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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투구

진흙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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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을 납치해간 전사들은 코걸이를 한 포터 두 명의 두개골을 갈라놓고 갔다. 순식간에 이름 모를 날벌레들이 시체 주위로 몰려들었다. 일을 수습하는 동안에 또 두 명이 짐을 진 채로 줄행랑을 쳤다.

안내인은 나를 참브리 지방 행정사무소에 데려다주었다. 꼭 전당포 같은 구조였다. 철창 칸막이 너머로 책상과 의자가 두 개씩, 캐비닛이 하나 있고 대형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경찰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유일한 행정관서인 이곳에는 전화 한 대도 없었다. 연락수단은 두 달에 한 번씩 오는 헬기가 전부였다.

관리는 풀어진 눈으로 부아이를 씹고 있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는 마치 의자에 앉아서 입 속에 총을 넣고 자살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열대과일의 당도와 고칼로리가 그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비만으로 만들어놓은 모양이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는 느린 동작으로 입을 움찔거리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죽음이 한발짝 더 가까운 곳에서 나를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내키지 않았으나 관리에게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내 말을 알아듣는지 어쩌는지도 몰랐고 내 말이 제대로 된 문장인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그냥 되는 대로 주절거렸다. 두개골을 쪼개버린 살인자가 총을 입에 물고 자살한 시체 앞에서 넋두리를 하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도와달라는 말을 수차례 되풀이하자 할 말이 없어졌다. 할 말은 다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관리는 여전히 슬로모션으로 부아이를 씹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는 안내인이 피진 잉글리시로 나를 대변하는 듯했다. 관리는 그의 말을 다 듣고나서야 뭔가 반응을 보였다. 반응이래봤자 부하직원의 부축을 받고 의자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에 부아이 찌꺼기를 뱉는 게 전부였다. 입 주변이 피로 흥건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크게 움직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희망의 전조를 보는 것 같아 맘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가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남쪽으로 몇 십 마일 더 내려가면 조지 메모리얼 폭포가 있고 또 서쪽으로 얼마를 가면 악어의 집단 서식지가 있다는 식의 관광 안내도였다. 철창을 뜯고 달려가 그의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영어를 생각해낼 겨를도 없이 나는 내가 아는 가장 흉칙한 한국 욕들을 그에게 퍼부었다.

관리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다시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는 여전히 몽롱한 표정으로 말 한마디 없이도 우리 일행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권총이었다. 부하가 와서 거들었다. 시에스타를 즐길 시간이란다. 안전장치를 풀고 권총을 겨누었다. 그들은 신변보호를 이유로 우리를 유치장에 가두어 넣었다. 뚱뚱한 관리는 치안업무까지 관장하는 모양이었다.

간수를 붙들고 아무리 한국을 말하고 새시대 국제협력단을 설명해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안내인이 나를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역시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해하긴 힘들었다. 그들은 다 필요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느 부족 사람이냐는 말만 계속 물어볼 뿐이었다. 난감했다. 경주 김씨 족보를 들먹여야 하나? 내가 우물거리자 ‘네꽝 네꽝’하면서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부족에서 추방된 자’라는 뜻으로 꽤나 재미있는 조롱거리라고 안내인이 말했다.

그들에게 국가라는 개념은 아예 없었다. 파푸운은 그저 외국사람들이 그렇게 부를 뿐이라고 했다. 누군가 살인을 했고 납치를 했다는 말도 그들에겐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됐죠?”

“그냥 그대로 놔뒀어요.”

“그 놈들이 그냥 갔다는 말이요? 재미있는 놈들이야.”

그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기서 우선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달러 흥정을 붙여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한 발짝만 벗어나면 밀림지대가 펼쳐진다. 달러가 유통될 리 없었다. 가지고 온 짐과 흥정을 했더니 그건 이미 압수되어 뚱보 관리의 손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아침에 물 한 양동이를 들여보내 주고는 식사가 끝이었다. 포터들은 자기 운명에 대해 초연한 듯 보였다. 물 한 바가지를 먹고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모포에서 실을 빼내어 자기들끼리 실놀이를 하면서 희희낙락이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꺼번에 격심한 여독이 덮쳐왔다. 물 한 바가지를 마시면 두 배의 땀을 쏟아야 했다. 가시에 찔린 상처가 곪아 들어가서 일어나 앉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헛것이 보이다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바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죽음, 몸서리가 쳐졌다.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주니까 ‘얌’이라는 감자로 갈아 만든, 떡도 아니고 빵도 아닌 걸 몇 개 가져다주었다. 공갈빵같이 입에 닿자마자 부서졌고 맛도 비슷했다. 그러나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옆에 있는 포터들이 군침을 흘려도 외면해버렸다. 우선 내가 살아야 했다. 그렇게 먹고 나면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반지는 ‘무무’라는 돼지고기 요리가 되어 돌아왔고, 끈 떨어진 시계는 후추가 잔뜩 들어 있는 도마뱀 스프로 변했다. 도마뱀 다리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잠이 들었다. 주머니칼, 윗도리가 차츰 간수들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포터들은 하나둘씩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어 나갔다. 간수들은 내 바지까지 벗겨내고는 흰 피부를 보고 손가락질을 했다. 혼자 보기엔 아까웠던 모양인지 밖에서 열댓 명의 사람들을 끌고 들어왔다.

부스럼딱지가 더덕더덕 붙어있는 아이 하나가 긴 꼬챙이로 나를 집적거렸다.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동물을 대하듯 했다. 자기 엉덩이를 까보이기도 하고 내 입안에 꼬챙이를 쑤셔 넣기도 했다. 이제 죽는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흔들리는 노란 빛깔의 시야가 펼쳐질 뿐이었다.

버르적거리는데 손에 뭔가가 잡혔다. 짐꾼들이 씹다가 남겨둔 부아이였다. 시고 텁텁한 맛이 입안을 휘저어 놓았다. 도저히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었지만 뱉어내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환영이 펼쳐졌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내가 보였다. 하늘엔 인간새들의 에어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전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앞뒷집에서 태어나, 십년 내내 나한테 얻어맞다가, 모래 채취선이 드나드는 강에서 스쿠루에 걸려 죽은 친구놈이 그 모습 그대로 바보같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스쳐지나갔던 여자들, 그 여자들과 붙어먹은 남자들, 이브껌만 씹던 학교 앞 당구장 볼딱쇠, 그의 주먹에 이가 나간 파출소 김순경, 이사님 안방마님을 노리던 동료 여직원, 두 여자에게 모두 버림받은 이사님, 토큰 가판대 할아버지의 검버섯 핀 손, 할아버지 가판대를 네번째 털다가 끝내 붙잡힌 가출 2년차 섬청소년, 주문 같은 노래를 부르며 집단으로 자위행위를 하던 짐꾼들, 스물여덟 조각난 두개골을 가졌던 그들, 너무 가까이서 데모 구경하다가 뒤에서 던진 화염병에 맞아 온몸에 중화상을 입은 후배,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여자후배, 시대를 저주하며 소주 한 병을 나눠 먹고서 학생회관 옥상에서 동반자살한 그들…. 그들을 투사로 만든 어이없는 군중…. 잠자리들처럼 떼로 날아다녀도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맥락을 벗어나는 암전(暗轉)이 꽤 길게 지속됐다. 내 머릿속의 무대는 어수선했다. 무엇을 옮기고 바꾸고 깨지고 감고 치우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청테이프의 표시선을 따라서 몇 초 안에 새 무대가 완성된다. 웃음이 나왔다. 삶의 연출도 그러하리라.

제 아무리 심각한 연극도 내겐 모두 코미디였다. 난 가끔 그 우스꽝스런 삶의 발작적인 변태과정을 즐기기 위해 대학로를 찾았다. 기호와 약속을 무시하고 보는 연극은 삶의 무정부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표본이었다.

실가닥에 매달린 듯한 아슬아슬한 밝기의 조명이 서서히 들어왔다. 누군가 내 안에 들어와 현실과 환상을 50대50의 비율로 섞어 흔드는 것만 같았다. 뿌연 거품이 자지러지며 솟구쳐 올랐다. 내 안에는 남아있는 게 별로 없었다. 누군가 흔들었다. 나는 동전 몇 개가 들어앉아 있는 돼지저금통처럼 요란하게 흔들렸다.

놀랍게도 나를 흔든 사람은 진흙투구를 쓴 전사였다. 이젠 정말 죽는구나! 두개골이 깨지고 걸죽한 뇌골수가 피범벅이 되어 흘러내리는 장면을 본 것도 같고 내 스스로 당하는 걸 느끼기도 한 것 같았다.

그 다음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남아있던 의식들이 급작스럽게 어디론가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내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처럼 내 삶의 무대도 그처럼 암전 속에서 후다닥 종결되고 만 것이다. 나는 길들여져 온 대로, 난데없는 운명에 순응했다. 편안했다. 그렇게밖에 묘사할 수 없다. 그때 나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나는 죽음은 그런 것이라고 믿고 있다. 태허(太虛)가 궁창(穹蒼)을 메운 세상! 그래서 더욱 죽음의 공포가 강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서 짐작되는 저 광대무변한 텅빔은 혼자서 거대한 외로움으로 부들거리고 있으니까. 태허와 한몸이 되지 않는 한 그 편안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때때로 고달픈 일상의 한켠에서 태허를 추억해보지만 그건 공포 그 자체였다.

눈을 떴다. 태허가 공중폭발을 한 셈이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칠판을 가득 메운 경제수학 시간의 수식과 그래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누워있는 곳은 진흙투구를 쓴 부족의 마을이었다.

얘기는 간단했다. 우현이 그들을 이끌고 행정사무소를 습격하여 나를 구해온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제 정신이 돌아왔고 부족은 내 건강을 기원하는 축제인지 푸닥거리인지 모를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우현을 잡아갈 때와는 또다른 웅얼거림이 진흙투구를 통해 공명되었다. 전사들이 바쁘게 왔다갔다했다. 마치 꼬치를 다 벗지 못한 검은색 애벌레들이 꿈지럭거리는 것만 같았다. 내 몸에 돼지기름을 두껍게 바르고 네댓 명의 전사가 눈 바로 위에서 창부림을 하고 있었다. 덮칠 기세로 내려오던 창들은 내 몸에 닿자마자 미끄러져 내렸다.

나는 그들이 주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아먹었다. 처음엔 묽은 죽으로 시작하여 빵과 생선, 고기, 딱딱한 나무열매와 새끼 거북의 뼈까지 가리지 않고 먹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일어나서 걷게 된 것을 기념하여 그들의 집 지붕만한 육지거북을 잡아와서 잔치를 벌였다. 거북의 생간을 씹어먹는 나를 보며 그들은 더욱 신나게 춤을 추었다.

“너무 그렇게 인상만 쓰고 있지 마라. 좋든 싫든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맛있지 않니? 쟤들은 생간을 먹는 사람에게 동지애를 느끼는가 보더라.”

진흙투구를 쓴 우현의 말이었다. 전사들과 똑같이 성기에 나무 파이프를 끼우고 피부마저 새까맣게 타버려서 목소리가 아니면 분간할 수 없었다.

“뭐라고? 여기서 활동을 한다고? 이 살인마들이랑?”

“그 포터들은 이 마을을 습격했던 부족 사람들이었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다치고 적어도 한국하고 연락은 되는 곳에서 활동캠프를 차려야 되잖아. 여긴 해도해도 너무한 곳이야.”

“연락은 뭐 하러 해? 활동비 받으러? 여긴 돈 같은 거 필요 없는 곳이야. 또 우리가 이 사람들한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니? 내 말은 그냥 여기 사람이 된다는 거야. 너도 꿈꾸던 그런 곳 아니냐?”

그는 마냥 즐거워했다. 목소리가 제일 큰 사람도 우현이었다. 항상 사람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말을 배우고 웃고 떠들었다.

수줍음이라곤 전혀 없는 마을 처녀들은 틈만 나면 우현의 성기막대기를 만져보려고 서로 다투기 일쑤였다. 유부녀들은 내놓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식사 때가 되면 얌과 타로로 요리한 탄수화물 음식을 들고 줄을 섰다. 음식을 전해주면서 뒷사람의 눈총을 받으며 오랫동안 재잘거렸다.

한번은 어느 주책맞은 아줌마 하나가 제 흥에 겨워 우현의 성기를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말 많은 여자들 입방아가 남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남편은 마을 광장에 마누라를 끌고 와서 원수에게 하는 것처럼 난폭하게 구타했다. 모두들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위에 빙 둘러서서 과격한 몸짓으로 남자를 응원하는 것이다. 여자는 입이 돌아갈 지경으로 얻어맞고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여자가 겨우 숨만 할딱이고 있을 때 옆마을에서 남자들이 몰려왔다. 여자의 친척들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 목청을 높여 시비를 가리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발작을 일으키듯이 광장 귀퉁이로 달려갔다. 자기 머리를 석상에 마구 짓찧는 것이다. 단단해 보이던 진흙투구가 산산조각 났다. 남자는 자기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한 것 같았다.

남자의 얼굴은 뭐랄까, 희번덕이는 눈동자로 광선총이라도 쏠 기세로 험악해져 있었다. 이쯤되면 뭔가 타협이 이뤄져야 했다. 부족의 어른들이 직접 여자의 친척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마을대표단과 여자의 친척대표단,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광장에 빙 둘러앉았다. 구경꾼들은 어떤 발언에는 야유를 퍼붓다가도 같은 사람의 다른 발언에는 동의를 표하는 듯 열광적인 춤을 추기도 했다.

회의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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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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