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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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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이미 백범 암살사건과 미국의 관련에 대해 몇 번에 걸쳐 언급한 바 있다. 1984년 ‘월간조선’의 오효진과 인터뷰, 1992년 4월13일 ‘동아일보’에 특종보도된 권중희에 의한 자백, 1995년 김석용의 권유로 녹취한 테이프 121개에 담긴 그의 ‘마지막 증언’ 등이 그것이다.

먼저 1992년 4월13일자 ‘동아일보’ 특종 보도에서 ‘안두희는 ①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군 OSS의 한국 책임자 모 중령 등을 소개받았고, ② 미군 OSS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년단이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③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해야 할 Black Tiger라고 부르며 백범 암살의 필요성을 암시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안두희는 문화방송의 박경재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의 내용은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며 부인하였다.

안두희의 말대로 위의 내용 중에는 권중희의 강압으로 잘못 포장된 부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OSS다.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아주 그 무식쟁이(권중희)가 OSS라는 말은 어떻게 외워 가지고서 아주 잘 아는 것처럼 자기 유식을 과시한다고 OSS를 찾는데…OSS가 무슨 뭐 미국 CIA말고 뭐 또 있었던 거 같은데 나는 몰라”라고 사연을 설명하였다.

미국의 골칫거리 백범



사실 OSS는 1945년 10월 초 해체되었고, 광복 후 한국에 진주한 미 육군 24군단의 정보기관은 CIC가 대표적이었다. 때문에 OSS에 대한 언급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OSS가 착오라고 해서 1992년 증언의 진실성에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반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안두희는 1984년 오효진과 ‘자유스러운 인터뷰’에서 이미 미국과 백범 암살의 관련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였다.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의 정보원으로 서청원(西靑員)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오효진, 1984, ‘안두희 고백’ (상) (하), ‘월간조선’ 7~8월호)

여기서 안두희는 자신이 미국 정보원이라고 직접 밝힌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속된 서청원들이 미국 정보원으로 많이 일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백의사나 서북청년단 소속 청년들은 미군 정보원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이번 은 그 연장선상에서 안두희도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1992년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미군과의 관련은 한국 경찰 수뇌들의 소개로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안두희의 미국 관련 발언들은 상당히 일관되며 상호보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고, 모순되는 내용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안두희는 ‘마지막 증언’에서 당시 서청 등 청년단체 요원들과 경찰·군·정보원의 연결을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경찰과 군부는 ‘비합법적으로 빨갱이를 때리는 데’ 청년단이 필요하였고, 서북청년단은 정부기관의 보증과 지원이 필요하였다. 특히 장택상은 그의 환갑연에 안두희를 초청하였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 사찰과장, 정보과장 최운하 등 정보 전문가들은 안두희와 정보를 자주 교환하였다.

나아가 안두희는 동향인 육군 중령 김일환의 주선으로 군의 정보기관, 특히 특무대(SIS: Special Investigation Section)의 김창룡과 연결되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위계급의 정보장교였지만 이승만 대통령, 채병덕 참모총장, 신성모 국방장관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숙군의 마왕’으로 정보계의 실권자였다. 이런 안두희가, 그의 서청(西靑)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CIC 요원이며, 그의 백의사 보스인 총사령 염동진이 그러한 것처럼 CIC에 적극 협조하였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남은 쟁점은 안두희가 CIC 요원이라고 하더라도 1949년 암살 집행 당시 미군이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문제다. 그가 CIC 요원이라는 사실과 암살에 대한 미군의 영향력은 서로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매우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 열흘에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그 미군 중위, 미군 저 24사단 중위가 있잖아요? 중령 대신 나한테 뭐 연락하갔다 그러구 자주 좀 서로 통하자고 얘기하던 중위가 - 그런데 중윈지 대윈지 잘 모르겠어요. - 나타나는 데 마이켈이라는 건 알지, 언제 뭐 중위 옷 입고 올 적도 있고, 대위 계급장 달고 올 적도 있고, 절반 이상 사복을 입고 올 적도 있고, 그런 친군데, 자주 드나드는 거예요. 특히 우리 정부가 생겨서 5·10선거가 끝나구서 자주 오는데…젊은 사람인데도 나보단 4, 5세 2, 3세 아랜 데도 나보다 아는 거 많고, 정치적인 얘기만 자꾸 물어보니 내가 정치 같은 걸 알 리가 없지요…어디서 배웠는지 우리 한국말은 자주 쓰는 데…한국말로 하다가 영어두 섞어서…나두 이제 쪼끔씩 영어를 배우는 겁니다.(‘마지막 증언’, 184.)

이 증언에 따르면 안두희의 접촉대상인 미군은 두가지 차원이었다. 하나는 미24군의 중령급 인물과 간혹 접촉하였는데, 문서 작성자 실리(George E. Cilley) 소령도 이 레벨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실무선의 중위급 인물 마이클이며 이 사람에게 영어를 배울 정도로 자주 접촉하여 정보를 교환하였다. 필자로서는 CIC 정보장교 명단에서 마이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보장교들은 원래 본이름과 계급을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예컨대 맥아더 사령부의 일개 사병이던 노만 존슨은 한국전쟁기에 여러 이름과 20개 정도의 계급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노만 존슨, 1994, ‘한국작전’, 삼진기획). 따라서 구체적인 안두희의 증언은 매우 신뢰할 만하다. 마이클 중위는 서북청년단에 자주 찾아와서 안두희가 모르는 ‘빨갱이 계통 정보’를 주었으며, 그것은 한국 경찰과 특무대의 정보와 일치하는 ‘고급 수준의 것’이었다.

마이클이 준 소위 정보 소스 같은 걸 일일이 뭐 인천에 김일한이 같은 놈한테 전화 걸어서 알아보고, 또 특무대 본부의 장대위를 불러서 알아보고, 심지어 지금은 정정당당히 대한민국 경찰관 형사가 돼 있는 노덕술이 같은 거, 혹은 그 외에 몇몇 사람들을 일부러 만나서 지나가는 척하고서 얘기를 슬슬 물어보게 되면은, 이거 대개 앞뒤 꼬리가 맞는 얘기예요. 맞는 얘기니까 자연히 나도 이 사람을 중시하게 되고, 이 사람의 얘기를 내가 중요 소스로 인정 안할 수 없게 되지요.(‘마지막 증언’ 185)

이 정보꾼 마이클은 백범과 한독당의 동향, 특히 ‘혁신보(革新報)’의 양근환의 동향에 각별히 주목하고 있었다. 이러한 마이클의 정보와 평가는 노덕술이 있는 한국경찰, 김창룡의 특무대 정보는 물론, 백범 암살을 기획·주도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거 물어보게 되면 김지웅이도 어떻게 알아보는지 여기저기 알아보고, 특히 양근환이는 주변 사건을 갔다가 아주 정확하게 마이켈 중위하고 이제 맥이 딱 맞아 들어가요.…그러니 점점 김지웅이를 중요한 정보소스로 인정 안할 수 없게 됐습니다.(‘마지막 증언’ 185)

이상을 요약하면 안두희와 서북청년단은 경찰, 군 특무대와 연계되어 있었으며, 미군 정보장교와도 정기적으로 만나 백범과 한독당에 관한 정보를 논의했으며, 그것은 백범 암살을 기획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안두희로서는 백범 암살을 함부로 집행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정부 요인들의 견해를 탐문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고 난 뒤에 실행하였다.

미국측 공식문서에서는 백범 암살 당시 미국의 개입 여부를 엿볼 수는 없는가? 아마도 정보문건 계통에서는 앞으로 발굴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1949년 2월 “백범이 통일정부의 수반이 되기 위해 잘못된 좌우합작을 시도하고 있다”는 대단히 비판적인 보고서 두 건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G-2 Perodic Report’ no. 1052(1949. 2. 1), no. 1055(1949. 2. 4)

한편 공간된 ‘미 외교문서(FRUS)’에서는 그 성격상 암살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문건은 찾을 수 없다. ‘미 외교문서’에서 백범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주한 미대사 무쵸가 미 국무성에 보낸 전문은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수록된 것은 1949년 6월27일 오후 5시발의 3급비밀 지급(Confidencial Priority) ‘전문 788호’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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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순 < 창원대교수·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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