명해진다는 것은 ‘장애’라는 말도 했다. 그것은 마치 과일 속 벌레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벌레에 정작 몸을 다 갉아먹혀버려, 유명해진 다음에 글을 못 쓰는 사람도 있다.
내가 누구인가
선생에겐 많은 친구와 선후배, 제자가 있다. 그중에서도 불문학자이자 한국 문학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은 문학평론가 고(故) 김현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분의 막역한 우정은 문단에서 유명하다. 한번은 어떤 젊은 평론가가 정현종 선생을 뵙고 나서 “왜 김현 선생이 정현종 시인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라고 한 적이 있다. 비록 한나절이었지만 나 역시 정현종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왜 사람들이 정현종 시인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왜냐고 묻지는 말라. 대답하기 곤란하다.
선생은 김현 선생을 생각하다 “가끔 그에게서 무척 놀라운 말을 듣기도 했다”고 했다. 한번은 김현 선생이 신문에 난 당신의 사진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게 나인가? 이게 김현이라는 자기인가? 우습지 않나?”
‘나’ ‘자기’에 대한 이러한 촌철살인의 말은 바로 문장이 된다. 선생은 이런 김현 선생의 이야기를 하면서, 보통사람들은 신문에 난 자기가 자기인 줄 안다고 했다. 내가 나를 바라본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신문에 난 사진이 내가 아니고, 거울에 비친 내가 나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마치 하늘 높이 떠오른 독수리가 지면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듯, 중국 유학자 주희의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지상에 있는 호수에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호수에 비친 달은 분명 달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이지만, 달을 닮아서 밝은 빛을 내고 있다. 그런데 달이 호수 위에만 비치는 것일까. 시궁창에도 흙 위에도 아파트 담장 위로도 그림자가 맺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왜 빛나지 않는가.
주희의 월인천강은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 그림자가 비친다고 본다. 그렇다면 나나 너는 이 그림자를 품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호수가 되어 달 그림자를 받아 맑고 밝게 빛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달 자체가 될 수 있을까. 선생과 김현 선생의 짧은 에피소드는 달 그림자 비치는 호수조차 되지 못한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간혹 신문에 났다고 좋아하는 바보 같은 나에게 내가 묻는다. 그게 너냐? 나냐?
생이 흔들리는 소리
선생은 이제 익명성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고 했다. 이름을 버리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비처럼 천둥처럼 그렇게 우리 곁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인가 싶다. 어쩌면 좋은 시인이란 이름의 경계선을 넘어 우리에게 노래로 존재하는 소월이나 지용과 같은 단계는 아닐까. 사람들은 그 노래가 누구의 노래인지 모르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이상적인 것 아니겠느냐고 선생은 반문했다.
“내가 모르게 되는 ‘나’ 혹은 ‘자기’가 그래도 제일 최대한의 자기인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길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왕이면 이 세상에 진짜가 되라는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진짜가 된다는 건, 화가 장욱진 박수근 이중섭처럼 삶과 그림이 같이 가는 것이다. 그 족적이 정확해야 된다는 것, 말과 작품이 같아야 된다.
시에 대한 선생의 평론과 단상은 너무나 많다. 아둔한 내가 거기에 하나 더 보태는 건 무의미하다. 40년 전 윤후명 선생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졸업을 해버린 선배 정현종 선생에 대한 글이 있다. 최근에 시 잡지의 청탁을 받고 쓴 윤후명 선생이 보내준 글이다. 일부를 인용한다.
‘사실 정현종 시인의 시 어느 한 편을 굳이 꼽아 앞세운다는 건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1972년 민음사에서 나온 첫 시집인 ‘사물의 꿈’을 펼친다.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제목 ‘사물의 꿈 1’에 ‘나무의 꿈’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사물’이라는 말이 얼마나 새롭게 다가왔는지 기억이 새로웠다. 그것은 내게 시어가 아니라 관념어이자 철학어였는데, 어느덧 나무라는 생명을 타고 햇빛, 비, 바람들과 함께 꿈꾸며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게 들려주고 있었다. 말과 뜻이 어우러져 동심원을 이루며 온통 살아 있는 사물로 화하는 세계. 나는 그것이 내 제목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힘’과 ‘피’를 꿈꾸었다.
식물을 좋아하며 가까이한다고 자처하는 내게 그의 ‘사물=나무’는 삶의 원류를 일깨워준다. 나도 그 합치를 위해 나무에게로 가고 싶다. 연세대 뒤 숲 속을 거닐던 그는 한 그루 나무 같은 모습으로 지금도 내 앞에 선다. 아름다운 풍경에 찬사를 보내는 그의 허심탄회한 감탄사만큼이나 가식 없는 소리, 나무의 소리.
이 시와 맞닿아 있는 시 ‘세상의 나무들’(1995년 작)에 나오는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이라는 구절을 읽으며, 촉루가 되어서도 첫사랑 같은 시를 꿈꿀 수 있기를, ‘사물=나무’의 새봄을 기다리는 밤이다.’
오랜 시간 일방적으로 선생의 말씀만 들었다. 음악소리처럼 흘러나오는 선생의 말에 취해 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점심시간이었다. 선생은 댁 근처 작은 일식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왠지 나는 선생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하고 싶었다. 나는 가난하고 지갑은 얇지만, 그래도 지갑은 이런 경우를 당했을 때 열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당장 내일 사무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모아서 담배를 사는 일이 있더라도, 선생에게는 잘 지은 밥 한 그릇 대접하고 싶은 마음, 그 순간 내 진짜 마음이었다. 선생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럼 아는 식당이 있으니 인사동으로 가자고 했다. 거기에 밥이 맛있는 집이 있다고 했다. 밥을 먹고 싶은 마음에 서둘렀다.
번뇌가 있어야 예쁘다
인사동 밥집에 앉아 나물정식을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선생은 우리 건너편에 앉은 비구니를 잠시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저 비구니 말이야. 털모자를 쓰고 들어올 때는 참 이뻤는데, 모자를 벗으니 안 이쁘네.”
그땐 그냥 흘려들었는데,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불가에서 머리카락은 번뇌를 상징하는 것이니 인간은, 여자는 번뇌가 있어야 예쁘다는 말씀인가 싶었다. 마치 북극여우가 한겨울이 되면 지난 여름 몸을 덮고 있던 누런 털을 벗어버리고 새하얀 털로 빛나듯이 말이다
선생의 말대로 밥을 맛있게 하는 집이었다. 조금 과식하고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찻집 ‘인사동 사람’에 들어가 생강차를 마셨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얼굴을 잊을 뻔한 시인 고진하를 우연히 보았다. 나는 고진하 시인에게서 인도 불가촉천민들이 피우는 담배라는 ‘비리’를 두 대 얻어 피웠다. 우리 찻값을 고진하 선생과 동행한 분이 계산했다. 그분은 정현종 선생의 오랜 독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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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진규 선생도 만날 수 있었다. 두 분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짧은 시간 선생은 두 시인을 만났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정진규 선생에게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가끔은 인사를 드려야 하는 처지인데도 인사 한번 드리지 못한 내 행실에 내가 괘씸했다. 뭐 그리 바쁘게 살고 있는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은데 말이다.
내 주특기인 썰렁한 질문을 던질 차례가 됐다. 선생의 이야기를 받아 적느라 우문을 던질 수 없었는데, 차를 마시는 동안 잠시 밖을 보시는 선생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독자를 위해 사랑에 대해서 한마디해주시죠.”
나는 연필을 꽉 쥐고 받아 적을 태세로 돌입했다. 선생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질문에 잠시 생각하시다가 스탕달의 연애론 이야기를 꺼내는 듯싶더니 이내 접고 허허 웃으면서 이렇게만 말했다.
“사랑이라…아, 이 사람아.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