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온 국민이 발레를 향유하는 날이 오길…

  •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

    입력2011-10-19 11:0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온 국민이 발레를 향유하는 날이 오길…
    2012년에 창립 반세기를 맞이하는 국립발레단은 세계화·명품화·대중화를 목표로 세계적인 발레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무용수들의 기량 및 수준을 대폭 높임은 물론 다양한 레퍼토리 보강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며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런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서 지난 수년간 많은 사업을 이끌면서 행복한 나날만 있었던 건 아니다. 힘들고 지쳐서 도망가고 싶은 날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에게 힘이 되어준 공연들이 있다. 바로 ‘장애우 초청 시연회’와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문화 소외계층을 위해 공연하는 ‘찾아가는 발레’다.

    장애우 초청 시연회는 2년 전에 시작했다. 한 장애우 단체 관계자에게서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장애우가 많은데 몸이 불편해서 공연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장애우가 편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프레스 리허설을 생각해냈다. 프레스 리허설은 오페라하우스에서 하는 정기공연 오프닝 전날 기자들을 초청해 실제 공연과 똑같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진행하는 공연을 말한다. 일반 관객이 참여하지 않는 공연이기 때문에 장애우가 관람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다행히 기자들도 기꺼이 양해해줘서 지금까지 문제없이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몸이 불편한 장애우가 공연 도중 ‘아~~’ 소리도 내고, 가슴 벅찬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소리를 지르거나 박수를 계속 쳐서 공연 준비를 위해 방문한 외국 스태프들에게 항의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분의 따뜻한 배려와 도움으로 문화 공연을 향유하는 장애우가 점점 늘고 있다.

    2010년에는 아이코리아 재단 내에 마련된 지체 장애우 교육시설인 육영학교를 직접 방문해 공연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두 번 놀랐다. 먼저 국내에 이렇게 선진화된 장애우 교육시설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고, 공연을 관람하는 장애우들의 자세가 비장애우보다 더 진중해 또 한 번 감탄했다. 당시 공연에 참여한 단원 모두 가슴 뭉클한 보람을 느꼈다. 공연 후 장애우 학생들은 기대 이상으로 뜨거운 반응을 보였고, 발레 공연을 계속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는 올해 2월 지젤 시연회 당시 200여 명의 학생을 다시 극장으로 초대해 또 한 번 발레 공연을 보여줬다. 아이코리아 관계자는 “공연장을 가보지 못한 학생이 대부분이다. 예술의전당에서 국립발레단 공연을 보는 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이 아이들에겐 평생 잊히지 않을 추억이 될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이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한순간 공연에 집중하는 장애우를 볼 때마다 나는 벅찬 감동을 받는다.



    ‘찾아가는 발레’는 국토 남단의 남해는 물론 바다 건너 제주도, 울릉도까지 찾아가 군부대, 다문화가정 등 문화 소외계층을 위해 여는 공연이다. 지방이나 산간벽지에는 공연 시설이 열악한데 어떻게 상연하느냐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그렇다고 공연을 미룰 수 있으랴.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우리가 장소에 맞게 안무를 재구성해 공연한다. 또한 발레를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해 작품 해설을 곁들여 이해를 돕는다.

    이렇게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다보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기게 마련이다. 지난해 가을 울릉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울릉도는 기후 조건에 따라 선박 출항이 결정된다는 소식을 듣고 발레단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예정일보다 하루 일찍 출발했다. 동해항을 거쳐 울릉도로 가는 뱃길이 편치 않았지만 천혜의 자연경관을 보며 힘든 것도 잊을 수 있었다. 1회 공연을 위해 어렵사리 울릉도로 향한 스태프들은 관객의 환호에 절로 힘이 났다. 울릉도 군민만이 아니라 관광객, 해경, 해군, 외국인 등 다양한 부류가 모여 넋을 놓고 공연을 즐겼다. 이날 공연은 그야말로 성황리에 끝났다.

    한데 그 사이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태풍이 동해안을 급습해 공연 팀의 발이 묶였다. 단원들은 당초 일정보다 이틀을 더 울릉도에서 보내야 했고 공연 수당보다 식비가 더 들었다. 섬에 갇혀버린 단원들은 바다를 향해 노래를 목청껏 부르기도 하고, 물속에 들어가 성게를 캐기도 했다. 일부는 주민과 어우러져 바다낚시를 했다. 둘째 날에는 울릉군청에서 섬 주위를 관광할 수 있게 배를 빌려줬다. 다양한 사람과 이색 체험을 함께 한 울릉도에서의 2박3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훈훈한 추억이다.

    군부대에서 펼치는 공연도 색다른 울림이 있다. 우리는 매년 진해 해군사관학교, 화천 27사단, 육군본부 등 군부대를 찾아가 공연을 한다. 특히 올해 육군본부 행사 때는 군 사병과 가족들이 공연 몇 시간 전부터 계룡대 극장 앞에 모여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무엇보다 육해공군 병사와 장성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어서 의미심장했다.

    군복무 기간 문화적 혜택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늘 아쉽다. 특히 올해는 처음으로 대한지적공사와 업무제휴협약(MOU)을 맺고 ‘찾아가는 발레 투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발레단은 재원을, 대한지적공사에서는 극장 대관, 홍보물 제작, 단원들의 식사를 담당했다.

    일주일 동안 전국 9개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다닌 이 프로젝트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파격적인 일이었다. 발레단은 2개 팀으로 나뉘어 당일치기 공연을 원칙으로 전국 투어에 나섰다.

    스케줄은 빡빡했지만 지역민의 환대와 응원 덕분에 프로젝트를 끝낸 뒤에도 더 멋지고 알찬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기업이 함께해서 더욱 든든하고 알찬 여정이었다.

    이런 찾아가는 발레 공연 때마다 관객은 서울의 유료 관객보다 더 열렬한 환호성과 박수갈채로 화답한다. 공연마다 좌석이 부족해 통로까지 객석으로 바뀐다. 더욱 놀라운 점은 공연이 시작되면 모든 관객이 무대에 집중해 휴대전화 울림은 물론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공연이 끝나도 객석의 열기는 식지 않는다. 우리는 공연 직후 주역 무용수들의 사인회를 진행하는데 그 줄이 끝이 없고, 관객은 1~2시간이 넘도록 기다려서 사인을 받아간다.

    어릴 적 경험담이다. 교토 시내가 아닌 마이즈루(舞鶴·무학)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자란 나는 도쿄에서 온 발레단의 ‘지젤’ 공연을 보고 감동받아서 발레를 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고, 그 공연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원동력이 되었다.

    서울에 사는 학생들은 예술문화를 접할 기회도 많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설도 많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지방은 환경이 열악하다. 재능 있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온 국민이 발레를 향유하는 날이 오길…
    崔泰枝

    1959년 일본 교토 출생

    미국 조프리 발레스쿨,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 석사 수료

    성균관대 무용학과 겸임교수, 정동극장 극장장, 중구문화재단 이사

    한국발레협회 ‘프리마 발레리나’상, 예총문화상 수상

    2009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한국의 밤’ 행사 중 ‘아리랑’ 안무


    국립발레단을 10년째 맡고 있는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원하는 일은 모든 학생과 장애우, 문화 소외계층이 발레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정책적 기반이 꼭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연간 90회 넘게 지방 공연을 다니며 큰 감동을 전하려고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단원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따뜻한 발레로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보듬는 단원들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에세이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