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적 전인의 표상으로 불리는 알베르티는 1404년생이니 거의 600년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 귀족의 자제여서 어려서부터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인문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교육을 받았고, 17세가 된 1421년부터는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공부했다. 28세 때인 1432년부터 1464년, 즉 60세가 될 때까지 교황청에서 일했으며 1472년 68세로 죽었다.
그의 저술은 벌써 500년 이전의 것이므로 당연히 연대가 불확실한데, 이는 그 자신이 언제 출판할 지에 관심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중요한 저작 중 ‘가족론’은 1433~1434년, ‘회화론’은 라틴어본이 1435년, ‘문법론’은 1438~1441년, ‘조각론’은 1464년 이후, ‘건축론’은 1452년 교황이 보았다고 하나 출간은 사후인 1485년에 이루어졌다. 그중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1998년에 나온 ‘회화론’뿐이다. 약 563년 만에 번역된 셈이다. ‘회화론’의 우리말 역자는 이 책을 ‘르네상스 최초’의, ‘서양미술사 최고의 회화론’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최초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나 서양미술사 최고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여하튼 그의 책들은 대부분 각 분야에서 처음으로 쓰여졌고, 그뒤 수많은 유서가 나왔다.
‘회화론’에 대해서는 역자의 해설이 있고, ‘건축론’에 대해서도 건축서에 약간의 설명이 있다. 그러나 그밖의 책들에 대해서는 소개된 바가 없고, 특히 그의 책 전모를 다룬 글은 아직 우리나라에 없다.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그의 ‘문법론’과 ‘가족론’이다. 후자에 나타나는 가족에 대한 강한 관심과 옹호가 그 사상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이 그를 다른 휴머니스트와 구별하게 한다.
종래 이러한 가족주의적 경향은 알베르티를 보수적 인물로 보게 하는 요인으로 생각돼 무시되었으나, 대가족에서 핵가족제로 변모하는 가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당시 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관찰이기도 하다. 이 점은 가족주의에 대한 치열한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뿌리 깊게 유지되고 있는 우리 사회를 관찰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 크다.
그러나 필자의 관심은 그런 평가나 소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알베르티의 모든 책을 15세기 르네상스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읽는다. 전인으로서 알베르티의 다양한 관심은 하나의 사회를 다각도로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소재다. 그것은 특히 가족과 도시라는 이데올로기로 장식된 사회의 모습이다.
가족과 도시는 우리 사회에서도 중요한 이데올로기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 도시와 달리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국가다. 그러나 가족 이데올로기는 르네상스는 물론 그 어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두 이데올로기는 흔히 빈부갈등과 체제변화를 호도하는 것으로 장식된다.
알베르티의 여러 책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준다. 알베르티는 그 이데올로기에 단순히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예견했다. 즉 보편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안목으로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하면서 넘어선 것이다.
알베르티는 평생 교회인으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추기경 비서를 시작으로 1432년부터 32년간 교황의 서기로 일했다. 그를 교회인이라 부를 수는 있으되 종교인이라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신앙심보다는 그의 고전문학에 대한 소양이나 문장력을 자격 요건으로 삼았다. 알베르티가 교회에서 일했다 해도 당시 어떤 휴머니스트보다 교회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저서 ‘사교’에서 성직자의 부패, 무지몽매, 동족을 등용하는 위선과 야심, 허식과 부정거래를 비판하고 ‘가족론’에서는 성직자의 죄상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유일한 종교적 작품인 ‘성 포티투스전’에서 그는 금욕과 세속혐오의 생활을 그만두고 시민사회에서 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라며 극도로 아름다운 악마를 등장시킨다. 중세적인 현실혐오는 철저히 거부되고 수도사적인 미덕이나 금욕은 기만으로 비판되어 배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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