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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찬미자 미켈란젤로, 신에 귀의하다

‘몸’의 찬미자 미켈란젤로, 신에 귀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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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과 예술을 삶의 제왕으로 삼아 교회 비판에 앞장섰던 미켈란젤로. 예순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신에 귀의하기까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파격과 모순, 불균형의 균형으로 예술의 한 정점을 산 어느 천재의 초상.
장승업이 왕에게 불려갔으나, 몇 번씩 궁궐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미켈란젤로처럼 멋진 반권력 예술가상을 그려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빙 스톤의 소설 ‘미켈란젤로’나 이를 원작 삼아 만든 영화 ‘고뇌와 황홀’은 ‘취화선’과 전혀 달랐다. ‘고뇌와 황홀’은 ‘천지창조’를 그리는 4년 동안 벌어진 교황과 미켈란젤로 간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시저로 나왔던 렉스 해리슨이 교황, ‘벤허’의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로 나온다. 모두 ‘강한’ 남자들이다.

당시의 교황은 지금 우리가 보는 교황과는 매우 다른, 시저처럼 전쟁을 지휘하는 대장군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버릇 삼아 명령하듯 묻는다. “언제 끝나느냐?” 화가는 언제나 “내가 만족할 때”라고만 답한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불가능한걸까? 장승업도 “꼴려야 그리지”라고 하지 않았는가. 왕에게 그렇게 답했다는 식의 얘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랬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까? 그러나 화가를 아끼는 왕이어서 천민인 그를 부른 것이니 설마 죽이기야 했을까?

‘고뇌와 황홀’은 남자만의 영화는 아니다. 과로로 쓰러진 화가를 극진히 간병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르네상스 최대 권력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딸 티치나. 당시 유부녀인 그녀가 미켈란젤로의 애인이었다는 증거는 없으니 픽션인 셈이다. 둘은 미켈란젤로가 어릴 시절 공부한 로렌초의 조각학교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나, 병약한 티치나가 명문가로 시집가면서 미켈란젤로는 귀족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고 설정돼 있다. ‘취화선’에도 그런 여인이 장승업의 첫사랑으로 나오나, 그 실연이 양반에 대한 증오심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장승업의 경우도 괜한 기생들 얘기 말고 그런 사랑으로 꾸밀 수는 없었을까? 아니, 기생 이야기를 할라치면 차라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춘화를, 장승업이 그들과의 사랑을 통해 완성한 작품이었다고 보면 어떨까. 낮에는 돈벌이를 위해 완벽한 형식미의 중국화를 그리고, 밤에는 기생과의 정사를 소재 삼은 춘화를 그렸다면. 그리하고 나면 춘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영화에서 춘화는 철저히 매도되고 있다.

영화 잡지들은 ‘취화선’에 대해 크게 떠들어대고 특히 장승업 역을 맡은 영화배우 최민식의 연기를 칭찬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화가가 아니라 ‘조폭 같은’ 최민식만 남아있다. 물론 키가 크고 근육질인 미남 헤스턴이 키가 평균 이하이고 비뚤어진 입과 코를 가진 추남 미켈란젤로를 연기한 것 역시 한마디로 코미디였다. 조폭 같은 장승업 연기도 마찬가지다.



‘고뇌와 황홀’에서 미켈란젤로는 몇몇 여자들과 사랑 혹은 불륜에 빠지고, 심지어 창녀와의 관계로 성병에 걸리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관련해 유일하게 근거가 남아있는 여성은 그가 60세 때부터 10년간 친구로 지낸 비토리아 콜로나뿐이다.

‘남자의 벗은 몸’이 말하는 것

그러나 최근 번역된 독일 로로로판 평전 등을 보면 동성애는 근거 없는 비방으로 부정된다. 그런데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쾌락의 화신으로 그려진 ‘레다’와 조각 ‘밤’과 ‘낮’, 그리고 사랑을 노래한 소네트 한 편뿐이라는 점은 문제다. 솔직히 그가 동성애자였다면 또 어떤가?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반 고흐로 분한 팀 로스가 그 비슷한 얼굴과 체구의 미켈란젤로 역을 맡는다면 확실히 동성애자로 그려질지도 모른다.

최근 전우익이 쓴 ‘사람이 뭔데’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내리고 있다. 역시 베스트셀러 작가인 시인 신경림은 그를 두고 ‘깊은 산속의 약초처럼 귀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전우익 자신은 ‘사람이 뭔데’라고 묻고 있으니 그리 부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차라리 약초라고 하면 모르되.

‘사람이 뭔데’의 광고는 ‘소로우, 니어링, 그리고 오늘·여기의 전우익!’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소로우도 니어링도 ‘사람이 뭔데’라고 말한 적은 없다. 환경오염이나 생태파괴는 인간이 저지른 짓이다. 아니, 전쟁을 비롯하여 모든 악행은 인간이 저지른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부정할 것인가? 인간 청소를 할 것인가?

소로우나 니어링의 책이 널리 읽히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나 시민불복종주의자로서 소로우나 니어링이 아니라 그들의 자연주의만을 강조하는 최근의 풍조는 내게는 의문이다. 특히 니어링의 경우, 그의 전기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서 풍자되는 것 이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과도하게 소개되는 이유도 궁금하다. 그의 조국인 미국은 물론 세상 어느 나라에서 이렇듯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을까. 나는 모른다. 노장의 도교주의와 관련이 있을까. 그것으로 오늘·여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의 해결은 인간 부정, 인간 혐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의 추구에 있다.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르네상스인이 그러했다. 그 새로운 인간상이 바로 ‘다비드’ ‘모세’이고, 그 새로운 세계가 바로 ‘천지창조’요 ‘최후의 심판’이다. 인간의 벗은 몸을 미켈란젤로 만큼 아름답게 창조한 르네상스인은 없다. 특히 남성의 벗은 몸을. 그래서 미켈란젤로를 동성애자로 보는 견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인은 신이 자신과 꼭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음을 미켈란젤로는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닌, 신에 가까운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창조됐다고 믿었다.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창조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종교적 편견에 의해 성기 부분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후 500년이 지난 1994년 복구 때 ‘걸레’들은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드러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그리고 그 사이를 지배한 5세기의 어둠이란! 그러나 여전히 예수와 마리아는 옷을 벗지 못하고 있다. 5세기가 지나도! “예수와 마리아도 인간이기는 마찬가진데.” 하늘에서 미켈란젤로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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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 영남대 법대 교수 >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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