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문학의 거장, 스탕달
젊은 날 스탕달은 나폴레옹 체제하에서 군인과 관리 생활을 했으며(1812년 전쟁 때는 러시아까지 갔다가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퇴각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는 주로 이탈리아에 머물며 딜레탕트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다시 관직을 얻은 것은 1830년 7월 왕조가 성립됐을 때다. 대체로 일신의 행복과 안락을 추구했던 그의 삶은 별다른 얘깃거리를 주지 않는다.
문학적 측면만 봐도 그러하다. 그에게서는 보통 19세기 작가들이 보여주는 순교자적 측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그는 ‘펜의 도형수’를 자처하며 괴물처럼, 짐승처럼 써나갔던 ‘열혈남’ 발자크와도, ‘일물일어설’의 원칙에 따라 피를 말리는 고통을 맛보며 소설 쓰기에 임했던 ‘냉혈한’ 플로베르와도 다르다. 등단 시기도 상당히 늦었다. 첫 소설 ‘아르망스’를 발표한 것은 1826년, 그가 불혹의 나이를 넘겼을 때였으니 말이다. 이후 그가 쓴 작품은 회상록이나 에세이를 빼고 소설에만 국한한다면 그다지 많은 양이 아니다. 그런 그가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소설 중 하나인 ‘적과 흑’을 썼다. 바로 이 대목이 극적이다.
군인 혹은 관리로서의 출세를 꿈꾸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못생긴 외모에 대한 보상 작용인 양 수차 연애를 거듭했으나 대개의 경우 실연을 당했던(대신 ‘연애론’을 남겼다) 한량이 1830년에 ‘적과 흑’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완성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47세였다. 이 소설은 182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한 형사 사건(‘베르테’ 사건)을 소재로 취했는데, 그 시의성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 당시 스탕달은 발자크보다 지명도가 낮은 작가였다. 그러나 스탕달은 자신의 소설이 훗날에는 유명해질 것이라고 믿었고 결국 그 예언이 실현됐다. 실제로 ‘적과 흑’은 문학성은 물론 읽는 재미마저 갖춘, 고전치고는 제법 드물게 가독성이 높은 소설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자.
‘적과 흑’은 주인공의 야망과 좌절에 주목한다면 비극적인 성장소설이자 모험소설이고, 그의 사랑과 연애에 집중한다면 대단히 감성적인 연애소설이며, 자유간접화법의 사용이 돋보이는 섬세한 심리 묘사에 매료된다면 훌륭한 심리소설이다. 어떤 경우든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매혹적 청년 쥘리앵 소렐이다. 나폴레옹이 힘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면 스탕달은 문학으로, 쥘리앵은 연애로 비슷한 위업을 달성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나폴레옹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인 입장을 주인공에게는 순수한 열광과 숭배의 형태로 반영한다.
한편 스탕달은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으로서 귀족과 민중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민중에 관한 한 혐오와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더러운 것을 혐오하는데, 민중이란 내 눈에 항상 더러워 보인다”라거나 “민중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내게는 순간순간마다 고통이 될 것이다”라거나 “가겟방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매달 보름씩을 감옥에서 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지 않은가(‘앙리 브륄라르의 삶’). 그럼에도 정작 자기 소설의 주인공은 목수의 아들, 즉 민중에서 택했다. 무엇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일까.
인생을 나폴레옹처럼!
쥘리앵 소렐은 무식하고 거친 목수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비나 형들과는 달리 도무지 육체노동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야리야리한 몸에 뽀얗고 곱상한 얼굴,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행동거지, 뛰어난 지력과 예민한 감수성 등 모든 점에서 너무나 민중답지 않다. 환경결정론과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주인공의 성격에 동기화가 다소 부족한 편이다. 달리 말해 작가의 입장에서는 주인공의 현재 위치와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차이가 중요했던 것 같다. 즉 “드높은 마음, 비천한 신세”(1부 10장의 제목)!
쥘리앵에게 출세는 ‘군인’과 ‘성직자’라는 구체적인 명사로 나타난다. 물론 그의 진짜 꿈은 늙은 군의관이 불어넣어준 대로 ‘나폴레옹’이 되는 것이었다. 인생을 나폴레옹처럼!