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고증에 따르면 맥주는 기원전 4000년경, 지금의 중동지역인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수메르 민족이 처음으로 제조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맥주의 기원을 이야기하려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최초의 맥주는 벼나 보리 등의 곡식이 물에 불려져 자연발효가 일어나면서 생기게 된 걸쭉한 강장제 음료로서 실제로 ‘액체 빵’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헤로도투스의 말에 의하면 이집트인에게 문명을 가져다준 오시리스 신이 파라오의 아들들에게 맥주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헌 중의 하나인 함무라비 법전에는 맥주 제조법까지 나와 있다.
중세에 들어와서는 수도원들이 필요에 의해 맥주 양조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수도원 안의 양조장들이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결과 맥주의 맛은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었으며 맥주를 제조할 줄 아는 양조장들의 권세 또한 드높아졌다. ‘맥주명가 스틴포’란 만화도 수도원의 양조장에서부터 그 이야기가 출발한다.
순전히 자연 발생적인 발효에만 의지해왔던 르네상스 시대의 맥주 양조업자들은 그때까지와는 다른 맥주의 발효 과정을 조절해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의 하나가 높은 온도에서 활동하는 효모(담금→발효→저장→열처리, 이 제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효모다. 어떤 효모를 사용했느냐, 혹은 효모를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맥주의 맛은 달라진다)나 발효통에 남아있는 침전물에 맥아즙을 첨가했다. 그 결과 이전보다 농도가 진해진 맥주를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포도주보다 값이 싸고 물보다 영양가 높은 그 맥주는 유럽 전역으로 점차 소비량이 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양상은 변한다. 나폴레옹 제국은 성직자 계급의 모든 재산과 재정적 특권을 박탈하고 몰수했다. 그후로 사기업 활동이 가능하게 되어 결국 그때부터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러한 산업 성장, 새로운 효모의 발견 등으로 맥주의 세계엔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맥주의 세계가 넓어지고 다양화되며 발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만나고 있는 맥주다.
맥주가 여름의 술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섭씨 22도 이상에서는 온도가 1도만 올라가도 맥주 판매가 20%씩 늘어난다니 말이다. 그러니까 여름은 더위가 최고의 마케터인 셈이다.
월드컵이 열린 기간 동안 서울 등 대도시 일부 지역에서는 당일 생산분만 갖고는 충분치 못해 재고로 주문 물량을 댔으며 공급량이 달려 생맥주를 팔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졌다고 한다. 길거리 응원 덕분에 생맥주 판매가 전례 없는 호조를 보였던 것이다.
심야영화 그리고 생맥주
나는 주로 병맥주를 마시긴 하지만 여름엔 생맥주를 마신다. 게다가 흑맥주를 마셔야 한다면 그건 단연 생맥주가 최고다. 맥주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가능한 한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마셔보고 싶지만 아직은 꿈같은 일이다.
히딩크가 유명세를 타기 이전부터, 히딩크 때문에 네덜란드가 우리와 가까운 나라라고 느끼기 시작한 이전부터 나는 네덜란드 맥주인 그롤쉬(Grolsche)와 하이네켄(Heineken)을 좋아했다. 하이네켄은 창업주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기 때문에 독일식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녹색병에 든 하이네켄은 맥주의 독특한 효모 맛과 향기가 풍겨나며 뒷맛이 매우 깔끔하다. 그롤쉬는 하이네켄보다 약간 쓰고 거친 것이 남성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맥주다. 암스텔(Amstel)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흐르는 강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빛깔이 아름답고 맛은 부드러우면서도 쌉싸름하다.
심야영화를 보고나와 그롤쉬나 하이네켄 한 병을 마시고 있노라면 때로 인생에 이렇게 행복한 시간도 있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개인적으로 나는 약간 쓰고 강한 맛의 맥주를 좋아하는 편이다. 과일향이 첨가된 흰색 맥주 호가든(Hoegaarden)은 잘 마시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멕시코에서는 라임을, 우리나라에선 레몬과 함께 마시는 달짝지근한 맛의 코로나(Corona)도 나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상큼한 맛 때문에 친구들에게 권하기도 한다.
아일랜드 맥주 기네스(Guinness)는 가장 유명한 드라이 스타우트로서 흑맥주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기네스의 개성적인 맛은 구운 맥아와 홉이 들어가고 숙성된 맥주와 덜 숙성된 맥주를 혼합해서 나온 것이라고 알고 있다. 날씬하고 긴 투명 유리잔에 기네스를 따를 때 생기는 크림처럼 부드럽고 고운 거품이 이 맥주의 가장 큰 매력이다.
독일에 있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마신 맥주는 단연 필스(Pils)다. 필스는 함부르크에서부터 뮌헨까지의 넓은 지역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고 있는 맥주인데 북부에서는 쓴맛이 강한 필스 맥주의 맛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부드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맛의 변화를 나는 라인강변의 한 식당에서 체험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오래 살았던 친구의 말에 따르면 필스는 체코의 필젠(Pilsen)이라는 마을에서 제조 방법을 이어받은 맥주라고 한다. 맑고 연한 호박색의 필스 한잔! 낭독회가 끝난 후, 혹은 여행지에서 지친 저녁의 끝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낭만과 맛과 시간이었다.
필리핀의 산미구엘(San Miguel)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맥주다. 산미구엘의 맛은 우아하고 조화로운 향이 가득하고 입안에 풍부한 맛을 남긴다. 벨기에산 레페(Leffe)와 스텔라(Stella) 맥주가 이 맛과 유사한 편이다.
일본의 유명한 맥주 삿포로는 생맥주로 마실 때 더욱 그 맛을 잘 느낄 수 있다. 특수 세라믹 필터 처리가 돼 있어 톡 쏘면서도 깨끗한 맛이 나는 게 특징이다. 나는 주로 일본식 우동이나 초밥을 먹을 때 이 맥주를 마시곤 한다.
고소한 견과류의 맛이 난다는 맥주 슈나이더(Schneider), 밀을 사용하고 과일향을 첨가한 탁한 흰 맥주 바이젠(Weizen), 홉을 사용한 그윽한 맛의 쾰슈 맥주, 스코틀랜드의 스카치 에일(ale) 타입의 맥주들, 중국의 대표 맥주라는 칭다오(靑島)는 내가 아직 마셔보지 못한 맥주다. 맥주의 맛은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하나도 없듯 미세한 차이를 갖고 있다. 단지 시원한 것, 거품이 나는 시원한 음료, 그게 맥주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내가 가장 가깝게, 자주 마시는 술은 단연 국산인 카스나 라거 맥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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