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절에 간다. 명상도 하고 산행도 하고 좋은 사람도 만난다. 두 달에 한 번, 산사에서의 하룻밤 혹은 이틀밤은 일종의 씻김굿이다. 명상중에는 지금껏 살아온 삶이 전생처럼, 꿈처럼 펼쳐진다. 나는 나를 본다. 뭐가 그렇게 안타까웠는지, 무엇을 그렇게 놓치기 싫었는지, 무엇에 그렇게 쫓겼는지….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이상하고 묘하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들을 좋아했는지, 앞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두 내려놓게 되는 땅! 번잡한 일상이 전생처럼 아득히 멀어지고 대신 걷는 일이, 기도하는 일이, 밭을 일구는 일이, 밥을 하고 밥을 먹는 일이 내 일처럼 느껴지는 넉넉한 그런 땅이 있다는 걸 나는 분명히 느낀다. 이 땅에서는 ‘출가’하지 못한 일이 업처럼 충충하게 느껴진다.
거머쥐는 삶, 내려놓는 삶
‘출가’보다도 매력적인 삶이 있었으면 그 삶을 살았을 거라는 실상사의 도법스님. 도법스님의 방은 두 평 남짓에다 그 흔한 전화기조차 없는데, 그의 눈빛 속에는 이 세상이 부럽지 않은 세계가 있다. 그 도법스님이 얼마 전 ‘내가 본 부처’라는 책을 냈다.
카필라 왕국의 태자였던 싯다르타가 출가하겠다고 하니까 왕국이 발칵 뒤집힌다. 누구보다도 간곡하게 반대하는 부왕에게 싯다르타가 겸손하게 원을 청한다. 한가지 소원만 들어주면 출가의 뜻을 버리겠다고.
“제 소원은 죽음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늙고 죽어가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면 출가의 뜻을 버리겠습니다.”
출가는 크게 버리는 일,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다.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이다. 사랑도, 미움도, 가족도, 직장도, 소유욕도, 명예욕도 모두 버리는 것이니까 피상적으로 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워 보일까? 그 모습은 싯다르타의 고행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도법스님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극한의 고행을 하는 싯다르타의 모습은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함이었다. 앙상한 얼굴은 영락없이 허허벌판에 버려진 해골 모습이고, 움푹 들어간 눈동자는 물이 고갈되어 버린 천년 묵은 우물 속 같았다. 그런데 누가 싯다르타보다 행복할까?
한 인간에게 일생동안 목숨 바쳐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일생일대에 목숨을 걸어야 할, 뜻 있는 일을 갖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의 삶이 그립다. 그 친구는 내려놓음으로써 꿈을 실현하려 했고, 우리는 거머쥠으로써 꿈을 실현하려고 한다.”
사실 내려놓음으로써 꿈을 실현하려고 한 건 싯다르타의 정신일 뿐 아니라 예수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남수 목사와 함께 떠나는 만화성경여행’을 읽고 있으면 그 예수가 분명히 보인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신 예수, 이남수 목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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