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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견훤이 꽃피운 禪宗예술

후백제 견훤이 꽃피운 禪宗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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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국보 제8호인 (도판 4)의 비문을 지은 것도 895년에서 900년에 걸친 시기였으리라 생각된다. 대체로 이 기간에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지어진 비문은 처럼 곧바로 비석에 새겨질 수 없었던 듯하다. 성주사 일대가 견훤의 판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효공왕 4년(900)에 견훤이 전주에 도읍하고 후백제의 개국을 선포하였으니 이 무렵에 이미 성주사 일대는 견훤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라의 경문왕과 헌강왕의 왕사로 존숭받아 신라 왕도를 내왕하던 인물인 낭혜화상에 대한 후백제 의 감정이 좋을 리 없고 이런 분위기는 자연 그 탑비 건립을 생각할 수도 없게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낭혜화상은 후백제가 백제 멸망의 원흉으로 꼽고 있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8대손이었으며 성주사 일대는 김춘추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이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세운 공로의 대가로 받은 봉토(封土; 제후로 봉하여 내준 땅)였음에랴!

그래서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 은 ‘신라골품고(新羅骨品考)’라는 논문을 1922년에 발표하면서 건(建)·무(武)·순(詢) 자가 획을 빼놓고 쓴 것을 들어 고려 태조 왕건과 혜종 왕무(王武), 현종 왕순(王詢)의 이름자를 피휘(避諱; 임금이나 직계 조상 이름자를 피하여 쓰지 않음)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이 비석이 고려 현종 재위 기간인 1010년에서 1031년 사이에 세워졌으리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인 금석학자인 갈성말치(葛城末治)는 비문을 정밀 조사한 뒤 건자와 순자에 결획(缺劃; 획을 빼놓고 씀)이 없음을 확인하면서 이 비문을 쓴 최인연(崔仁)의 관직명이 창원 (도판 5)에서 지은이로 등장하는 최인연의 관직명과 동일한 것을 들어 (도판 6)가 세워지는 경애왕 원년(924)경에 이 비석도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1935년에 펴낸 책인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에 실린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갈성말치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데 그의 확인 결과 건(建)자와 순(詢)자에는 결획이 없지만 무(武)자와 경(慶)과 민(民)의 세 자에 결획이 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밝히지 못한 채 혹시 중국 황제들의 이름자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모호한 추측만 남겨놓고 있다.

필자가 정밀한 탁본을 통해 재확인해봐도 갈성씨의 확인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갈성씨의 주장대로 924년 건립을 전제로 생각할 때 혹시 후백제왕 견훤과 관련된 존호(尊號; 제왕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올리는 이름)를 피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어떻든 이 낭혜화상 비문은 첫이름이 최신지(崔愼之)였다가 그 다음에 최인연으로 이름을 바꾼 최치원의 사촌아우 최인연이 써낸 것이다. 이 최인연이 경순왕 8년(935) 11월3일에 고려에 항복하는 경순왕을 따라와 고려 조정에 귀순한 뒤에는 최언위(崔彦)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10여 개의 비문을 더 써냈다.

그가 지은 것이 확실한 비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비석이 모두 11개이고 그가 쓴 것이 하나다. 그런데 이를 모아 살펴보면 고려에 귀순하기 이전 신라의 관직명만 보이는 시기에는 모두 최인연이란 이름을 쓰고 있고 고려에 귀순한 이후 고려의 관직을 받고 나서는 한결같이 최언위란 이름을 쓰고 있다.

924년에 지은 영월 에서는, 본문 중에는 최인연이라 쓰고 앞에 지은이 이름에는 최언위라 표기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이 비석을 고려 혜종 원년(944)에 세우기 때문에 쓰고 새기는 이들이 지은이 이름만 당시 것으로 바꾸고 본문 중의 이름은 미처 바꾸지 못한 데서 기인한 실수였다. 그런데 이런 실수가 오히려 최인연과 최언위가 동일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주어 이 비석의 사료적(史料的) 가치를 높여 놓았다. 어떻든 낭혜화상 비문을 쓰면서 최인연은 자신의 이름을 비문 맨 끝에 이렇게 써 놓았다.

“사촌아우 조청대부 전수집사시랑 사자금어대 신최인연이 교지를 받들어 쓴다(從弟 朝請大夫 前守執事侍郞 賜紫金魚袋 臣崔仁奉敎書).”

비문을 지은 사람 이름 바로 다음 줄에 쓴 사람의 직함과 이름을 나란히 쓰는 것이 상례인데, 이 낭혜화상비에서만 쓴 사람의 이름을 맨 아래로 돌리고 있다. 최인연이 감히 존경하는 사촌형님인 최치원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쓴 듯하니 아마도 이 비문을 옮겨 쓸 때 이미 최치원은 돌아가고 없었던 모양이다. 이 비문이 언제쯤 옮겨 쓰였는지를 추정하려면 최인연이 언제 당나라로 유학갔다가 언제 귀국하는지를 먼저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 최치원이 최신지의 당나라 국학 입학과 장학금 지급을 위해 진성여왕을 대신해서 올린 장계가 진성여왕 9년(895)의 일이라 추정한 바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에 붙여 지은 최언위전이나 ‘고려사’ 권92 최언위전에 따르면 최언위가 헌강왕 11년(885)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최신지를 떠나 보내면서 지어 보낸 최치원의 ‘숙위 학생과 수령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가게 하는 장계’에서 이미 용기 3년(891)의 예에 따라 최신지 등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달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이 기록들에는 10년 정도의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최신지가 18세에 당나라로 유학갔다가 42세까지 그 혼란한 당나라에 머물러 있을 리도 없다. 당나라는 907년에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신지가 42세 때인 909년에 돌아왔다는 것을 32세로 바로잡는다면 최신지는 895년에 18세로 당나라 유학을 떠난 것이어서 나이와 유학을 가고 오는 사실이 맞아떨어진다.

최언위가 77세까지 살았다는 ‘고려사’ 권92 최언위전의 내용도 67세로 10년을 내려야 현존하는 비문 기록들과 부합한다. 법경(法鏡)대사 현휘(玄暉, 879∼941년)의 탑비문인 충주 은 최언위가 돌아가기 바로 전해인 태조 26년(943)에 지었기 때문이다. 만약 76세 노인이라면 이런 비문을 짓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고려에 와서 지은 대부분의 비문이 940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다. 나이 칠십의 노인이라면 가능하겠는가. 더구나 그가 고려에 오자 고려 태조는 일체의 문한(文翰)을 그에게 맡겼다 하였는데 칠십 노인이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최언위전에서 산출할 수 있는 나이에서 10년을 내리면 878년생으로 고려 태조보다 한 살이 어리다. 돌아가는 것도 태조가 돌아간 다음해인 혜종 2년(944) 12월이었다. 최언위의 생몰년을 대체로 이와 같이 바로잡아놓고 ‘고려사’ 권92 최언위전을 그에 맞춰 옮겨 보겠다.

“최언위의 첫 이름은 신지(愼之)였다. 경주 사람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온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했다. 신라 말에 나이 18세로 유학하려고 당나라에 들어가 예부시랑 설정규(薛廷珪) 문하에서 급제하였다. 그때에 발해 재상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광찬(光贊)도 같이 급제하였는데 오소도가 당나라에 왔다가 그 아들 이름이 언위 아래 있는 것을 보고 표문(表文)으로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신이 예전에 조정에 들어와 급제함에 이름이 이동(李同; 신라 출신 급제자)의 위에 있었으니 이제 신의 아들 광찬도 마땅히 언위의 위에 올려야 합니다.’ 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고 풍부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32세(42세를 바로잡음)에 비로소 돌아오니 신라는 집사시랑 서서원학사(執事侍郞 瑞書院學士)로 삼았다.

태조가 개국(開國)함에 이르러 가족을 끌고 오니 명하여 태자 사부(師傅)를 삼고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기었다. 궁전과 사원의 액호(額號; 앞에 내건 이름)를 모두 지었고 귀족들이 모두 귀의하여 스승으로 모셨다. 벼슬은 대상 원봉성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 元鳳省大學士 翰林院令 平章事)에 이르렀다. 혜종 원년(944)에 돌아가니 나이 67세(77세를 바로잡음)였다. 부음을 듣고 왕이 몹시 슬퍼하며 정광(政匡)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다.”

여기서 보면 최언위가 마치 고려 태조가 개국(918)한 직후에 귀부해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현존한 선사들의 탑비를 통해 보면 고려 벼슬을 받은 다음 지은 것은 모두 신라가 항복한 935년 이후에 해당하니, 이 내용 역시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최치원의 행장을 추적해 보면 최치원이 남긴 글 중에 연기(年紀)가 분명한 것으로 가장 늦은 것이 천우(天佑) 5년(908) 무진 10월에 지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 壽昌郡 護國城 八角燈樓記)’(‘동문선’ 권64에 실림)다. 따라서 최치원이 908년 겨울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때가 최치원의 나이 52세 때인데 이후에 지은 문장으로 연기가 분명한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최치원이 살아 있었다 해도 최인연이 귀국하여 신라 조정에서 서서원 학사가 되어 문한(文翰)을 전담하자 최치원은 더 이상 공식적인 저술을 맡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치원이 이 무렵에 돌아갔을 수도 있다. 이미 최승우는 귀국하여 후백제에 귀부했으니 이제는 최인연이 신라 조정의 공식 문필을 전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의 일가 종친으로 생전에 스승으로 모셨던 낭공(朗空) 행적(行寂, 832∼916년)선사가 신덕왕 5년(916)에 입멸하여 경명왕 원년(917)에 시호와 탑호가 내려지고 탑비 찬술의 왕명이 그에게 떨어지자 이를 가장 먼저 지어내는 듯하다. 이 무렵에 최치원이 지은 낭혜화상탑비문을 써내면서 그 문투를 익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최인연의 문투가 최치원과 거의 방불하여 일종의 최가풍(崔家風)을 이루어 놓았다.

낭공선사 행적은 속성이 최(崔)씨이고 경만(京萬) 하남(河南)사람이라 했으니 지금의 경남 하동 출신이다. 최치원의 일족이 이곳 하동 일대에도 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전주 금마(익산) 출신의 최씨였던 진감선사 혜소가 하동 지리산 쌍계사에 터를 잡았고 최치원이 그의 비문을 제일 먼저 지어 손수 써서 세웠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최치원이 한때 천령군(天嶺郡, 경남 함양) 태수를 지냈다는 사실도 이와 연관 있는 얘기일 것이다.

낭공선사의 행적을 추적하면 최치원과 발걸음을 같이했을 가능성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치원보다 25세가 많은 아버지뻘이지만 당나라 유학은 오히려 최치원보다 2년이 뒤져 870년이고 돌아오는 것은 같은해인 885년이라 하였다. 최치원이 금의환향하는 배에 동승해서 돌아왔을 수도 있다. 그래서 최치원이 그를 존숭하게 되고 그런 인연이 최인연으로 하여금 문인(門人)을 자처하게 하였을 것 같다.

낭공대사는 사미 시절에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하였으니 해인사 승려였던 최치원의 친형 현준대사와의 인연도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강릉 사굴산문(山門)의 개산조인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 810∼889년)의 법을 잇고 다시 당나라에 가서 청원(靑原) 행사(行思, ?∼740년)의 법현손(法玄孫)인 석상(石霜) 경저(慶諸, 807∼888년)화상의 인가를 받고 돌아온 인물이었다. 귀국해서는 다시 범일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시봉하다가 889년 범일대사가 열반에 들자 산문을 지키기 위해 삭주(朔州) 건자암(建子庵)에 머문다. 그러나 894년 궁예가 강릉을 점령하자 난을 피해 왕도로 올라갔다. 이후 강릉 일대가 안정되자 산문을 지키기 위해 900년경에 다시 강릉으로 내려갔다가 효공왕 10년(906) 9월 초에 효공왕의 초빙으로 다시 왕도로 올라와 국사의 예우를 받는다.

여기서 김해(金海) 지부(知府) 소율희(蘇律熙; 진경대사 비문에서는 金律熙라 표기하고 있으니 우리말 쇠유리를 한자 표기하면서 이런 차이가 나게 되었을 것이다. 소리와 뜻 중 어느 것을 취하는가에 따라 생긴 차이임)가 선종을 외호한다는 소문을 듣고 907년에 김해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각처에서 찾아온 선지식들과 함께 지부 소율희의 각별한 외호를 받으며 8년을 보내고 신덕왕 4년(915) 봄에 왕의 초빙을 받아 다시 신라 왕경으로 올라와서 왕사가 되어 남산 실제사(實際寺)에 머무른다.

이때 여제자인 명요(明瑤)부인이 석남산사(石南山寺; 경북 영일군 장기면 방산리에 터만 남아 있음)를 기증하여 이곳을 열반처로 삼고 머물다가 신덕왕 5년(916) 2월12일에 이곳에서 85세로 열반한다. 그 다음해(917) 11월 중에 석실에 이장하고 신종(信宗)선사 등 제자 500여 명이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워주기를 조정에 청하니, 경명왕은 시호를 낭공(朗空)대사라 하고 탑이름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추증한다.

그리고 최인연에게 탑비문을 지으라는 왕명을 내린다. 이에 최인연은 대사에게 일찍이 자애로운 가르침을 많이 받았고 항상 일가 어른(宗盟)으로 돌봐주었으므로 이에 보답하기 위해 정성를 다해 비문을 지었다.

그러나 비석은 세워지지 못하다가 37년 만인 고려 광종 5년(954) 7월15일에 경북 봉화군 명호면 태자리 태자사에 김생(金生) 글씨의 집자비로 세워진다. 이것이 일제가 1918년 경복궁으로 옮겨 놓은 (도판 7)다. 그런데 이때 낭공대사의 법손(法孫)인 석순백(釋純白)이 이 비석이 세워지는 내력을 비석 뒷면에 새겨 놓는다. 그중에 비문을 지은 최인연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였는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인연이라는 이는 진한(辰韓)의 번성한 집안 사람이다. 세상에서 일컫는 바 일대(一代; 한 세대) 삼최(三崔; 세 최씨)가 금방(金榜; 문과 급제 방목은 황금 칠판에 썼기 때문에 문과를 금방이라 함)으로 급제하고 돌아왔다 함은 최치원과 최인연과 최승우를 말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다.

학문은 바다와 산악을 두를 만하니 읽은 책은 다섯 수레에 두 수레를 더 보태었으며, 재주는 바람과 구름을 감쌀 만하니 7보시(七步詩;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지어내는 시)에서 3보(三步; 세 걸음)를 덜어내었다. 실로 군자국(君子國; 우리나라를 가리킴) 중의 군자이며 대인향(大人鄕; 역시 우리나라를 가리킴) 중의 대인이라 하겠다. 이는 혹시 계수나무 속의 꽃을 꺾어 향풍(香風)을 상국(上國; 중국)에 부채질해 보내거나 그물에서 고기를 얻어 동향(東鄕;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주는 것인가. 대사의 무거운 은혜를 받들었기에 대사의 위대한 비문을 지었다.(其仁者, 辰韓茂族人也. 世所謂一代三崔金榜題廻, 曰崔致遠 曰崔仁 曰崔承祐, 於中一人也. 學圍海岳, 加二車於五車, 才包風雲, 除三步於七步. 實君子國之君子, 大人鄕之大人. 是或折桂中花, 扇香風於上國, 得魚羅域, 曜榮色於東鄕. 承大師重席之恩, 撰大師鴻碑之記)”

‘일대삼최금방제회(一代三崔金榜題廻)’의 출처가 여기에 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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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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