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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향기 숲빛깔 숲소리 찾아 떠나는 여행

전영우 교수의 숲 이야기

숲향기 숲빛깔 숲소리 찾아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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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갖 나무가 제각기 다른 색으로 잎눈을 틔우는 봄 숲의 모습은 자연이 그린 한 폭의 파스텔화다. 아까시나무 꽃의 진한 향기로 시작하는 여름 숲을 눈여겨보면 송진 냄새와 송화향기, 그리고 전나무의 건강한 바늘잎에서 뿜어 나오는 톡 쏘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한편 가을 숲에서는 다래와 머루의 상큼한 맛, 도토리와 산밤의 떫은맛, 더덕과 도라지의 쌉싸름한 맛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겨울 숲은 낙엽 밟는 소리, 솔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 서릿발을 밟으면 들을 수 있는 사각거리는 소리, 계곡의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 소리 등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음악을 만든다. 우리 주변에서 이처럼 다양한 표정을 짓는 것은 숲밖에 없다. ‘숲해설가’ 전영우 교수와 함께 숲 소리, 숲 빛깔, 숲 향기를 찾아 숲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하늘이 높고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합니다. 숲 속을 지나는 물빛과 바람결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습기를 털어낸 선들바람이나 쪽빛 하늘을 담은 물빛은 그래서 가을을 알리는 전령입니다. 이때쯤이면 숲의 빛깔도 변합니다. 사실 숲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든 말든 스스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변화하는 숲의 빛깔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이는 많지 않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우리네 삶에서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500만년에 이르는 인간 진화의 역사를 생각하면, 편리하고 안락한 실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혀 지내는 오늘의 일상은 그저 순간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일 뿐입니다. 우리 가슴속에는 자연을 갈구하는 본능이 숨을 죽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을 숲이 만들어내는 형형색색의 빛깔을 활자로 형상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봄이라는 짧은 한 계절에 만들어낸 후, 좀체 변할 것 같지 않던 강건한 ‘녹색세상’을 어느 틈에 변화시키는 계절의 섭리 앞에, 그리고 그 현란한 변신 앞에 오히려 입을 다물고 조용히 음미하는 것이 자연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자연과 유리된 삶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 자체가 행운일지도 모릅니다.

봄 숲은 우리 주변에서 시작됩니다만 가을 숲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을 숲의 시작을 우리가 느꼈을 때는 이미 한참 진행된 뒤라 정작 가을 숲이 만들어내는 현란한 색채를 가슴속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습니다.

가을 숲의 변신은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진 높은 산마루에서 시작됩니다. 산마루에서 시작한 변신은 산허리로 내려오고, 마침내 맨 마지막으로 우리 주변으로까지 달려옵니다. 봄 숲의 생명력이 우리 주변에서 시작되어 맨 마지막에 산마루로 달려가는 것과는 정반대지요.



그래서 여름 내내 녹색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했던 숲이 하루가 다르게 표정을 바꾸는 것을 도회에 사는 우리는 지나치고 맙니다. 그러나 조금만 신경쓰고 주변을 살펴보면 가을 숲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가을 숲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빛깔에 파묻히는 일은 복잡한 절차와 거창한 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가을 숲’이란 세 음절의 단어를 한번 읊조리고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면 됩니다.

가을 숲의 모습은 단풍나무·신나무·옻나무·붉나무·매자나무·마가목·산벚나무·화살나무 같은 붉은색 단풍을 연출하는 나무들은 물론이고, 사시나무·생강나무·참피나무·쪽동백나무·떡갈나무·층층나무·자작나무들이 연출하는 노란색이나 황갈색 단풍 덕분에 현란합니다. 좀체 변할 것 같지 않던 녹색의 강직함이 어느새 수그러들고 숲은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첫서리가 내리는 높은 산의 가을은 유난히 짧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수십 가지의 넓은잎나무가 다양한 색을 연출해 그 짧은 기간 동안 별천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숲에서는 적막감이나 엄숙함 대신 역동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넓은잎나무’가 만드는 별천지

단풍은 하늘을 이고 있는 산정에서 불붙기 시작해 어느 틈에 인간세상까지 내려옵니다. ‘넓은잎나무’들이 연출하는 단풍은 주의 깊게 지켜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습니다. 아직 햇볕이 따가운 늦여름부터 변신을 준비하여 금세 옷을 갈아입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단풍나무가 꾸미는 가을 숲의 변신은 빈틈이 없습니다. 가장 늦게까지 녹색을 지킨 엽맥(葉脈)의 몸부림도 잠시, 누르스름한 이파리가 순식간에 노란색으로 바뀌다 마침내 붉은색으로 변합니다. 단풍나무에 속하는 신나무·복자기·당단풍나무·단풍나무는 가을 숲의 여왕이자 진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할 수 없는 법. 어느 틈에 적갈색으로 변한 이파리는 황갈색이 되어 대미를 장식합니다. 그리곤 겨울을 맞기 위해서 마침내 잎을 떨굽니다. 강렬한 생명을 거두고 겨울 채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이처럼 넓은잎나무들만 변신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을 보는 맑은 눈만 있으면 좀체 변할 것 같지 않은 ‘바늘잎나무’들의 변신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대표적인 바늘잎나무인 소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상들은 소나무를 아름다운 덕목인 변치 않는 지조와 굳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조상들은 소나무를 문학과 예술의 다양한 상징적 소재로 애용해 왔습니다. 바로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의 특성을 아끼고 기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나무도 늘 푸르지 않은 때가 있다면 아마 놀라리라 믿습니다.

천지자연물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늘 푸른 소나무도 마찬가지. 소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린다면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사실입니다. 소나무들은 보통 2년 정도만 잎을 가지에 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을 숲에 익숙한 사람은 솔가리가 될 갈색 솔잎을 달고 있는 초가을의 소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소나무는 우리가 지금까지 본 ‘늘 푸른 소나무’와 분명 다릅니다. 녹색 솔잎 속에 황갈색 솔잎이 만들어내는 부조화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부조화는 아주 짧은 시간에만 나타납니다. 가을이 깊어 가면 언제 그런 부조화가 있었느냐는 듯 묵을 때를 씻어낸 멋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때의 소나무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검푸른 빛이 도는 소나무나 송홧가루를 피워내기 위해서 연녹색 솔잎을 가진 초여름의 소나무와 다릅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껍질의 줄기와 푸르름을 자랑하는 싱싱한 솔잎으로 단장한 이때의 소나무는 정녕 우리가 아끼는 늘 푸른 소나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때의 소나무를 소나무가 가진 가장 멋진 모습이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강렬한 붉음과 푸름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솔숲이 아름답습니다. 코발트빛 하늘색과 진한 녹색의 바다에 떠 있는 소나무 줄기의 붉은 빛깔은 세련된 도심에선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파격입니다. 붉은색과 녹색의 이런 파격을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짓는 데 이용했습니다.

목조 건물에 쓰이는 단청의 두 가지 바탕색은 석간주(石間)라는 붉은색과 뇌록(磊綠)이라는 청록색입니다. 단청의 석간주와 뇌록은 바로 이 산하를 덮고 있는 소나무를 상징합니다. 건물의 기둥에 칠하는 석간주는 토종 소나무 적송의 붉은 줄기 색과 같고, 건물 지붕틀의 뇌록은 소나무 잎과 같은 청록색입니다. 색채로만 본다면 건물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한 무리의 소나무 숲과 다르지 않습니다. 붉은색 껍질과 초록색 잎이 가진 소나무의 자연적 보색을 나란히 칠하면 서로 다른 색을 자극하여 최고로 선명한 색깔을 유지하는 잔상효과와 동시성의 효과 때문에 붉은 색은 더욱 붉게 보이고 청록색은 더욱 푸르게 보이는 보색대비 효과를 우리 조상들은 솔숲으로부터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붉게 물든 색동 단풍잎으로 치장한 가을 숲을 찾아 나서는 걸음은 꼭 올라야 할 봉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꼭 건너야 할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며, 꼭 지켜야 할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사람의 흔적을 되도록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곳이 숲입니다. 꽉 찬 머리를 적당히 비울 수 있는 정신적 여유와 오관을 활짝 열고 현란한 숲의 빛깔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정신적 여유만 있다면 언제든지 훌쩍 나설 수 있는 길입니다. 가을 숲이 내뿜는 다양한 빛깔의 경이로움에 한번 파묻혀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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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 < 국민대 교수 . 임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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