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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읽는 세계 방송사들의 역사 다큐멘터리

책으로 읽는 세계 방송사들의 역사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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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해당 분야의 전문가임과 동시에 방송 매체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전문성, 글쓰기, 말하기, 방송 문법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콘텐츠를 여러 매체의 특성에 맞추어 재구성, 전달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저술가, 방송 프로듀서, 프로그램 진행자의 경계를 사실상 허물었다는 점에서 이들을 콘텐츠 프로듀서 또는 콘텐츠 프로모터라고 부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방송 다큐멘터리 시리즈와 책의 이중주라는 형식적, 외적 공통점을 거론했다. 이제 차이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세 권의 책들 가운데 ‘쿠오 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는 나머지 두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사적(narrative)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이 책의 제2장 ‘스페인 무적 함대의 침몰’ 첫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카리브해. 대양은 꿀물처럼 어슴푸레하고, 이미 주황색 태양빛이 수면에 서리어 부드럽게 굽이치는 물결 속에서 반짝거린다. 신세계의 보화를 가득 실은 갈레온선들은 돛을 활짝 펼치고 미풍 속을 미끄러져 나간다. 갑판에서 할 일은 별로 없다. 선원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마지못해 무슨 일인가를 붙들고 있는 시늉만 내고 있다. 이 늦은 오후의 평화로운 권태에서 선원들을 소스라치게 깨어나게 만든 것은 돛대 망루에 있던 사람의 째지는 듯한 외침이다. 해적이다!”

소설의 첫머리라고 해도 좋을 듯 한데, 국내 필자의 책이라면 ‘고려 무인 이야기1’(푸른역사) 첫 부분을 예로 들 수 있다. 고려 무인 쿠데타 3년 뒤 폐위된 의종을 시해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거인은 객사에 감금되어 있던 노인을 끌어냈다. 3년 전 왕위에서 쫓겨났던 그 노인은 몰라보게 늙어 있었다. 거인의 우람한 체구 앞에 그는 초라한 중늙은이에 불과했다. 거인이 갑자기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르며 미쳐 날뛰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널브러진 노인의 시체는 커다란 가마솥 두 개와 함께 요에 싸여 연못 속으로 던져졌다. 죽은 노인은 고려 18대 의종이고, 그를 죽인 거인은 이의민이었다.”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문전 처리 미숙이라면, 한국 영화와 소설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이야기 미숙이다. 문전 처리 미숙이 경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결정적인 단점이듯이, 이야기 미숙도 영화나 소설의 완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단점이다.

교양 도서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주제의 성격을 불문하고 입담 좋게 이야기로 풀어내 들려주는 사람, 요컨대 이야기꾼을 찾아보기 힘들다. ‘고려 무인 이야기1’이 출간 당시 각별한 주목을 받았던 까닭은, 단순한 역사 기술이 아닌 역사 이야기의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성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은 ‘소설과 역사의 경계에 서있는 역사 에세이’로 평가받기도 했다.

철학자 칼 포퍼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있었던 일명 ‘부지깽이 스캔들’을 꼬투리 삼아 두 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추적 비교한 ‘비트겐슈타인은 왜’(웅진닷컴)도 좋은 예가 된다. 사실 ‘부지깽이 스캔들’을 비롯해서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나 사상 관련 내용은 잘 알고 있는 것들뿐인데도 이책이 훌륭한 교양 도서일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로 엮어내는 저자들의 솜씨에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각각 철학과 법학을 전공한 저자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존 에이디노는 현재 BBC의 역사 및 시사 다큐멘터리 전문 작가 겸 프로듀서들이다. 또한 독일 및 영국의 주요 일간지에 서평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들이기도 하다.

중세의 주요 인물 여덟 사람의 이야기를 드라마나 대화 형식으로 생생하게 재구성한 책 ‘중세 이야기’(새물결) 서문에서, 저자 노먼 F. 캔터는 바버라 하나월트의 다음과 같은 입장을 인용한다.

“역사가는 역사 서술에 관한 현재의 관행을 대담하게 뛰어넘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탐색해야 할 것이다.”(American Historical Review, 1993.2)

물론 서사적 역사가 과학적이지 못하며, 역사학과 소설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드는 위험스런 시도라는 비판적인 입장도 만만치 않다. 문제는 우리의 경우 그런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비판할 만한 서사적 역사의 성과 자체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가 사실이라면, 그 위기의 내적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야기의 상실인지도 모른다.

신동아 200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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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 출판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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